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21일 오후 1시40분 새해 예산안 처리를 앞둔 경기도 의회 본회의장은 무겁게 침묵했다. 진종설 의장(한나라당)이 초등학생 5∼6학년 무상 급식 예산을 삭감하는 내용이 담긴 한나라당의 2010년 경기도교육청 수정 예산안을 상정하면서 본회의장은 이내 ‘전쟁터’로 바뀌었다. 수정안의 원천 무효를 요구하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 12명이 의장석을 향해 돌진했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육탄 저지에 나섰다. 의원 50여 명이 드잡이를 벌이는 사이 의석에 있던 한나라당 의원 65명이 투표에 들어가 찬성 64표, 반대 1표로 수정안은 가결됐다. 5분여 만의 일이다.
7월엔 반대했던 예산안을 수정안으로 올려
이날 본회장 의석에는 한 의원의 피켓이 눈길을 끌었다. “무엇이 두렵길래 의원의 발언을 막냐. 무상 급식이 의원의 소리, 도민의 소리다.” 피켓을 든 이는 “나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배를 곯는 것보다 얻어먹는 것이 알려지는 게 힘들었다”고 고백한 한나라당 소속의 재선 의원 최환식(52) 의원이었다. 예결위원장과 계수조정위원장을 지냈을 만큼 한나라당에서 예산통인 그는 12월16일과 21일 두 차례에 걸쳐 ‘5분발언’ ‘신상발언’ 등을 신청했으나 무산되자 이날 피켓시위에 나섰다.
“난들 선거를 앞두고 당론을 거스르는 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왜 모르겠나. 그러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의원으로 있을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의장에게 사전 발언 원고도 보여주었다. 발언 신청도 8일 전에 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여당 내부에서 나온 이견마저 건너뛰는 ‘날치기’ 논란 속에 2010년 경기도 초등학교 5∼6학년생 30만여 명분의 무상 급식 예산 394억원은 사라졌다. 다수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완승한 본회의장에는 소수당의 무기력한 모습이 대조를 이뤘다. 경기도 의회는 전체 도의원 116명 중 한나라당 98명, 민주당 12명, 민주노동당 1명, 무소속 5명으로 이뤄졌다. 도 교육청은 2009년 7월에 이어 또다시 ‘초등학교 무상 급식의 단계적 확대’ 정책이 좌초되는 쓴맛을 봐야 했다.
초등학교 무상 급식은 2009년 4월 이른바 ‘반MB·범민주 후보’로 당선된 김상곤 경기교육감의 핵심 선거 공약이다. 경기도 의회의 잇따른 무상 급식 확대 예산 삭감이 ‘김상곤 교육감 흔들기’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애초 경기도교육청과 여야는 기존 저소득층의 무상 급식 지원과 도서벽지·농산어촌 학생들의 무상 급식에 합의했다. 다만 경기도교육청이 초등학교 전면 무상 급식의 1단계로 5~6학년 전체에 대해 무상 급식을 실시하겠다는 안을 내놓자 한나라당은 이 예산을 삭감하는 대신 소득이 최저생계비의 130%까지인 차차상위 계층을 150% 수준까지 늘려 지원하는 수정안으로 맞불을 놓았다. 4인 가족 기준으로 월소득 200만원 이하의 저소득층 초·중·고교생에게 무상 급식을 하자는 것이다.
경기도의회 한나라당 대변인인 전동석 의원은 “한나라당에서 교육청 안을 대폭 수용해 제시한 안을 교육청에서 받지 않은 것은 무상 급식 실현 의지보다 정치적 의도가 크다는 것”이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경기도의회 민주당 대변인인 고영인 의원은 “한나라당이 독선과 독재로 백주대낮에 천인공노할 위법 날치기 만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앞서 2009년 7월 경기도교육청이 도서벽지와 농산어촌 초등학생, 300명 이하 소규모 도시 학교 학생의 무상 급식 예산으로 171억원을 편성했으나, 1차로 경기도 교육위원회에서 반토막이 나고 한나라당은 나머지 예산마저 전액 삭감한 바 있다. 당시 “전형적 포퓰리즘 정책”이라며 예산을 삭감했던 한나라당이 이번엔 태도를 180도 바꿔 도서벽지와 농산어촌에 대한 전면 무상 급식을 수용한 수정안을 내놓았다. 지난 5개월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던 것일까?
구희현 경기 친환경학교급식운동본부 대표는 “지난 7월 무상 급식 예산 삭감 이후 아이들 밥그릇까지 빼앗느냐는 비난 여론이 급등하면서 한나라당이 수세에 몰렸다.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상 급식을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김상곤 교육감에 끌려다닐 것 같은 상황에서 나온 ‘정치적 꼼수’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무상 급식 논란은 외견상 재원과 실시 방법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됐다. 최영길 의원(한나라당)은 “전임 교육감 때는 굶는 아이가 없다던 도 교육청이 김상곤 교육감이 취임하자 전체 무상 급식을 들고 나왔다. 그래서 재원을 확인해보니 턱없이 부족했다. 예산의 뒷받침도 없이 선심성 정책을 펴는 것이 포퓰리즘 아니냐”고 되물었다.
“보편적 교육 복지” vs “재정 부담 고려”하지만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왔다. 한나라당 최환식 의원은 “당장 2009년 쓰다 남은 1500억원 안팎의 순세계잉여금과 정부가 주는 보통교부금 2600억원, 지난 2008년 징수한 교육세 1300억원이 새해 초 들어와 도 교육청의 1차 추경예산을 짜야 한다”며 “돈이 없어 무상 급식을 못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했다.
김동선 경기도교육청 공보담당은 “해외 출장을 비롯한 불필요한 비용과 중복 비용 등 낭비성 예산을 올해에만 900억원 줄였다”며 “전체 초등학생으로 무상 급식을 확대하면 3500억~3700억원이 들지만 시·군 부담 비용을 빼면 실제로는 1800억원이면 되는데다 정부와 국회도 급식비 지원 법률안을 마련 중인 만큼 재원 마련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방식도 엇갈렸다. 경기도교육청은 “단계적인 무상 급식은 초·중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상황에서 보편적 교육 복지의 실현”이라는 입장이다. 선별적 무상 급식은 차별 급식이고 아이들에게 낙인 효과를 줄 수 있다고 한다. 반면 한나라당은 “전체 학생에게 주면 좋지만 재정 부담을 고려해 지원이 시급한 저소득층부터 하자는 것”이라는 태도다.
하지만 이런 대립의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올해 지방선거에 대한 여여 간 위기감이 깔려 있다. 무상 급식 예산 삭감이 지방의원들에게는 치명적인 ‘부메랑’이 돼 돌아올 수도 있다는 우려도 높아지고 있다. 경기도의회 한나라당 소속의 한 의원은 “무상 급식 문제는 올해 지방선거에서 크게 부각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김상곤 교육감에게 이미 주도권을 빼앗겨 우리로서는 잘해야 본전”이라며 “꼭 ‘쥐약’을 들고 선거에 나서는 기분”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특히 김상곤 교육감이 교육과학기술부의 시국선언 교사 징계 요구를 따르지 않는 등 현 정부와 각을 세우면서 보수 언론과 보수 시민단체의 집중 포화가 쏟아졌고, 보수 쪽의 무상 급식에 대한 이념 공세도 점차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 경기개발연구원은 ‘학교 급식 무상화 방안’에 대해 “반시장주의자들이 말하는 어설픈 평등주의와 복지국가의 망령이며 최종적으로는 교육 비용의 무상화 및 국영화로 가려는 단계적 잠식 전략”이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1명이라도 상처를 받지 않도록”반면 무상 급식 문제를 처리하면서 ‘다수당’인 한나당에 밀려 ‘소수당’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한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은 물론 시민사회단체도 무상 급식 예산 삭감 의원들에 대해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단호하게 심판하겠다며 벼르고 있다.
조흥식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무상 급식 문제는 10명의 아이 중 단 1명이라도 상처를 받지 않도록 아동 복지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야 하는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상태에서 어린이들이 단순 보호 대상이 아니라 존엄성과 권리를 지닌 주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홍용덕 기자 한겨레 지역부문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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