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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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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생에 밥 주면 얼치기 좌파?

실타래처럼 얽힌 무상급식 논란…
‘미국식 선별주의’ 대 ‘유럽식 보편주의’ 대립, “급식은 의료·주택 같은 ‘가치재’” 주장도
등록 2010-04-30 14:33 수정 2020-05-03 04:26

“(무상급식은) 얼치기 좌파들이 내세우는, 국민을 현혹하는 정책.”(홍준표 한나라당 의원, 3월10일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
“도교육청의 (무상급식) 안은 무조건 배급하자는 북한식 사회주의 논리.”(김문수 경기도지사, 1월8일 인터뷰)
“무상급식 하고 나면 옷도 다 사주나, 집도 다 사줘야 하나.”(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3월5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
‘부자 무상급식’ 얼치기 좌파의 논리?

6·2 지방선거에 출마한 10명의 교육감 예비후보들이 지난 3월24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한국건강연대 사무실에서 친환경 무상급식 정책 협약식을 연 뒤 협약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6·2 지방선거에 출마한 10명의 교육감 예비후보들이 지난 3월24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한국건강연대 사무실에서 친환경 무상급식 정책 협약식을 연 뒤 협약서를 들어보이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의가 뜨겁다. 뜨겁다 못해 거친 말까지 튀어나온다. 이 긴 이야기의 진앙은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경기도의회다. 지난해 7월 경기도의회는 도교육청이 올린 무상급식 예산안 85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무상급식이라는 ‘낯선’ 의제가 사회적으로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논쟁에 기름을 부은 이는 다름 아닌 정부와 여당이었다. 아이들 점심값을 아끼는 정부가 22조원의 예산이 드는 4대강 사업을 추진하자 비판 여론이 비등했다. 여론을 등에 업은 민주당은 지난 2월 초·중등학교 무상급식을 최우선 교육 공약으로 확정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의제를 선점하겠다는 의도였다. 여론에 밀린 여당 후보들 사이에서도 무상급식 공약이 나왔다. 서울시장에 출마한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은 무상급식을 사실상 공약으로 내세웠다. 같은 당 손숙미 의원도 무상급식을 도입하는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와 여당은 해마다 2조원 수준의 예산 지출이 필요한 무상급식안에 대해 여전히 난색을 표하고 있다. ‘좌파 포퓰리즘’ ‘얼치기 좌파’ 등의 말이 나오는 이유다.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의를 자세히 보면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각자의 논리를 따져보면 지금까지 한나라당과 야당이 주로 해온 말과 어긋난다. 민주당 등 야당은 부잣집 아이까지 포함한 모든 학생에게 급식을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도 같은 입장이다. 한나라당 쪽을 보면 더욱 아리송하다. 한나라당은 부유층 학생에게는 밥을 공짜로 줄 수 없다는 태도다.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 “우리는 ‘서민 무상급식’, 저쪽은 ‘부자 무상급식’을 하자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언뜻 보면 여야가 지금까지 파놓은 참호를 버리고 상대편 진영으로 건너가 전투를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한나라당은 무상급식을 두고 좌파 포퓰리즘 정책이라며 비판한다. 부유층 아이들에게도 밥을 공짜로 먹이자는 것이 ‘좌파’의 논리가 된 셈이다.

이 엉뚱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무상급식을 둘러싼 논쟁의 이면으로 한 발자국 들어갈 필요가 있다. 배경에는 사회복지와 교육·경제·환경 문제가 씨줄과 날줄처럼 뒤엉켜 있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는 무상급식의 혜택이 어느 계층까지 미쳐야 하는지를 놓고 뿌리 깊은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또 경제 분야에서는 학교 급식이라는 상품을 어떻게 볼지를 두고 의견이 엇갈린다. 급식을 의무교육의 테두리에 포함할지도 민감한 쟁점이다. 그만큼 무상급식이 간단치 않은 문제라는 뜻이다.

먼저 복지 분야에서는 무상급식을 놓고 이른바 ‘선별주의’와 ‘보편주의’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선별주의는 빈곤 계층을 골라서 사회복지 혜택을 주는 것이고, 보편주의는 소득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극빈층을 지원하는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선별주의에 가깝고, 초·중등학교 의무교육은 보편주의에 가깝다.

김진영 강원대 교수(일반사회교육학)는 선별주의에 가까운 입장이다. 그는 “가난한 학생은 당연히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학생에게 무상으로 급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경제적 능력이 있는 부유층은 스스로 밥값을 내야 한다는 말이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수(교육학)도 “사회복지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차별적 서비스를 주는 것”이라며 “저소득층 아이들만 무료 급식을 받으면 상처나 차별을 받는다는 지적이 있는데, 이 부분은 일부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지난 4월5일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주최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이명박 대통령 등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아 ‘희망의 나무 심기’ 행위극을 벌이려 하자 경찰이 막아서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지난 4월5일 친환경무상급식풀뿌리국민연대 주최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이명박 대통령 등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담아 ‘희망의 나무 심기’ 행위극을 벌이려 하자 경찰이 막아서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선별 지원은 포용 아닌 배제”

보편주의의 입장은 다르다. 빈곤층에게 한정되는 서비스는 곧 질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 요지다. 이상이 제주대 교수(의료관리학)는 “미국 의료제도는 선별주의에 근거하고, 유럽 의료제도는 보편주의에 근거했다”며 “미국에서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 의료서비스의 질은 형편없지만, 유럽에서는 사실상 무료인 의료서비스를 받는 여러 계층의 까다로운 구미를 맞추기 위해 국가가 어느 정도 질을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선별주의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위험에 대한 지적도 있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자산 조사를 거쳐 경제력에 따라 서비스를 제공하면, ‘받는 것 없이 주는’ 이들과 ‘없으면서 받는’ 이들로 나뉘게 된다”며 “이는 통합이 아닌 분리이고, 여기에서 포용이 아닌 배제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중산층 이상은) 국가가 자신의 호주머니에 손대지 못하게 하면서 국가에 기대는 것이 거의 없게 되고, 시민은 정치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이유를 못 찾게 된다”고 덧붙였다. 김종덕 경남대 교수(농업사회학)는 “무상급식은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식량권이라는 측면에서 국가와 지자체가 책임져야 할 의무”라고 말했다.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어난 불은 경제학계로 옮아붙었다. 무상급식이 국가가 공급을 책임져야 하는 ‘가치재’인지 여부가 논점이다. 가치재란 모든 국민이 일정 수준 이상의 혜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정부가 직접 생산·공급하는 상품을 말한다. 의료·주택·교육 서비스가 예다.

논쟁의 실마리는 이준구 서울대 교수(경제학)가 제공했다. 그는 최근 자신의 누리집에 올린 글에서 “(무상급식은) 가치재의 성격을 갖는다”며 “공공재나 가치재의 성격을 갖는 상품의 경우에는 무상 배분이 원칙”이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에 따라 “부유층 자제에 대한 무상급식이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다른 의견도 있다. 이영 한양대 교수(경제금융학)는 “모든 가치재를 국가가 공급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건강보험처럼 소득에 비례해서 공급되는 것도 있고, 안전벨트처럼 국가 규제를 통해서 (개인이) 마련해야 하는 것도 있다”고 말했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는 “우리나라에서 초·중학교 의무교육을 하면서 부유층 어린이에게 따로 수업비를 걷지 않듯이, 어린이에게도 균등한 급식을 받도록 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무상교육 범위, 사회적 합의에 따라 달라

급식이 의무교육의 테두리에 포함될지도 관심거리다. 송기창 교수는 “의무교육에 대한 정설은 없다”며 “무상급식은 나라 재정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선순위를 따져 판단할 문제”라고 밝혔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무상급식보다 고등학교 의무교육제 전환이 교육 재정 투자에서 더 시급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이혜영 한국개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의무교육은 기본적으로 취학의 의무와 무상 교육으로 구성된다”며 “무상 교육의 범위는 한 나라의 경제 상황과 사회적 합의 수준에 따라 유동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상급식은 원칙적으로 무상교육의 테두리가 확장되면서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다”고 말했다.

허남혁 대구대 겸임교수(농식품지리학)는 “학교 급식을 둘러싼 논쟁은 더 많은 아이들이 더 건강한 식단을 더 보편적으로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기본적 목표에 근거해 이뤄져야 한다”며 “무상급식은 생각보다 매우 복잡하고 예민한 사안이므로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사례를 보니
보수당 정권 때부터 급식 질 떨어져

학교 급식을 둘러싼 영국의 경험은 우리나라에 소중한 반면교사가 된다. 영국은 1944년부터 무상급식을 구상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배경에는 전쟁과 신자유주의, ‘제3의 길’이 있었다. 국내 출간을 앞둔 (케빈 모건 지음·이후 펴냄)을 보면, 영국이 걸어온 길을 엿볼 수 있다.
영국의 학교 급식은 의무교육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1880년대 영국에서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아동의 영양실조가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이 문제가 폭넓게 인식된 계기는 1899년 보어전쟁이었다. 당시 모집된 신병의 신체 상태가 열악해 전쟁 수행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평가가 나왔다. ‘왕립 체격저하위원회’가 꾸려졌다. 위원회는 1906년 급식 제공에 관한 교육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지역 교육청은 빈곤 아동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할 수 있게 됐다.
집단급식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4년 제정된 교육법은 모든 지역교육청이 초·중등교육기관의 학생에게 급식을 제공하도록 했다. 무상급식은 아니었지만, 우유는 무료였다. 급식 값이 식재료비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따라붙었다. 당시 교육법에 대한 학부모 안내서에는 “학교 급식이 완전히 정착되면 급식은 교육체계의 일부라는 점에서 무상으로 제공될 것이다”라는 야심찬 전망이 실렸다. 의 저자인 케빈 모건 카디프대학 교수(도시 및 지역계획학)는 “이처럼 중요한 측면에 대한 복지 시대의 핵심적인 언급은 전후 노동당 정부의 뇌리에서 조용히 잊혀졌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학교 급식은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1970년대 등장한 보수당 정권은 급식 정책에 후진 기어를 걸었다. 보수당 정권은 일단 1980년에 교육법을 새로 제정했다. 지방정부가 더 이상 의무적으로 학교 급식을 제공할 필요가 없어졌다. 급식 가격의 상한선도 사라졌다. 학교 급식의 국가적인 영양 기준도 사라졌고, 무상 우유 급식도 철폐됐다. 1988년 지방정부법도 학교 급식의 뿌리를 흔들었다. 이 법으로 공공부문 급식에서 의무경쟁입찰제도가 도입됐다. 지역 당국은 학교 급식 위탁사업자를 외부 경쟁을 통해 선정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학교 식당에 진출했다. 가공식품이 늘었고 주방이 사라졌다. 학교 급식의 질이 떨어졌다. 1990년대 신노동당이 집권한 뒤에도 급식 정책은 큰 변화가 없었다.
정부가 나서지 않자, 민간이 나섰다. 2005년 영국의 유명 요리사인 제이미 올리버의 방송 프로그램으로 학교 급식에 대한 관심이 치솟았다. 정부는 2005년 ‘식탁을 바꾸자’ 보고서를 냈다. 학생들에게 끼니마다 최소 두 종류 이상의 과일과 채소를 제공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중앙정부보다 몇 발자국 더 앞선다.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집권당은 올해 8월까지 초등학교 1~3학년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무상급식을 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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