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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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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의 전쟁

심각해지는 ‘일자리 세대 갈등’ 편지글로 풀어보다
등록 2010-03-26 14:46 수정 2020-05-03 04:26

바자로프가 말했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존경하신다면서도 팔짱만 끼고 앉아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사회복지에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파벨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건 전혀 다른 문제네. 어째서 내가 팔짱만 끼고 앉아 있는가. 지금 그것을 자네에게 설명할 이유는 전혀 없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만 귀족주의는 하나의 원리이며, 오늘날 원리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부도덕한 인간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뿐이란 말이네.”

20대와 50대의 고용률 변화

20대와 50대의 고용률 변화

바자로프가 말했다. “그런 논리는 우리에게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우린 그런 것이 없어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파벨이 물었다. “어째서 그런가?”

바자로프가 소리쳤다. “그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당신은 배가 고플 때 한 조각의 빵을 입에 넣는 데 논리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추상론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주인공 바자로프는 반항적 젊은이의 대변자다. 그는 친구의 큰아버지인 파벨이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고 이상주의적 공론만을 일삼고 있다며 격한 논쟁을 벌인다. 파벨은 바자로프의 무례함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소설은 19세기 말 구세대와 신세대 간 단절의 밑바닥에 놓인 사회·정치적 문제, 세계관의 대립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 역시 마찬가지의 갈등을 겪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세대가 일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에게 쓰는 편지와 ‘아버님 전상서’로 아들이 아버지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 간 일자리 다툼 문제를 짚어본다. 이와 함께 ‘우울한 88만원 세대’의 목소리와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를 위한 전문가의 제안도 제시한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IMAGE2%%] ‘베이비붐 세대’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 일자리를 뺏자는 게 아니란다

아들, 보거라.

요즘 사람들과 만나 술 한잔 하다 보면,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가 일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게 됐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단다. 슬픈 일이지. 일자리가 나와 너의 문제라면 나는 너를 위해 언제라도 물러날 수 있어. 하지만 세대 간 일자리라는 게, 불특정 다수의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경쟁이어서 절충점을 찾기 어려운 것 같다.

아들아, 아버지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거라. 나는 “우리 때는 이랬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으련다. 너희 세대에게 유행하는 ‘꼰대’라는 말을 이 아버지는 듣기 싫기 때문이다. 허허.

동생들 학비·생활비 마련 누가 하겠니

1955년생에서 63년생까지의 우리 또래를 흔히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하지. 그중에 58년 개띠는 사회적으로 많은 이슈를 만들어냈지.

그 세대의 아버지들이 은퇴를 하기 시작했어. 나 역시 1년 뒤면 은퇴를 해야 한단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가장의 역할이 여전히 남아 있단다. 이번에 대학에 들어간 네 여동생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네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받쳐줘야 하는 게 부모로서 할 일 같다. 공대에 입학한 네 여동생은 입학금과 등록금이 570만원이나 나왔더구나. 참, 등록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더군.

그런데 얼마 전 노동부에서 우리 같은 세대의 은퇴 연착륙을 돕기 위해 정년 연장을 추진한다는 뉴스를 신문에서 봤다. 참 기뻤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의 “베이비붐 세대 은퇴에 따른 고용불안을 막기 위해선 정년 연장이 불가피하다”는 말에 힘까지 났다. 우리 세대의 은퇴가 사회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막고 경제 전체의 파이를 키워 신규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더라.

아버지 세대의 정년을 연장하더라도 아들 세대의 일자리가 줄지 않는다는 얘기도 나왔더구나. 너도 경제학을 배웠으니 ‘보완재’란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커피와 설탕처럼 한쪽이 좋아지면 다른 쪽도 따라서 좋아지는 것이지. 이철선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이 이런 말을 했더구나. “청년층은 국가기관이나 공기업, 대기업 등을 선호하는 반면 베이비붐 세대는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에 근무하는 비율이 높아 정년 연장에 따른 청년 일자리 잠식 효과는 낮을 것이다.”

오히려 정년을 연장하면 우리 같은 늙은이도 새로운 부가가치를 더 많이 만들어낼 것이라는 통계도 보이더구나. 정년을 연장하는 대신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은 2005년부터 2년 동안 청년 고용이 평균 20.3명 늘어난 반면 도입하지 않은 기업은 같은 기간 17.9명 줄었다고 하더라.

참, 너희 세대는 우리 세대가 너희 세대에게 빚만 지운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잘 안단다. 하지만 말이다. 이건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은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돌아갈 국민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218.6%(2009년)를 기록하고 있단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나랏빚이 될 수 있겠지만, 교육·사회기반시설(SOC)과 같은 자본재에 투자한다면 너희 세대가 이를 생산적 활동에 활용해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단다.

일본도 베이비붐 세대 은퇴 뒤 불황 왔단다

일본에는 ‘단카이 세대’란 게 있지. 1947년에서 49년 사이에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를 말한다. 그런데 1990년대의 버블 붕괴와 장기 침체는 단카이 세대가 은퇴 시점에 임박한 시점에 일어났지. 그들이 은퇴를 앞두고 구매력이 급격히 떨어져 집값이 하락한 게 원인이라더라.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같은 세대가 갑자기 일자리를 잃으면 일본처럼 갑작스런 버블 붕괴가 닥쳐올지 몰라.

사실 지금 논란이 되는 일자리 문제는 아주 작은 것에 그칠지도 몰라. 내가 보기엔 말이다. 지금의 일자리 논란은 조삼모사와 같은 거다. 우리나라는 2026년에 65살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다고 하더라. 그때 가면 청년들이 부모 세대와 일자리를 놓고 다투기는커녕 제발 더 오래도록 일해달라고 빌어야 할 상황이 될지 모른단다.

내 얘기만 한 것 같구나. 요즘 네가 취업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단다. 너무 기죽지 말고, 집에서도 당당하게 있어라. 흔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인생이란 마라톤이라고 하지 않더냐. 2010년 3월 어느 날, 아버지가


‘88만원 세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임금피크제 기업들 채용 줄이던데요

아버지께.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편지를 보내실 때 ‘아버님 전상서’라고 썼다고 하셨죠. 그런데 전 너무 촌스럽다고 생각해서 그런 표현은 쓰지 않으려고 해요.^^ 그리고 나이 드신 분들이 우리 같은 젊은 애들한테 “싸가지가 없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알아요. 저도 그렇게 비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아버지가 친구분들과 약주 드시며 청년실업에 대해 말씀하시듯, 우리 친구들도 아버지들의 퇴직에 대해 자주 얘기해요. 한 친구는 아버지가 회사에서 퇴직한 얘기를 하며 울더군요. 젊음을 바쳐 일한 회사에서 퇴직한 아버지의 어깨가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면서.

퇴직한 아버지 뒷모습, 저도 마음 아프죠

그런데 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힘든 것만큼 우리 세대도 일자리 때문에 참 힘들어요. ‘88만원 세대’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아시겠지요. 1997년 외환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연령층은 아버지 세대인 50대였지만, 지난해 금융위기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연령층은 우리 세대인 20∼30대라는 뉴스가 얼마 전 있었잖아요.

아버지는 일자리가 ‘보완재’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대체재’라고 보고 있어요. 쇠고기와 돼지고기처럼 한쪽이 좋아지면 다른 쪽은 나빠지는 거죠. 태원유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2003년 대비 2008년 청년 임금근로자 수는 8.9% 감소했지만 같은 기간 중고령(40~50대) 임금근로자 수는 29.5% 증가했다”고 했어요. 인구증가율을 감안하더라도 중고령자가 청년층 취업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라네요.

그런데 저희는 더 화나는 게 있어요. 우리 세대가 제일 많이 가고 싶어하는 직장인 공기업은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정책으로 채용을 줄였어요. 게다가 공기업들이 임금피크제를 전제로 정년을 58살에서 60살로 연장하려 해요. 최근 정년 연장을 결정한 한국전력만 해도 공채 인원이 지난 2007년 600명에서 2008년 39명으로 줄었고, 이번 결정으로 앞으로 최소한 3~4년 동안은 신규 채용이 훨씬 더 줄어들 거라네요.

그나마 다행인 건,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임금피크제를 수단으로 한 일률적인 정년 연장은 청년 실업난을 가중시키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갉아먹는다”고 말했다고 해요. 마치 노동부가 아버지 세대의 생각을, 기획재정부가 우리 세대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저 역시 우울하네요.

세금 문제에 대해선 제가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심각하다는 건 알아요. 국가 채무가 1998년 80조원에서 지난해 366조원으로 늘어났다고 해요. 올해는 사상 처음 400조원대에 진입한대요. GDP에서 차지하는 채무 비중도 11.9%에서 31.5%로 늘어났데요. 이같은 빚은 고스란히 우리 세대의 몫이겠지요. 앞으로 복지 비용은 더 들어갈 거고, 통일이 된다면 그 비용까지 들어가겠지요. 우리 세대는 정말 빚더미 위에서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한 표가 무서운 정치인들이 조세 저항 때문에 증세하지 못하고 빚만 지면서 우리 세대에 넘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시기 놓치면 평생 실업자로 살게 될 텐데

일본의 단카이 세대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 같아요. 그들이 일본 사회에서 중심 역할을 하기 시작한 때가 40대였는데, 그때 버블이 일어났어요. 그 뒤 일본은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었는데 단카이 세대의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유지됐거든요. 오히려 젊은 층의 취업 기회가 줄어드는 결과가 일어났어요.

우리 세대 역시 얼마 안 있으면 아버지 세대가 되는 걸 알아요. 정년 연장에 무조건 반대만 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하지만 아버지, 젊었을 때 한번 취업 시기를 놓치면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워 평생 실업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편지를 쓰다 보니 제가 너무 흥분한 것 같아요. 버릇없었다면 용서해주세요. 참 아버지, 요즘 너무 힘이 없으신 것 같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2010년 3월 어느 흐린 날, 아버지를 닮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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