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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 정치인의 제주도 ‘정의 투쟁’

우근민, 민주당 경선 자격 결국 박탈에 “공천장 줘도 찢겠다” 무소속 출마 선언
등록 2010-03-25 16:26 수정 2020-05-03 04:26

“민주당 중앙당 지도부가 다급한 생각에 마음을 바꾸어 저에게 공천장을 준다고 해도 찢어버리겠습니다. 민주당을 사랑해왔고 지금도 사랑하지만, 현재 지도부는 아닙니다. 신의와 정치 도의를 저버린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빚는지, 저 우근민 반드시 보여줄 것입니다.”
결기와 독기가 뚝뚝 묻어나는 기자회견문의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언급된 우근민 전 제주지사였다. ‘성희롱 사건’으로 민주당 공천심사위원회로부터 경선 참여 자격을 박탈당한 우 전 지사는 3월19일 오전 민주당 제주도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제주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공천심사위에서 경선 참여 자격을 박탈당한 우근민 전 제주지사가 지난 3월19일 민주당 제주도당사에서 탈당 기자회견을 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

민주당 공천심사위에서 경선 참여 자격을 박탈당한 우근민 전 제주지사가 지난 3월19일 민주당 제주도당사에서 탈당 기자회견을 하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

출마 의사를 밝힌 이날 그는 민주당을 겨냥해 “최소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해주고 어려움을 함께 해주는 것이 인간사의 도리이고, 그것이 생각과 뜻을 함께하는 정치결사체인데, 중앙당 지도부는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았다”며 “제주가 정의가 살아 숨쉬고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고 신의가 흘러넘치는 동네임을 반드시 증명해내겠다”고 다짐했다.

대법원 성희롱 인정에도 지지세 견고

기자회견 내내 ‘정의’와 ‘신의’, 그리고 ‘도의’를 강조한 우 전 지사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그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성희롱 사건의 내용은 뭘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사이트에 접속해 우 전 지사 사건에 관한 판결문(2005두13414)을 찾아보면 다 나와 있다. 우 전 지사는 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의 성희롱 결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대법원 판결문은 우 전 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는 결정과 함께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핵심은 우 전 지사의 성희롱 사실을 대법원도 인정했다는 부분이다.

사건은 2002년 1월15일 오후 3시10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주도지사 집무실에서 성희롱 피해자와 면담을 하던 우 전 지사가 피해자 오른쪽 옆으로 다가가 왼손으로는 목 뒷부분을, 오른손으로는 어깨를 잡은 뒤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피해자의 왼쪽 가슴을 만졌다. 당연히 피해자는 우 전 지사의 오른손을 잡아 뿌리쳤다.

우 전 지사는 “두 손을 피해자의 양 어깨에 얹고 가볍게 누른 정도의 행동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여러 증거를 종합해 “이 사건의 쟁점은 원고(우 전 지사)가 피해자의 가슴을 만졌는지 여부이고, 앞서 본 바와 같이 그러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우 전 지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우 전 지사의 행위를 명쾌하게 ‘성희롱’으로 본 것이다.

이런데도 우 전 지사는 자신이 성추행범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심지어 3월19일 무소속 출마 기자회견 자리에서는 자신을 비판하는 행위를 ‘마녀사냥식 여론몰이’로 규정하기도 했다. 문제는 대법원에서도 성희롱 전력을 인정했지만, 제주도에서 우 전 지사의 파괴력이 여전히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 전 지사가 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하자 민주당 제주도당 소속 일부 대의원이 그를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야권 연대 성사 여부가 변수

일단 우 전 지사 영입에 항의하며 단식농성을 불사했던 개혁 성향 고희범 예비후보가 있지만 남은 기간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남은 변수 가운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야권 연대다. 제주도지사 선거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후보 이외에도 오옥만 국민참여당 예비후보, 현애자 민주노동당 예비후보가 뛰고 있다. 이들이 ‘반한나라당’ ‘개혁세력’ 연대를 성사시킬 수 있어야 성희롱 사건을 뚫고 기어이 등장한 ‘우근민 변수’와 맞붙어볼 만하다는 지적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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