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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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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도 넓으셔라! 국가정치정보수집원

광주에서 풍자작품 철거 개입 이어 조계사에서도 행사 중단 압력…
‘MB 측근’ 원장은 말로만 “못하게 하는데”
등록 2010-02-11 21:07 수정 2020-05-03 04:26

“정치 정보 수집이 불가피하다.” 지난해 2월11일 원세훈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정치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정치 사찰이나 정치 관여와 다르다면서 국내 정치 정보 수집이 불가피하다고 공언했다. 원장 후보자의 이런 인식은 국정원이 정보 수집을 명분으로 민간 분야에 대해 다양한 간섭을 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일었으나 이명박 대통령은 그를 원장으로 임명했다.

국내 정치권과 각종 단체 등에 관한 국가정보원의 일상적 정보 수집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원세훈(가운데) 국정원장이 지난해 10월 말 국회 국정감사에 앞서 선서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국내 정치권과 각종 단체 등에 관한 국가정보원의 일상적 정보 수집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원세훈(가운데) 국정원장이 지난해 10월 말 국회 국정감사에 앞서 선서를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청문회 때부터 “국내 정치정보 수집 불가피”

그 뒤 국정원은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여러 사건을 통해 보여줬다. 지난해 12월에는 광주 5·18 기념문화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풍자한 작품에 대한 의견을 광주시에 물어 작품이 철거되게 했고(문제가 되자 작품은 하루 만에 다시 내걸렸다),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는 현지 주민을 회유·설득해 국내 정치 문제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리고 이번엔 서울 조계사에서 열릴 예정이던 시민단체의 행사를 취소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정원 직원이 조계사 이아무개 과장에게 전화를 걸어와 ‘진실을 알리는 시민’(진알시) 등이 지난 1월31일부터 조계사 경내에서 열려던 ‘바보들 사랑을 쌓다’ 행사에 대해 “반정부적인 정치 집회”라며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 행사는 라면상자를 이용해 첨성대 모양의 조형물을 쌓은 뒤 라면을 불우이웃에게 나눠주는 내용으로, 이 과정에서 ‘4대강 사업 추진 중단’과 ‘한국방송 수신료 거부’ 등의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었다. 결국 이 행사는 조계사에서 열리지 못했다.

이렇게 쓸데없이 넓은 국정원의 오지랖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이런 사태는 국정원의 일상적 국내 정보 수집 활동을 허용하는 한 계속 불거질 수밖에 없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정원은 국내 종교단체는 물론 국회, 언론사 등의 정보를 꾸준히 수집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보 수집’과 ‘정치 사찰’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조계사의 경우도 담당 국정원 직원이 지속적으로 출입하며 정보를 수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조계종 총무원의 한 관계자는 “국정원 직원과 종로경찰서 정보과 정보관 등이 너무 자유롭게 출입해, (지난해 12월 자승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뒤) 우리 쪽에서 자제하라고 경고했다”며 “오려면 미리 전화를 하고 약속을 잡은 뒤 오라고 했다”고 전했다. 제집 드나들듯 출입하며 관련 정보 수집 활동을 하려고 해 제어를 했다는 얘기다. 이 관계자는 “이번에 사고를 친 국정원의 권아무개씨가 불교계를 잘 모르기도 하고 종가를 쉬운 상대로 생각하다 이런 일이 터진 게 아닌가 싶다”고 해석했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국정원 담당 직원 열댓 명가량이 여전히 국회에 상주하면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국정원이 소속된 국회 정보위원회의 업무 협조를 위해 국정원 소속 국·과장 직급의 직원이 국회에 파견된 것과는 별도로 일반 직원이 나와 있는 것이다. 정보위 민주당 간사를 맡고 있는 박영선 의원실의 안필용 보좌관은 “이른바 아이오(IO)라고 부르는 정보 수집 인원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 예전보다 많아진 것 같다”며 “정보 수집 차원에서 나와 있다지만, 정치권에 대한 사찰로 볼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안 보좌관은 “이들이 삐끗하면 사찰로 찍히니까 (행동을) 굉장히 조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정원 직원은 평소 의원실 관계자들을 만나 현안에 대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의 이런 일상적 국내 정보 수집 활동은 늘 사찰 논란으로 연결되기 쉬워 이전 정부부터 끊임없이 금지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던 2002년 11월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 기능을 없애고 ‘해외정보처’를 신설하겠다고 공약했으나 공염불에 그쳤다. 2006년 4월에도 국회 정보위 산하에 국정원 개혁소위원회가 만들어져 △국정원의 수사권 폐지 △정치 활동 관여를 위한 정보 수집 금지 △다른 행정부처 정책에 관여하는 통로인 정보·보안 업무의 기획·조정 권한 축소 등의 안을 놓고 논의했으나 이 또한 신통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개혁” 목소리 높이던 한나라당 태도 돌변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을 지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는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도 국정원 개혁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았고, 노 전 대통령의 경우는 대통령 자신이 국정원을 자신의 도구로 쓰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제도 개혁 의지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도 야당 시절에는 제법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2005년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미림팀’을 만들어 민간인에 대한 광범위한 불법 도청을 했다는 폭로가 터져나오자, 맹형규 당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은 “국정원의 국내 정치 사찰 기능을 없애고, 해외 정보 및 안보 관련 정보 수집에 집중하도록 국정원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으나 역시 말에 그쳤다.

되레 새 정부 들어 한나라당은 국정원의 국내 정보 수집 활동을 합법화하는 방향의 국정원법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국가 안전보장 및 국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 정책의 수립에 필요한 정보’를 국정원의 공식적인 활동 영역에 넣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국정원이 현재 벌이는 일상적 정보 수집 활동의 법적 근거가 미약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가 지난 2월3일 원세훈 원장과 함께 이번에 물의를 빚은 국정원 직원 권아무개씨를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한 근거이기도 하다. 국정원법상 국정원이 수집할 수 있는 국내 보안 정보는 ‘대공, 대정부 전복, 방첩, 대테러 및 국제 범죄조직’과 관련한 것으로 한정돼 있다. 조계사에서 열리는 시민 행사는 이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또한 직권남용을 금지하는 국정원법 11조(다른 기관·단체 또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 행사를 방해해선 안된다)를 위반했다는 게 참여연대 등의 주장이다.

“정권의 필요와 여권 내부 분위기 때문에”

예전 정권에서는 드물던 국정원 직원들의 민간 개입이 최근 두드러지는 데는 ‘이명박 대통령의 심복’으로 불리는 원세훈 원장이 자리잡고 있다. 이명박 서울시장 시절 부시장을 지내고, 새 정부 첫 행정안전부 장관 등을 지내며 이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읽고 충성을 다한 원 원장이 부임하면서 직원들도 조금씩 ‘오버’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한홍구 교수는 문제가 계속 불거지는 배경으로 “정권의 필요와 여권 내부의 분위기도 있는데다 대통령의 측근을 원장으로 보낸 탓이 크다”고 지적했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원세훈 원장은 국정감사 때도 그렇고 (국회 정보위에) 올 때마다 자신이 계속 직원들에게 못하게 한다고 하는데도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정원의 쓸데없이 넓은 오지랖이 언제 또 불거질지, 국민은 걱정 어린 눈길로 지켜봐야 한다는 얘기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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