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수정안 발표로 세종시의 미래가 불투명해진 11일 오전, 충남 연기군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첫마을 아파트’ 건설 현장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그 뒤로는 속도전·여론전이다. 세종시가 행정중심복합도시에서 교육과학중심경제도시로 바뀌어도 되는지, 그 과정과 절차는 어찌해야 하는지 차분하게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정부는 연일 밀어붙이고 있다. 이해당사자인 국민은 고사하고 정치권, 심지어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설득과 동의를 구하는 정치는 실종됐다.
국무총리실이 어느 홍보기획사에 의뢰한 ‘세종시 현안 홍보전략’( 1월14일치 참조)은 ‘P 팩터’(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뜻함)에 따라 전망이 엇갈린다고 분석했다. 수정안대로 세종시가 순항할 수도 있지만, 박 전 대표 쪽이 강하게 반대하면 세종시가 표류하고 결국 이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9부2처2청을 포함한 행정기관 36곳의 이전을 백지화하는 ‘세종시 발전방안’을 시행하려면 새로 법을 제정하거나 행정도시특별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박 전 대표 쪽의 지지·지원 없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은 2012년 추석 귀향길에 오른 30대 후반의 한 공기업 직원의 눈으로, 세종시 논란 10년을 돌아봤다. 일종의 가상 콩트다. 콩트인 만큼 일부 현실과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편집자
귀성길
집을 나선 지 2시간이 넘었다. 추석 연휴 전날 휴가를 냈다. 새벽에 나섰는데도 도로는 주차장이다. 아직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전까지 10시간이라니 해남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곯아떨어졌다. 아내도 졸고 있다. 눈꺼풀이 무겁다. 고향 가는 길이 점점 어려워진다.
고향집 자주 갈 수 있겠다 싶었는데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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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 전이다. 입사하던 해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국토 균형발전을 위해 행정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처음엔 충청 표를 겨냥한 공약(空約)이겠거니 했다.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난 반대쪽 논리에 구미가 당겼다. 수도권 공동화, 집값 폭락이라니. 집값이 떨어지면 전셋값도 떨어지겠다, 어쩌면 내 집 마련 기회가 빨리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간혹 주말에 서울 바깥으로 나들이를 갈 때마다 돌아올 걱정이 앞서지 않았던가.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방향으로 간다면 나라도 좋고 나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대선이 끝난 뒤 찬반 논란은 더 거세졌다. 한나라당이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우여곡절 끝에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예정지인 충남 연기·공주 땅도 사들여 정말 하나 보다 했다. 그런데 그 사단이 벌어졌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렸고 모든 게 정지했다. ‘관습헌법’이라는 유행어가 생겼다. 정부와 국회는 일부 행정 부처만 옮기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이름은 행정수도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 줄여서 ‘행복도시’로 불렀다.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은, 2007년 공사를 시작해 올해부터 입주를 시작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세종시는 썰렁하다.
처음엔 어찌되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행정도시와 한 묶음인 혁신도시 계획이 나오면서 내 문제가 됐다. 국토의 중심인 세종시로 행정부처를 옮기면서 정부 산하기관·공기업도 세종시에서 1시간 정도 거리의 지방으로 본사를 옮긴다고 했다. 에너지 관련 기업인 우리 회사의 입지로는 광주광역시가 거론됐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대학 진학 이후 인생의 절반가량을 서울에서 살았다. 결혼을 한 뒤로는 빠듯하게 살면서도 서울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서울 사람인 아내는 말했다. “시골에서 어떻게 살아?” 한번 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서울 집값은 더 오르지 않을까? 아이들 학교 문제는 어떡할 거야? 질문은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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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 도시 인구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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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을’로만 살아왔는데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을 거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까 괜찮을 거다, 생활비가 덜 들 테니 돈을 모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말은 안 했지만, 부모님 두 분만 계시는 고향집에 자주 들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난 덜 복잡한 편이었다. 본사를 옮긴다면 졸지에 ‘기러기 아빠’가 될 고참들이 많았으니까. 어떻게 되든 빨리 가닥이 잡혔으면 했다.
그런데 내 나이 또래 동료들에 비해 고민이 몇 배는 많을 것 같은 우리 부장님은 느긋했다. “그거 한두 번 나온 얘기 아니야. 짐 쌀 때쯤 고민해도 되니까 일들 해, 일.” 2007년 대선 무렵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명박 대통령이 어떤 분이시냐. 니들은 어려서 모르겠지만 서울시장 때부터 머리띠 두르고 수도 이전에 반대했던 사람 아니야~ 안보에 빵구 난다, 이전 비용이 100조원 넘는다 하면서. 선거 땐 뭐, 예정대로 한다고 했지만 두고 보자고.” ‘눈치 100단’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구나 싶었다. 부장님 말대로 2010년에 행정도시 얘기는 없던 걸로 하자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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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행정도시 대신 교육과학중심경제도시라는 ‘신상’품을 내놓았다. 대학도 가고 연구소도 간다는데, 유독 삼성·롯데처럼 대통령한테 빚진 기업들이 크게 보였다. 그냥 ‘기업도시’라고 하면 되지 쓸데없이 이름만 길다고 생각했다. 문화시설, 공원, 여가·오락 시설도 있을 테니 ‘교육과학문화녹색여가오락중심기업도시’라고 이름 지으면 어떨까, 재벌들한테 땅을 헐값에 준다는데 서민을 사랑하시는 대통령이니 집 없는 서민들한테도 원형지 형태로 땅을 팔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앙꼬’는 어디 간 거지? 원래 서울로 사람과 돈이 너무 몰리니까 분산시키고 지방도 잘살게 하자는 취지 아니었나? 충청도에 선심 쓰듯이 새도시 하나 만들어주는 게 아니었잖아. 아이들이 내 나이쯤 되면 서울은 미어터지겠군.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없었다4445
정부는 행정도시를 경제도시로 바꾼다면서 “혁신도시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에서 행정도시와 연계된 혁신도시도 차질을 빚을 전망이라는 기사를 봤는데, 그 무렵 우리 회사는 광주에 땅을 샀다. 나는 뭐든지 한다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대통령이니 세종시도 혁신도시도 정부 발표대로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번에는 한나라당 안에서 싸움이 세게 붙었다. 대표 시절 여야 합의로 행정도시특별법을 만들었던 박근혜씨가 ‘신뢰의 정치’를 얘기하면서 원안대로 행정도시를 만들어야 한다고 반기를 들었다. 언론은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충돌’이라고 전했다. 사람들은, 한다면 하는 대통령과 한번 뱉은 말은 지킨다는 ‘예비 대통령’의 싸움에서 누가 이길지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매달 월급에서 떼가는 금쪽같은 세금으로 하는 일들인데.
그 싸움에서 이긴 사람은 없었다. 국민만 졌다. 야당의 거센 반발에 여당의 내분까지 겹쳐 아직도 법을 개정하지 못했다. 청와대의 지시에 여당 지도부가 몇 차례 날치기 시도를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결국 세종시는 행정중심복합도시도, 교육과학중심경제도시도 되지 못하고 표류했다. 세종시에 투자하겠다던 기업·대학·연구소는 본격적인 투자를 올 연말 대선 이후로 미뤘다. 혁신도시로 옮기려던 공기업들도 땅을 사두긴 했지만 실제 옮겨간 공기업은 몇 곳 되지 않고, 본사를 옮겼다고 얘기하는 곳도 이름만 본사일 뿐 큰 지사에 불과했다. 모두들 올 대선에서 어떤 결론이 나는지 눈치만 보고 있다.
우리 회사도 땅만 사두었다가 정부의 눈치에 마지못해 삽질을 시작했다. 건물은 대선이 끝나고 올린다고 한다. 부장님은 여전히 지켜보기만 한다. “그때 가봐야 아는 거고, 가야 가는 거지. 일들 해, 일.”
올 대선을 포함하면 세 번째다. 그 사이 총선이나 지방선거 때도 늘 시끄러웠다. 국민은 지쳤고 여론도 시큰둥한데 대선주자라는 이들은 저마다 목청을 올리고 있다. 고민이다. 누구를 믿어야 하나. 누구를 밀어야 하나.
앞차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걸 보니 한동안 서 있을 모양이다.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계산기를 두드려봤다. 세종시에 들어간 돈이 얼마일까? 땅을 사고 기반시설을 짓느라 대략 6조원을 썼다고 한다. 세금이다. 이자율을 5%로 계산해보니 1년 이자만 3천억원이다. 세종시가 표류하는 사이, 세종시와 한 묶음으로 계획됐던 혁신도시까지 어그러지면서 날아간 돈도 세금이다. 얼추 조 단위로 넘어간다. 계산을 포기했다. 최근 뉴스를 보니 한국의 국가 부채가 400조원을 넘어 빠르게 늘고 있고 조만간 국내총생산(GDP)의 50%에 이를 것이라는데, 곤히 잠든 아이들 얼굴을 보니 한숨만 나온다.
땅 매입대금 이자만 혈세 수천억씩 나가선거유세
참, 이번에 어머니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설에도 “느그 회사는 오는 거냐, 마는 거냐?”고 물으셨는데. 방정맞은 입 탓이다. 몇 년 전에 “회사가 이사 오면 자주 찾아뵙고 바쁠 때는 농사일도 돕겠다”고 어머니의 기대치를 한껏 높여놓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괜히 짜증을 부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요? 진짜 가야 가나 보다 하지요. 난 장기판 졸(卒)이라고요, 졸!” 아니, 내 탓이 아니다. 무슨 나라가 이 모양인가. 나라 탓이고 정치하는 놈들 탓이다. 맞다. 국민을 졸로 보는 정치인들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누가 뽑았지? 우리 잘못인가? 내 잘못인가?
세종시 관련 일지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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