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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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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처럼 밝은 밤, 친구들 모두 불타 죽었네


강제징용으로 도쿄 제강소에서 일하다 대공습 때 구사일생 생존한 북한 주민 고 송정호씨의 증언
등록 2010-01-28 18:57 수정 2020-05-03 04:25
올해 3월10일은 도쿄 대공습이 65해째를 맞는 날이다. 그동안 도쿄 대공습의 조선인 희생자 문제를 조사해온 ‘도쿄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이하 조사단)은 오는 2월27일 도쿄에서 남북과 일본의 학자들을 불러모아 ‘도쿄 대공습 65돌 조선인 희생자 추도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다. 조사단은 이에 앞서 이 심포지엄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북한 출신 공습 피해자 고 송정호(1930~2009)씨의 증언을 에 보내왔다. 송씨는 1930년 5월12일 출생으로 평안북도 강계군 입관면 운송동에서 태어났고, 이 증언을 마친 뒤 지난해 9월 뇌출혈로 사망했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정혜경 조사 2과장은 “도쿄 대공습 피해자는 대부분 공습 당시 사망해 생존자 증언이 공개되는 것은 극히 드문 예”라고 말했다. 편집자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지금까지 강제징용 피해의 실상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 때 희생된 조선인의 현황도 이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대공습 당시의 항공사진. 한겨레 자료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지금까지 강제징용 피해의 실상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 때 희생된 조선인의 현황도 이제야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대공습 당시의 항공사진. 한겨레 자료

나는 2008년 5월25일 에 실린 ‘일본 도쿄에 끌려가 미군의 공습에 의하여 희생된 조선인 강제연행 희생자 문제와 관련한 조사보고서’를 읽고 내가 실제로 체험한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해당 기관에 알려줄 생각을 했다.

나는 1943년 10월 일본 도쿄도 조토구에 있는 특수강 주식회사에 끝려가 1945년 5월까지 있었다. 1945년 3월10일 밤 12시에 미군의 대형 폭격기 B29에 의해 소이탄과 폭탄이 투하될 당시를 직접 체험했다.

물선 나라, 그래도 우월감과 호기심으로

우리 아버지 송계삼은 지줏집 땅을 부쳐먹으며 소작 일을 했는데 대식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별의별 고생을 다 하다가 내가 9살 때 세상을 떠났다. 우리 형제는 8남매인데 누이 4명과 형 3명이 있었고, 내가 막내였다. 부모를 닮아서 체격들이 컸다.

나의 형과 누이들은 오래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나도 어느덧 80 고령에 이르렀다. 우리 집안에서 막내인 나만은 어떻게든 공부를 시켜보자고 마음먹고 모든 힘을 다해 내가 학교에 남부럽지 않게 다니도록 해준 덕분에 나는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그리 불편함을 모르고 국민학교를 졸업할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형님, 누나들이 바라는 대로 꼭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했으며 우수한 학업성적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 그해(1944)에 면에서 국민학교 졸업생 중에서 학업성적이 좋고 체격도 튼튼한 학생을 2명 뽑았는데 바로 내가 뽑혔다. 면에서는 ‘양성생’이라고 하면서 일본에 보내 기술도 배우고 공부도 하여 돈도 많이 벌어올 수 있다고 했다.

부모·형제와 헤어져 낯설고 물선 남의 나라에 가는 것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울 수 있다는 기대감과, 더욱이 학교에서 ‘뽑혀서’ 간다는 우월감으로 인해 은근히 호기심도 났다.

강계군에 가니 나처럼 뽑혀온 사람들이 40여 명이 되었는데 모두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실제로 그들의 평균 나이는 19~20살이었다. 나는 14살이었는데 키가 크다고 하면서 2살을 늘려도 될 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생각 없이 그대로 했다. 내 이름도 일본식 이름으로 ‘모리토쿠 마사히로’라고 했으며, 같은 학교에서 함께 간 동무 이름은 ‘다마카와 도쿠수이’라고 불렀다. 그의 조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를 인솔해간 것은 면서기와 재향군인 말고도 1명이 더 있었는데 후에야 그가 일본에서부터 우리를 데려가려고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계군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 부산의 한 숙소에서 인원 점검을 할 때 내가 제때 대답을 못하자 우리를 인솔해가던 자는 “이 자식, 제 이름도 모르는가”라며 엉덩이를 걷어찼다.

갑작스레 “이제부터는 어림없다” 으름장
증언을 남긴 송정호씨.

증언을 남긴 송정호씨.

그날 저녁 부산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인솔자 놈이 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일절 자유행동은 없다. 부산까지는 너희들이 집으로 가겠다고 할까봐 어루만졌지만 이제부터는 어림없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8시간 만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한 뒤 우리가 입고 간 옷들을 모두 벗기고 단체 작업복을 갈아입혔다.

10월10일 아침에 기차를 타고 48시간 동안 달려 10월12일 도쿄에 도착해 ‘규조’(일왕이 있는 집 궁성) 앞에 가서 일을 잘하겠다는 서약식을 하고 목적지라고 하는 조토구의 제강소에 도착했다. 간 곳은 도쿄도 조토구 미나미스나마치 6-73번지에 있는 ‘도쿄 특수강관 주식회사 스나마치제강소’였다.

제강소의 기본 임무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필요한 철강재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제강소에는 5t 전기로가 3기, 7t반짜리가 1기 등 모두 4기가 있었고 이틀에 3회씩 출강했다. 생산된 철강재는 기차로 실어갔고 오물과 광재폐기물 등은 제강소 옆에 흐르는 운하를 통해 기관선에 실어 먼 바다로 내갔다.

종업원은 3천여 명이고 그중에서 조선 사람이 500명가량 있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온 남반부 지역 출신 사람들과 평안남북도에서 온 북반부 지역 사람들이었다. 지방별 특성과 개별적으로 성격들이 달라 어떤 때는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친하게 지냈다. 조선 청년들은 하루 12~14시간, 어떤 날에는 16~18시간 동안 밤낮으로 내몰릴 때가 많았다. 왜놈들은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무슨 기술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오물과 광재를 실어내는 단순하면서도 힘에 부치는 작업만 시켰다. 작업장에서는 늘 감독의 감시하에 일했으며 조금만 일손을 늦추어도 무자비한 욕설과 매질이 가해졌다. 고향에서 떠날 때의 말과는 달리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2년 동안 오물과 광재를 싣고 부리는 작업만 했다.

숙소는 2층짜리 목조건물이었다. 기숙사에는 한 방에 10명씩 배치되고 하루 작업이 끝나서 숙소에 돌아오면 ‘가미다나’(집안에 신위를 모셔둔 선반) 앞에 꿇어앉아 “오늘 작업량은 얼마나 했는가, 과제를 다 했는가, 출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켰는가” 등 자기반성을 하게 돼 있었다. 반성을 잘 하지 않으면 저녁밥을 주지 않았다.

밥은 납작 보리밥이나 콩 또래밥, 대용식품인 ‘도코로텡’(우뭇가사리로 만든 묵)을 120~150g 정도 주었는데 배가 고파서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 또다시 벌로 가미다나 앞에 꿇어앉히고 반성을 시켰으며 심한 경우에는 매질까지 하기 때문에 무조건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1945년 3월10일 미군 비행기 수백 대(당시 신문에는 325대라고 했다 함)가 도쿄 중심 구역을 맹폭격했다. 도쿄와 그 주변에 고사포들이 미군 폭격기에 대고 올려쏘기는 했지만 잘 맞지 않았다. 주로 소이탄과 폭탄을 퍼부었는데 목조건물이 많은 것을 타산한 것 같았다. 게다가 바람을 타고 불길이 더욱 세게 번졌는데 그 불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타죽었다. 그전에 왜놈들은 “B29는 사이판에서부터 2시간 동안 날아와 2시간 폭격하고 2시간 동안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 그 시간에 방공호에만 들어가 있으면 살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길과 숨 막히는 연기 속에서 방공호도 별로 맥을 쓰지 못했다.

같이 간 40명은 온데간데없어

이날에 있은 야간 폭격과 소이탄에 의한 화염으로 작업교대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조선 사람들은 거의 다 불타 죽고 질식해 죽었으며, 공장에서 작업하던 사람들도 폭격 속에 불타 죽었다. 주변에 살던 일본인 노동자와 그 가족도 많이 죽었다.

그날 나는 늘 함께 지낸 가까운 동무인 리기원(기무라 나가오·당시 19살)과 야간 교대번이어서 제강소에 나와 여느 때와 같이 슬라크(슬래그·광석에서 금속을 빼내고 남은 찌꺼기)를 운반선에 싣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방공호로 갈 사이가 없어서 운하에 뛰어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물 밖에 머리를 내밀고 둘러보니 공장과 그 주변은 온통 불바다였다. 그 불바다 속에서 처참한 비명 소리와 무엇인지 쾅쾅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이었지만 화염으로 인해 대낮같이 환했다. 우리처럼 운하에 뛰어든 사람들은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날의 폭격 속에서 제강소 노동자 가운데 살아난 사람은 약 1천 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기원과 나만이지, 같이 간 40명은 온데간데없었다. 모두 불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한다.

대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쿄시 모습. 당시 1만 명가량의 조선인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

대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쿄시 모습. 당시 1만 명가량의 조선인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

다음날부터 피해 복구를 한다고 했지만 복구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건빵으로 끼니를 에우면서 제강소 복구 작업에 내몰렸다. 나는 리기원과 함께 제강소에서 빠져나와 도쿄에서 400리 정도 떨어진 지바현에 갔다. 그때 전라도 출신의 60대 조선 사람 밑에서 밥만 먹여주고 재워만 주면 된다는 조건으로 일했다. 무츠 비행장 건설장에서 토목공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8·15를 맞이했다. 그 사람의 이름은 김홍량이라고 기억된다. 기업주까지 셋이서 해방 뒤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10월 중순 시모노세키에 갔는데 큰 배가 조선으로 가는 것은 없었다. 10일 동안 수소문해 겨우 50명 정도 탈 수 있는 소형 기관선(밀선)을 타고 3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갈 때는 8시간 걸렸는데, 이 소형 기관선은 70시간이나 달려서 밤 9시경에 부산에 도착했다.

내 나이 80에 이르도록 사죄·보상 못 받아

부산에서 조국 동포들이 우리를 얼싸안으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라고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아마도 자기 자식과 남편을 기다리는 혈육의 심정이리라. 그들의 따뜻한 환영과 환대를 받았고 다음날 기차로 개성에 가 걸어서 38선을 넘어 금천에 갔으며 만포행 기차를 타고 고향인 입관에 도착했다.

내 나이 80에 이르고 있지만 왜놈들과 결판을 내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 수도 없다. 아직 부모의 품속에서 어리광이나 부리고 한창 배워야 할 뼈도 굳지 않은 소년들을 ‘기술전습’이요, ‘양성’이요, 돈벌이요 하면서 구슬려 혈육들의 품속에서 떼어내 값눅은 노동력으로 끌어가 노예처럼 혹사했으며, 갖은 민족적 멸시와 학대를 강요한 일제의 짐승 같은 만행을 천추만대를 두고서도 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패망 뒤 60여 년이 흐르는 오늘까지도 조선 사람들의 희생과 피해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회피하는 일본 당국과 일본 기업들의 파렴치한 처사를 강력히 단죄 규탄한다.

우리 전체 강제연행 피해자들은 일본의 역사적인 죄악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며, 대를 이어서라도 이 원한과 피의 대가를 기어이 결산할 것이다.

2008년 10월21일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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