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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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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재벌에 칼 드나


공정위, 총수일가 편법세습 등에 악용되는 계열사 ‘물량 몰아주기’ 조사…
집권 후반기 재벌 단속 이례적
등록 2010-04-29 13:56 수정 2020-05-03 04:26

“재벌그룹 중에서 계열사끼리 내부거래를 안하는 곳이 어디 있나? 당국이 문제를 삼으려 들면 과연 안전한 곳이 있을까….”
4대그룹 계열사의 한 임원이 털어놓은 얘기다. 지난 2년간 이명박 정부와 밀월을 구가하던 재벌들이 요즘 바짝 긴장하고 있다. ‘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5월 초부터 재벌 계열사 간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직권조사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4대그룹의 한 임원은 “대관업무 담당임원으로부터 한참 전부터 경고음이 전달됐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총수 일가 지분 많은 기업에 집중

공정위는 이미 지난 3월 재벌들에 계열사 간 상품·용역 내부거래 현황을 모두 적어내라는 조사표를 보냈다. 대상은 공정거래법상 기업집단으로 지정된 자산 5조원 이상 53개 재벌에 속한 1139개 계열사다. 공정위는 조사표를 수거해서 재벌 내부거래 현황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법 위반 혐의가 있는 업체를 가리는 막바지 작업을 진행 중이다. 부당내부거래는 재벌 회사가 다른 계열사를 지원하기 위해 자금·자산·인력·상품·용역 등을 부당하게 제공하거나 현저하게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하는 위법행위다. 공정위 시장감시국 간부는 “부당내부거래 관행이 전반적으로 개선된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 그룹은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벌들이 공정위 조사에 긴장하는 것은 두가지 사정 때문이다. 첫째는 공정위의 직권조사가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4년 이후 6년 만이라는 점이다. 공정위는 2004년 12월 롯데·금호아시아나·동원 등 3개 그룹의 17개 계열사에 대한 조사를 마지막으로 손을 놓고 있었다. 2006년 2월 동양그룹의 일부 계열사를 제재한 적이 있지만, 신고 사건을 처리한 것이고 규모도 작았다. 공정위는 2004년 2월 부당내부거래 관행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도록 이후 3년간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사실상 공수표였던 셈이다. 시민사회단체에서는 이를 참여정부 중반 이후 재벌개혁 후퇴 기조와 연관짓는다.
두 번째는 이번 조사가 대규모 ‘물량 몰아주기’에 초점을 맞춰, 재벌 총수 일가를 정조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량 몰아주기란 총수 일가가 보유한 회사에 다른 계열사들이 사업 물량을 몰아줘서 지원하는 내부거래의 한 유형이다. 총수 일가가 세운 비상장기업에 다른 계열사들이 물량 몰아주기를 해줘서 기업가치가 단기간에 급상승하면 증시에 상장시킨 뒤 주식을 비싼 값에 팔아 막대한 자본이득을 챙기는 수법이다. 이때 얻은 자본이득은 경영권 승계를 위해 필수적인 핵심 계열사의 지분을 사들이는 데 종잣돈 구실을 한다. 공정위의 물량 몰아주기 제재는 지난 2007년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이 글로비스에 물류 업무를 몰아준 것에 대해 96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전례가 있다. 하지만 이는 2006년 검찰의 현대차 비자금 사건 수사의 ‘설거지’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공정위가 자체적으로 물량 몰아주기 직권조사에 나서는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공정위 조사는 계열사 간 내부거래 비중이 높으면서 총수 일가 지분이 많은 기업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53개 재벌의 계열사 중에서 총수 일가 지분이 30% 이상인 곳은 28개 그룹의 125개사에 달한다(표 참조). 삼성·현대차·SK·LG·롯데 등 재계 상위 그룹은 물론 중·하위권 그룹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다. 이 중에서 비상장기업이 75%나 차지하는 게 눈길을 끈다. LG·GS·두산 같은 지주회사는 총수 일가가 그룹 전체를 지배하기 위해 많은 지분을 갖고 있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일반인은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비상장 계열사에 총수 일가의 지분이 많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현대차그룹의 글로비스 물량 몰아주기 흐름도

현대차그룹의 글로비스 물량 몰아주기 흐름도

‘몰아주기’ 직권조사는 사실상 처음

내부거래를 한다고 무조건 법 위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정상 가격보다 비싸게 사주거나 싸게 팔아서 경쟁 제한 효과가 발생할 때만 부당 지원으로 제재한다. 4대그룹에 속한 한 정보기술업체의 임원은 “그룹 계열사와의 내부거래 비중이 매출액의 30% 정도지만, 계열사라고 봐주는 것이 없어 거래 단가는 오히려 계열사가 더 안 좋다”고 결백을 강조한다. 하지만 물량 몰아주기는 거래 가격에 문제가 없더라도 ‘현저한 규모’로 사업 물량을 몰아줘서 기업 성장을 지원하는 것만으로도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 공정위는 이번 조사에서 계열사 내부거래 비중이 높으면서 총수 일가 지분이 많은 정보기술(IT)·물류·광고·보험 업종에 특별히 주목하고 있다. 10대그룹에 속한 한 정보기술업체의 임원은 “주요 그룹의 경우 대부분 정보기술업체를 자회사로 갖고 있는데, 전산시스템 통합 구축 등 제공하는 서비스가 거의 유사해 거래 단가만 서로 비교하면 문제 여부를 바로 알 수 있다”고 귀띔한다.

재벌이나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거래 가격을 문제 삼는 것은 몰라도 단지 거래 물량이 많다는 이유로 제재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한다. 전경련 산업본부 간부는 “기업집단이 내부거래를 하는 것은 자체 생산이나 시장 구매, 하도급 거래보다 비용이 적고 효율성이 높다는 경영상 이점 때문인데,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자동차회사의 한 임원도 “계열사에 물류사업을 맡기는데, 다른 업체에 맡기면 단가가 더 비싸 회사에 손해”라고 말했다. 또 정보기술, 광고 등은 회사 보안 때문에 외부 회사에 맡기기 힘든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공정위는 부당내부거래가 시장의 공정경쟁을 해치고 경쟁력 없는 계열사를 지원함으로써, 결국 시장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말한다. 또 부당내부거래는 기업 투명성과 대외 신인도를 떨어뜨리고, 한국 기업의 주식이 실제 가치보다 저평가되는 이른바 ‘코리아디스카운트’의 요인으로도 꼽힌다. 공정위 시장감시국의 간부는 “물량 몰아주기는 재벌 총수 일가의 편법 상속과 증여 수단으로 활용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선진국은 계열사 간 내부거래나 물량 몰아주기를 제재하는 경우가 없다. 공정위는 이에 대해 “재벌은 한국 경제의 특수한 문제이기 때문에 외국과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일축한다.

명확한 기준 없어 논란

또 다른 논란은 물량 몰아주기를 어떤 기준으로 제재할지에 대한 공정위의 명확한 기준이 아직 없는 점이다. 공정위는 현대차그룹을 물량 몰아주기로 제재했지만 아직껏 세부 심사 지침은 마련하지 못했다. 공정위는 △지원을 해준 계열사의 관련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 △관련 시장의 규모와 비중 △지원받은 업체의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 객관적 요인을 종합적으로 반영해 제재 기준을 정할 방침이다. 하지만 전경련은 “기준을 먼저 제시하고 그것을 어기면 처벌하는 게 정상인데, 이번에는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소급 처벌 논란도 제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재계는 공정위가 재벌의 아킬레스건인 물량 몰아주기 조사에 나선 배경에 촉각을 세운다. 역대 정부의 재벌 조사는 통상 출범 초기에 이뤄져, ‘재벌 길들이기’라는 지적이 많았다. 대신 집권 후반기에는 재벌 조사가 흐지부지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친재벌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는 집권 초 2년간은 재벌 규제나 조사를 대폭 완화하다가, 집권 3년째 갑자기 부당내부거래 조사라는 칼을 빼들어 정반대 흐름을 보이고 있다. 10대그룹의 한 임원은 “한국 경제가 위기에서 가장 빨리 회복되고, 정부와 대기업의 관계도 좋지 않았느냐”며 뜻밖이라는 반응이었다. 재계에서는 집권 후반기 ‘재벌 군기 잡기’용이라거나, 정부 정책 기조가 친기업에서 친서민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등 여러 해석이 나온다.

[%%IMAGE3%%]“이참에 불법 승계 수단 악용 막아야”

공정위는 이런 정치적 시각에 펄쩍 뛴다. 대신 정호열 공정위원장이 올해 대통령 업무보고 때 조사 방침을 밝히는 등 강한 소신을 보이고 있다고 전한다. 정 위원장은 최근 기자와 만나서도 ‘낙지·가물치론’을 펴며 소신을 분명히 했다. 정 위원장은 “산지에서 잡힌 활어를 시장까지 운반할 때 수조에 낙지나 가물치를 함께 넣으면 고기들이 열심히 피해다니느라 싱싱한데 아무것도 넣지 않으면 오히려 신선도가 떨어지는 것처럼, 재벌도 공정위가 감시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현 정부 들어 재벌 규제를 완화하다 보니, 사실상 정부 안에서 재벌을 감시하는 곳은 공정위가 유일하다”며 공정위 역할론을 폈다.

경제개혁연대의 김상조 소장도 “정부가 재벌 규제를 완화하는 대신 시장의 공정한 경쟁질서를 확립한다고 강조했지만 지난 6년간 헛구호에 그쳤다”면서 “이번 조사를 제대로 해서 물량 몰아주기가 재벌의 편법·불법 승계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개혁연대는 또 계열사가 유망한 사업 기회를 총수 일가가 소유한 회사에 넘겨주는 이른바 ‘회사 기회 유용’ 행위를 금지하도록 상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량 몰아주기’ 총수 일가 얼마나 재미봤나
글로비스로 정 회장 부자 1조원대 이득

재벌그룹의 ‘물량 몰아주기’는 현대차그룹의 글로비스 사건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현대차의 정몽구 회장과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은 지난 2001년 2월 25억원을 들여 물류회사인 글로비스를 설립했다. 글로비스는 설립 직후부터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제철 등 그룹 주력사가 생산하거나 조달하는 완성차, 부품, 철강제품의 운송, 배달, 탁송 등 각종 물류 업무를 독점했다. 공정위 조사 결과 글로비스가 2001~2006년 4개 주력사와 내부거래를 한 금액은 3조1660억원에 달한다. 글로비스는 이같은 물량 몰아주기에 힘입어 매출액과 순이익이 불과 6년 만에 10배씩 껑충 뛰었다. 또 회사 가치가 급상승하자 2005년 말 증시에 상장해서 대주주인 정몽구 회장 부자에게 막대한 자본이득을 안겨줬다.
그러면 정 회장 부자가 얻은 자본이득은 과연 얼마나 될까? 경제개혁연대가 지난 2006년 9월 말 기준으로 계산한 자료를 보면, 정 회장 부자의 자본이득은 1조567억원에 달한다. 당시 3만원대 초반이던 글로비스의 주가가 최근에는 11만원대 전후까지 오른 것을 감안하면 정 회장 부자의 실제 자본이득은 천문학적 수준으로 늘어난다.
재벌 총수 일가가 물량 몰아주기로 막대한 자본이득을 얻은 것은 비단 현대차그룹만의 일은 아니다. 재벌 계열사가 유망한 사업 기회를 총수 일가가 소유한 회사에 넘겨준 ‘회사 기회 유용’ 행위를 한 16개 그룹의 27개 계열사 사례를 대상으로 경제개혁연대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재벌 총수 일가는 1471억원을 투입해 3조원대의 부를 이룬 것으로 나타났다. 자본이득 상위자 명단에는 현대차 정몽구 회장 부자를 비롯해 이준용 대림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 박문덕 하이트맥주 회장, 최태원 SK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의 이름이 올라 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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