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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배심원제, 정당하지 않다

국민 ‘들러리’ 세우는 한나라당, ‘설계’만 그럴듯하고 ‘적용’ 못하는 민주당…
이름뿐인 시민배심원제
등록 2010-04-02 14:06 수정 2020-05-03 04:26

정당은 집권을 목표로 한다. 선거 승리가 최대 과제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좋은 정책으로, 좋은 인물로 유권자들을 사로잡아야 한다. 선거에 나설 공직 후보자를 추천하는 공천은 그 첫 관문이다. 대표적인 사례 두 가지만 꼽아 봐도 공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탄핵만큼 어려운 ‘후보 뒤집기’

지난 2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민주당의 모의 시민공천배심원 경선대회. 시민공천배심원제 적용 지역이 전체 선거구의 5% 미만으로 줄어들면서 생색내기에 그칠 가능성이 커졌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지난 2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민주당의 모의 시민공천배심원 경선대회. 시민공천배심원제 적용 지역이 전체 선거구의 5% 미만으로 줄어들면서 생색내기에 그칠 가능성이 커졌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세종시 문제로 부각된 한나라당의 친이명박계(친이)-친박근혜계(친박) 갈등의 뿌리는 2004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닿아 있다. 한나라당의 주류가 된 친이계는 당시 “개혁 공천”이라고 주장했지만, 친박계는 “공천 학살”이라고 반발했다. 미래희망연대로 당명을 바꾼 친박연대는 공천 싸움의 후과로 태어났다가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당으로서의 존재감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공천 파동은, 다른 정당에 몸담은 특정 정치인의 성을 딴 정당이 생기는 상식 밖의 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 하나의 사례는 2002년 대통령 선거다. ‘노무현의 기적’의 첫 출발점은 국민참여경선이라는 신상품이었다. 민주당에서 조직 면에서나 여론조사 지지도에서 열세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애초 국민참여경선에 부정적이었다. 선거인단의 확대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국민참여경선은 예상치 못한 정치 개혁 열풍을 만들었다. 3만5천 명을 뽑는 선거인단 공모에 190만 명이 신청했다. 한나라당도 마지못해 국민참여경선 방식을 도입했으나 열기와 역동성 면에서 민주당에 크게 뒤져 주목을 끌지 못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으로 가는 징검다리 성격의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배심원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한나라당은 국민배심원제, 민주당은 시민배심원제라는 이름이다. 공천 과정에 국민과 시민의 뜻을 반영하겠다는 취지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국민·시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려운 구조다. 두 당 모두 ‘신상’을 선전하고 있지만 배심원제의 적용 지역, 배심원의 역할 모두 제한적이다. 공천 과정에 국민과 시민을 들러리로 세우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먼저 한나라당의 국민배심원제를 보자. 전략지역에서만 한다. 한나라당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당헌은 ‘전략지역은 중앙당과 시·도당 공천심사위원회가 후보자를 공모해 심사한 결과, 공모에 신청한 후보자의 선거 경쟁력이 현저히 낮다고 판단한 지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와 대표성을 띠는 인사 30명 이상으로 구성되는 국민배심원들은, 공천심사위원회(공심위)가 결정한 후보자의 적격 여부를 가른다. 아니라고 판단하면 재적 3분의 2 이상의 의결로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이를 현실에 대입해보면 전략지역은 호남 등 한나라당의 당세가 약한 일부 지역으로 제한될 것이며, 국민배심원들은 공심위가 결정한 후보를 100% 적격하다고 심의할 가능성이 크다. 최고위원회에 다시 검토해달라고 요구할 때 필요한 기준, ‘재적의원 3분의 2’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하거나 헌법을 개정할 때 필요한 의석수와 동일하다. 공심위가 지난 3월11일 공천 신청을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성범죄 등 파렴치범 △뇌물 △불법 정치자금 수수 △경선 부정행위 등 ‘4대 범죄‘ 전력자를 공천하더라도 재의까지 가는 길은 멀다. 이런 제도적 허점을 알아서일까. 2008년 김귀환 전 서울시 의장에게 돈봉투를 받아 기소된 전력이 있는 서울시의원 16명이 시의원과 구청장 후보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서울시당은 원칙적으로 공천을 배제하겠다면서도 면접 심사 뒤 일부는 구제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공천은 배제됐는데 그중 일부는 경쟁력이 있다는 이유로 공천을 받을 수도 있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생겼다. 국민배심원들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시민배심원제 적용, 전체 선거구의 5% 미만

민주당의 시민배심원제는, 공천 과정에 끼치는 영향력이라는 면을 놓고 보면 한나라당보다 낫다. 선거구 유권자 가운데 100명 이상으로 구성되는 현지배심원단과 직능·시민·사회단체, 학계 및 전문가 100명이 참여하는 전문배심원단이 직접 공직 후보자를 선출하는 만큼, ‘시민배심원은 곧 민주당의 공천심사위원입니다’라는 선전 문구가 과장은 아니다. 그런데 설계만 그렇게 돼 있다는 게 문제다. 적용 시점이 다가오면서 애초 설계와 많이 달라졌다.

2월 초 민주당이 배포한 ‘민주당 시민공천배심원제’ 홍보 책자를 보면, 시민공천배심원제를 당내 ‘대표적’ 경선 방식으로 채택하고 최고위원회 의결과 당무위원회 인준을 거쳐 확정한다고 돼 있다. 그런데 3월26일 현재 확정된 곳은 광역단체는 광주 1곳, 기초단체는 서울 은평, 경기 화성·오산, 광주 남구, 전북 임실, 충북 음성 등 12곳뿐이다. 광역과 기초단체 선거구는 모두 246곳. 정당의 기득권을 허물어 유능한 정치 신인의 등용문으로 삼겠다던 시민공천배심원제를 적용하는 곳은 전체 선거구의 5%에도 못 미친다. 민주당 지도부와 해당 선거구의 국회의원, 예비후보자들의 생각이 같아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이다. 민주당은 경기 안산과 고양·부천·안양 등 수도권 주요 도시에서 혁신 공천 바람을 일으키려 했으나 지역 국회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혀 6곳으로 축소됐다.

시민공천배심원제 적용 방식도 변질됐다. 애초에는 시민배심원들의 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이었으나 다른 방식과 섞여버렸다. 광주시장의 경우, 시민공천배심원제와 당원 전수 여론조사 결과를 각각 50%씩 반영하기로 했다. 배심원들의 영향력이 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또 시민공천배심원제를 적용하는 지역의 후보자가 많을 경우 공심위가 2~3배수로 후보를 압축하는데 이 과정에서도 잡음이 불거져나오기 시작했다.

주요 정당들이 새로운 공천제도를 도입하려는 데는 정당사적인 맥락이 있다. ‘제왕식 총재’가 실질적인 당의 주인일 때는 후보자를 정해 내리꽂는 방식이었다. 정당 개혁 열풍이 분 뒤에는 국민참여경선 같은 상향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선거에서 ‘조직된 국민’의 영향력이 커지는 부작용이 생겼다. 이런 폐해를 줄이겠다면서 도입한 것이 한나라당의 국민배심원제와 민주당의 시민배심원제인데, 모두 생색내기용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은 당원 투표로

이런 문제는 결국 덩치 큰 정당들이 당원이나 국민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올해 창당 10년을 맞은 민주노동당은 모든 공직 후보자를 당비를 내는 당원들의 투표로 뽑는다. 진보신당도 마찬가지다. 유럽식 정당 운영 방식을 채택한 진보 정당들처럼 당원 중심으로 가거나 미국식 정당 운영 방식을 채택해 시민에게 공직 후보자 선출 권한을 대폭 넘기거나 일정한 방향이 있어야 하는데,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 어떤 정당을 만들고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에 관한 건강한 논의는 실종됐다.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정당 개혁 바람도 잠잠하다. 그러다 보니 신상품이라고 자랑하는 국민·시민배심원제에 대한 ‘주인’들의 관심이 시들할 수밖에 없다. 호랑이를 그린다고 해서 관심 있게 지켜봤는데, 고양이 그림이 돼가고 있으니 이제는 호기심마저 사라진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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