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돌아왔다. 그것도 화려하게 돌아왔다. 그는 2009년 12월29일 아침 대통령의 단독 특별 사면·복권을 받아 지하세상에서 지상무대로 단숨에 컴백했다. 그의 사면·복권 과정은 최고 재벌의 위상에 걸맞게 남달랐다.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로비를 위해서라는 사면·복권 이유도 색다르고, 강원도·체육계·재계 순으로 조직된 사면청원 절차도 독특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연말의 전격 단독 사면으로 한껏 예우한 것도 파격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본인은 아쉬울 게 없는데 국가가 아쉬워서 특별사면을 한 것 같은 착시 현상이 빚어졌다. 전 과정이 잘 연출된 한 편의 드라마처럼 깔끔하고 우아하다.
형사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을 들락날락하던 기간과 형 확정 뒤 4개월 남짓 계속된 집행유예 기간 내내 이 전 회장은 느슨하게나마 법의 족쇄에 묶인 ‘법 아래 존재’였다. 하지만 이번의 특별 사면·복권으로 그는 다시금 ‘법 위의 존재’로 돌아왔다. 이제 그는 ‘치외법권의 황제’에 걸맞은 거침없는 행보를 선보임으로써 국민의 뇌리에서 파렴치한 배임탈세범의 기억을 걷어내야 한다.
다시 법 위에 군림하는 황제의 자리로그 첫 번째 기회가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활동이다. 이 전 회장은 이제부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을 구워삶아 표심을 평창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국가적 관점에서 특별사면을 결심했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2009년 12월29일 국무회의 발언은 특별사면으로 ‘로비 면허’를 내줄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겨울올림픽을 수주해오라는 특명이나 다름없다. 독재와 가난에 찌든 ‘바나나 공화국’의 막가파 대통령이나 할 법한 소리가 입만 열면 국가 브랜드와 국격을 노래하는 대통령의 입에서, 그것도 공식석상에서 튀어나온 셈이다. 단언컨대 이런 목적의 특별사면은 지구촌 곳곳에서 비웃음을 살 해외 토픽감이다.
기가 막히다. 올림픽을 유치하라며 특별사면까지 단행하는 국가와 정부는 도대체 뭐며, 졸지에 그런 무차별 로비 활동 대상으로 전락한 IOC와 IOC 위원들은 도대체 뭔가. 이러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IOC 위원이 대한민국과 대통령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이라도 내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파렴치한 국가의 선량한 국민 노릇은 이렇게 어렵다.
조금만 따져보면 공식적인 사면·복권 이유는 모순투성이다. 우선 이 전 회장이 로비 전면에 나서야만 유치 전망이 높아진다는 것부터 명백한 과장이다. 더욱이 특별사면을 받아야만 그가 IOC 인맥을 가동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대전제는 새빨간 거짓말 수준이다. 거대한 재력에 바탕을 둔 그의 영향력과 네트워크는 집행유예 기간에도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삼성 특검과 재판 결과로 그의 재력이 공식 집계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이 이미 알려진 마당 아닌가.
분명한 건 이 전 회장이 마음만 먹으면 집행유예 기간 중에도 얼마든지 자신의 영향력과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조용한 유치 활동을 벌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나 몰라라 손 놓고 있었다면 청와대가 직간접으로 유치 활동을 당부하는 선에서 멈췄어야 했다. 특별사면은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뒤 논공행상 차원에서 공론에 부쳐 결정해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가 이런 올바른 절차를 외면하고 특별사면을 앞세운 걸 보면 이 전 회장이 IOC 로비 활동이나 삼성의 세종시 투자를 조건으로 특별사면을 흥정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고난의 행군 끝내고 ‘행복한 눈물’?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건희 전 회장은 정치권과 검찰 내부에 삼성 돈은 받아도 안전하다는 신화를 만들어냈을 정도로 남다른 ‘부패 신공’을 연마했다. ‘떡값’과 향응 제공 등 전통적 방법은 물론 상대방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 갖가지 ‘빅딜’ 구상에도 능하다는 평가다. 이런 이 전 회장을 앞세운 고강도 로비 공세를 한국 대통령이 직접 예고한 것과 다름없는지라, IOC 위원들은 이제 이 전 회장이 다가오면 오히려 긴장하게 생겼다. 막상 표결에서도 표를 안 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겨울올림픽 개최지가 평창으로 결정되면, 한국 정부의 후원을 업은 이 전 회장의 전면적 로비에 IOC 조직이 통째로 넘어갔다는 의혹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번에 단행된 ‘특별로비용 특별사면’의 야비하고 천박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평창의 올림픽 유치는 완전히 물 건너갔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럼에도 이 전 회장은 법학 교수들의 고발로 시작된 지난 10년의 ‘고난의 행군’을 끝낸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금쯤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게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서 특검법 제정까지의 마음고생, 경영 은퇴 선언 당시의 아쉬움, 두 차례 특검 소환조사의 치욕, 피고인 신분으로 드나들던 형사법정의 낯선 풍경, 집행유예 기간 중의 답답한 심사 등 지난 2년간의 악몽 같은 과거사를 기억의 창고에서 훌훌 털어내며 경영 복귀 절차와 일정을 잡고 있을 게다.
생각해보면 그는 삼성 총수가 된 뒤 한국의 사법제도와 여러 차례 대회전을 치렀다. 법학 교수들의 집단 고발, 삼성자동차 실패, 대선자금 수사, 삼성 X파일 공개, 유령노조 스캔들, 김용철 변호사 양심고백과 특검 수사, 비자금과 차명재산 공개, 떡값 로비 스캔들, 고가 미술품 스캔들, 삼성SDS 사건 유죄 확정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진검승부의 순간마다 법은 한없이 무력하고 끝없이 관대했다. 한 인간을 두고 한 나라의 법과 기본 질서가 그렇게까지 쩔쩔매는 건 차라리 경이로웠다.
이건희 전 회장은 전직 대통령, 현직 대통령의 아들과 측근, 그리고 내로라하는 재벌 총수들을 줄줄이 사법 처리한 한국 법치주의가 정상적인 사법제도로는 넘지 못한 법 위의 철옹성이었다. 그룹 법무실장 출신 김용철 변호사의 ‘특별’폭로에 힘입어 ‘특별’검사법을 제정하고서야 간신히 법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었던 이 전 회장의 ‘특별’지위는 유죄판결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특별’사면은 그 증거일 뿐이다.
한국 법치주의의 ‘특별’ 대우이 전 회장과 한국 법질서의 끈질긴 싸움은 ‘이건희 봐주기 경쟁’의 정점을 찍은 이명박 대통령의 연말 단독 사면에 힘입어 이 전 회장의 막판 뒤집기 한판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더욱 사리에 맞지 않는 건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 특별사면을 국민의 청원과 국익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포장하며 이 전 회장을 난세의 영웅이라도 되는 듯 한껏 치켜세운다는 점이다. 하지만 특별사면의 그날, 그의 앞에서 법의 힘이 멈추자, 만민 앞에서 법의 빛이 바랬다. 이번 특별사면은 이 전 회장에게 치외법권을 부여한 이명박 대통령의 법난(法亂)이자 한국 법치주의의 치욕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법학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미국 최고 의사’ 84살 김의신 “암에 좋은 음식 따로 없어, 그 대신…”
다 ‘내가 했다’는 명태균, 이번엔 “창원지검장 나 때문에 왔는데…”
“대통령 술친구 이긴 ‘김건희 파우치’…낙하산 사장 선임은 무효”
법원, KBS 박장범 임명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기각
관저 유령건물 1년8개월 ‘감사 패싱’…“대통령실 감사방해죄 가능성”
이재명 ‘법카 유용’ 혐의도 ‘대북송금’ 재판부가 맡는다
핵탄두가 ‘주렁주렁’…푸틴이 쏜 ‘개암나무’ 신형 미사일 위력은
일상적 불심검문에 대학생·시민들 ‘불복종’…공권력 바꿨다
임영웅 ‘피케팅’ 대기 2만1578번 “선방”…‘광클 사회’ 괜찮나?
홍준표, 이재명 법카 기소에 “마이 묵었다 아이가? 그저 망신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