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한 선택인가, 자신감 결여로 인한 판단 실수인가?
문화방송 노조가 3월4일 김재철 사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낙하산 인사’라며 출근 저지 투쟁에 나선 지 사흘 만이다. 물론 조건을 달았다. 앞서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가 임명을 강행한 황희만 보도본부장과 윤혁 제작본부장을 김 사장이 사퇴시킨다는 것이다.
‘공정성이라도 지키자’는 내부 분위기
비록 조건을 달았다고는 하지만, “김우룡 이사장 체제의 방문진이 선임한 사장은 누가 오든 낙하산 사장”이라던 문화방송 노조는 별다른 사정 변동 없이 결국 낙하산을 인정한 꼴이 됐다. 스스로의 깃발을 꺾은 셈이다. 노조의 신뢰에 가장 큰 흠결을 남기는 대목이다. 그것도 조합원에게서 총파업 동의서까지 받아놓은 상황에서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김 사장 출근 사흘 만에, 외부 연대 세력과는 별다른 논의도 없이 전격적으로 결정한 탓에 그 충격은 작지 않다.
문화방송 노조의 이런 결정은 ‘명분을 버리는 대신 실리를 챙기자’는 쪽으로 내부 의견을 정리한 데 따른 것이다. 김 사장을 사퇴시키더라도 현재의 방문진이 또 내려보낼 사장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이후 싸움의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출근 시도 때마다 “방송 공정성을 지키겠다”“정권과 싸우겠다”고 말하는 김 사장을 사장으로서 인정하되 앞으로 이어질 사내 인사와 보도·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투쟁을 이어가는 게 현실적이라고 본 것이다. 문화방송의 한 PD는 “노조가 정권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기면 좋겠지만 이기리라는 전망을 가질 수 없고, 질 경우 프로그램을 지키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라며 “투쟁 초기부터 이미 두 본부장 임명을 무효화하는 선에서 김 사장을 인정하는 카드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노선으로 제시된 바 있다”고 전했다.
문화방송 내부에서는 이명박 정부 들어 〈PD수첩〉과 미디어법 사태 등 잇따른 투쟁으로 ‘조직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잖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내부 투쟁 동력이 이미 소진됐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 탓인지 문화방송 내부에서는 노조의 이번 선택을 수긍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반면, 일부에서는 노조가 깃발을 너무 일찍 내린 건 경솔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한 기자는 “노조 위원장이나 지도부가 경찰에 잡혀가는 과정에서 투쟁의 동력을 잃는 것보다는 사장에 대한 견제력을 가진 상태에서 대화와 투쟁을 병행하겠다는 전략인 건 알겠다”면서도 “노조가 너무 갑자기 접어버리는 식이 되어 황당하다”고 말했다.
시민사회 및 언론운동 진영은 호되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반응이다. 비록 ‘낙하산 사장’을 몰아내는 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며 싸울 때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호 언론연대 대표는 3월5일 “관제 사장을 인정하는 순간 투쟁 목표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시민사회는 김재철 사장 퇴진 운동을 계속 전개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다”고 밝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문화방송 노조와 따로 가겠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문화방송 노조도 쉽게만 갈 수는 없을 것이고, 외부의 압력을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사장 행보도 평탄치 않아그러다 보니 앞으로 외부 세력이 문화방송 노조와 허심탄회하게 연대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앞으로 김재철 사장 체제가 본격 가동되는 단계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고 노조가 다시 회사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바깥의 우호적인 세력들에 손을 내밀어야 할 시기가 올 경우, 이번에 ‘노조에 당했다’고 생각하는 외부 세력이 과연 그 손을 반갑게 잡아줄지 불투명하다.
논란이 불거지자 이근행 위원장은 3월5일 조합원에게 띄우는 글에서 “저는 가장 낮은 수준의 목표를 얻고서 ‘낙하산 김재철 사장을 인정’한 셈”이라며 “과오라면 바로 잡아야 하고,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져야 하는 것”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그는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산화(散華)로써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한다”며 잠정 합의에 이르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당장 주목되는 건 김재철 사장의 행보다. 김 사장은 두 본부장을 사퇴시킨다는 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출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실제 3월5일 서울 여의도 본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선임한 방문진이 자신보다 앞서 선임한 두 본부장을 자리에서 밀어내야 한다. 애초 노조가 낙하산 사장 철회를 위해 모든 것을 건다고 했지만, 이제는 김 사장이 문화방송 입성을 위해 모든 것을 건 셈이 됐다.
사정은 여의치 않다. 방문진 여당 쪽 이사들은 황희만 보도본부장을 본사 특임 이사로 보직 변경하는 것은 몰라도 윤혁 제작본부장을 자회사로 내려보내는 데에는 반발하고 있다. 이 경우 엄기영 사장을 쫓아내는 무리수까지 둬가면서 내린 자신들의 결정을 뒤집는 셈인데, 그에 따른 정치적 부담이 만만찮다. 그렇다고 김 사장이 ‘문화방송 안착’을 위한 승부수로 띄운 카드를 거부했다가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방문진 책임론이 불거질 수도 있다. 두 본부장 처리 문제가 방문진에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근거다.
명분을 버리는 위험을 무릅쓴 노조로서는 앞으로 보도와 프로그램의 공정성 확보라는 실리를 얼마나 건져낼지가 관건이다. 이근행 위원장은 “김재철 사장 체제가 가동된다면, 뉴스와 프로그램이 제작되는 과정 등을 보고 구체적 싸움인 공정방송 투쟁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미 기싸움에서 한풀 꺾인 노조가 내부적인 동력을 모아나가는 게 순탄치 않을 수 있다. 특히 김 사장은 ‘PD수첩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못박아놓은 상태다. 김 사장은 또 단체협약을 개정하고 현재 19개인 지방 계열사를 광역화해 통폐합하겠다는 뜻을 방문진 면접 과정에서 밝힌 바 있어 노조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에 앞서 이뤄질 본부장급 후임 인사는 김 사장의 공정방송에 대한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한편에서는 이번에 꺾인 노조 깃발 너머의 것을 보라는 주문도 나온다. 노조 사무국장 시절이던 1992년 문화방송 총파업 때 해고당한 경험이 있는 김평호 단국대 교수는 “문화방송 노조는 ‘싸움에 임하는 태도가 굳지 못하다’거나 ‘명분과 원칙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노조의 타협적인 태도는 우리 사회가 가진 민주주의와 사회개혁의 역량이 허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봐야 한다. 대한민국의 보수 권력 체제가 그만큼 강하고 또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는 불행한 조짐이 아닌가 싶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보수의 강고함 보이는 한 사례”이명박 정부가 YTN과 한국방송에 이어 ‘방송사 접수’를 향한 마지막 스텝을 한 번 더 밟은 상황에서 명분을 내려놓은 문화방송 노조가 후속 인사와 보도 등에서 공영방송의 가치를 살림으로써 명실상부한 실리를 챙길 수 있을지 주목된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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