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이 저문다. 참으로 긴 한 해였다. 많이 힘들었나 보다. 한반도가 겪은 2009년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절망이 아니라, 희망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나 다행인가. 12월8일, 스티븐 보즈워스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을 알린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북핵 협상은 지난 20년 동안 교착, 위기, 협상 그리고 다시 교착이라는 반복적 순환과정을 거쳐왔다. 달라져야 한다. 새해에는 절망의 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평화를 향한 새로운 전진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 심정으로 지난 한 해를 돌아본다.
북한과 미국, 상반기에는 엇갈렸고, 하반기에는 다시 만났다. 보즈워스의 방북은 북핵 해결의 역사에서 세 번째 협상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두 번의 대타협은 성공하지 못했다. 1994년의 제네바 합의, 그리고 2005년 9·19 공동성명은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불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신뢰의 평원은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보즈워스의 방북 과정에서 북-미 양국은 냉전구도 해체라는 큰 틀에서 북핵 문제를 풀어가는 포괄적 접근에 공감을 표시하고, 한반도 평화체제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기대할 만하다.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의 가닥을 찾을 수 있을지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이제야 협상의 틀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양국은 엇갈림 속에서 파국의 환영을 보았다. 2009년 상반기, 양국의 엇갈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미국은 지나치게 신중했고, 북한은 지나치게 서둘렀다. 5월 북한의 핵실험은 양국의 엇갈림이 빚은 참사였다. 북한은 왜 그렇게 초조한가?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다. 국내적으로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목표시점이 다가오고, 후계체제도 준비해야 했다. 조속한 대외환경 정비가 필요했다.
신중한 미국, 서두른 북한그러나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달랐다. 비전은 거창했지만, 준비는 부족했다. ‘핵 없는 세계’, 세기의 꿈 아닌가. 1983년 미국 컬럼비아대의 4학년 학생은 학교 잡지에 ‘시대의 꿈’을 기고했다. 26년 뒤 그 학생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대학생의 꿈은 거창했지만, 대통령의 방법론은 신중했다. 오바마 스타일은 합의를 중시한다. 소수자로 살아온 인생 경로, 법률가로서의 논리적 접근, 그리고 분열된 미국 정치 현실에서 오바마는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전향적 결단보다는 다수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최소공약수’를 선택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의 엇갈림은 북한이 4월5일 인공위성을 발사했을 때 표면화되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라인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터진 북한의 성급한 ‘공세’는 미국의 즉자적 반발로 이어졌다. 강경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북한은 곧바로 핵실험으로 받아쳤다. 이해의 시간이 오기도 전에 오해의 순간을 맞이했다.
오바마의 새로운 외교가 등장하기도 전에 부시의 유산들이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워싱턴의 비확산 전문가들은 협상의 힘보다 제재의 효과를 중시했다. 오바마 외교는 동시에 동맹의 덫에 걸렸다. 오바마는 대선 과정에서 부시의 외교를 일방주의라고 비판했다. 왜 한국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느냐고 비판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과정에서 한국의 정부가 바뀌었다. 햇볕정책의 시대가 가고, ‘달빛정책’의 시대가 왔다. 일방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결국 ‘달빛정책’과의 공조로 이어지다니, 역설이 아닐 수 없었다.
확실히 돋보인 중국의 역할엇갈림의 조정 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이 컸다. 어쩌면 2009년 한반도 정세의 열쇳말은 ‘중국의 부상’ 아니겠는가. 이제 중국은 ‘G2 시대’라는 새로운 용어처럼,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세계경제에서 중국의 위상과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상호 의존성은 밀접해졌다. 일본의 민주당이 ‘동북아 공동체론’을 제시하며 미국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조정하겠다고 나서는 이유도 결국, ‘중국의 부상’을 중요하게 고려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중국의 세기가 가까운 미래인지, 여전히 논쟁거리다. 하지만 2009년 동북아의 질서 변화에서 중국의 역할은 확실히 돋보인다. 7월 하순, 미국과 중국은 전략 및 경제 대화를 했다. 부시 행정부 당시의 전략경제대화와 고위급 대화를 합쳐 대화의 위상과 의제를 격상시켰다. 그때 다이빙궈 외교담당 국무위원은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에게 분명히 밝혔다. 제재가 북핵 문제를 푸는 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그리고 9월18일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이미 중국은 국내적으로 대북정책을 둘러싼 심각한 논쟁을 정리했다. 북-중 관계에서 변화냐 지속이냐의 논쟁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직접 나서 지속으로 정리했다.
중국의 이니셔티브는 10월4일 원자바오 총리의 방북에서 총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정치적 연대를 다지고, 경제 협력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해 주도적으로 동북아 질서를 관리하겠다는 전략적 의지를 드러냈다. 북한 역시 변화하는 정세에서 최소한의 안전판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동북경제권의 새로운 모습도 등장했다. 중국의 동북진흥계획이 구체화되면서, 북-중 접경지역의 철도·도로·항만을 포함하는 새로운 물류망이 구축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북한은 동해로 나아가는 출구이며, 저렴한 노동시장을 의미한다. 북한의 입장에서도 한국의 대북 강경정책으로 남쪽으로 향하는 문이 닫히면서, 현실적으로 북방경제권 편입이 불가피해졌다. 북한의 대중국 경제의존도는 지리적 이점과 유리한 노동분업, 그리고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남북 경제공동체의 꿈이 멀어지고 있다. 경각심을 갖고 바라봐야 할 현상이다.
2009년의 또 다른 키워드는 평화체제다. 3차 서해사태가 일어났다. 2007년 10·4 정상회담에서 합의했던 ‘서해 평화협력지대’가 이행되었다면, 그런 불행이 반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평화체제는 또한 보즈워스의 방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부상했다. 북한은 핵 포기의 전제조건으로 평화보장 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마바 행정부 역시 북핵 폐기를 위한 포괄적 접근에서 관계 정상화와 더불어 평화체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평화체제의 비전은 사라졌다. 서해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북방한계선’에 영토와 영해의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그곳에는 대결만이 있을 뿐이다. 냉전의 바다 서해를 어떻게 평화의 바다로 만들지에 대한 인식이 없다. 앞으로의 북핵 협상에서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가 중요해질 것이다. 그러나 긴장의 바다를 저렇게 방치하고, 과연 평화체제의 문으로 진입할 수 있을까. 서해를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 군사적 신뢰구축을 이룰 수 있을까. 평화는 단지 말이 아니다. 희망의 근거이고, 한반도 미래의 실체다.
물론 평화체제로 가는 길은 멀다. 비핵화가 과정이듯이, 평화체제 역시 과정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는 평화체제로 가는 과정에서 잠정적 단계로 ‘한반도 종전 선언’을 구체적으로 추진했다. 부시 행정부와 조율했고, 2007년 10·4 정상회담에서 남북한이 합의했다. 종전선언이란 무엇인가? 한국전쟁의 법적 종료를 의미한다. 일시적인 정전 상태의 법적 효력과는 다르다. 당장 검토해야 할 현안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여전히 정전 상태를 관리하는 법적 주체로서 유엔사령부의 정체성 문제가 있다. 유엔사령부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의 결의로 만들어진 기구다. 전쟁의 법적 종료를 선언하게 되면 유엔사의 설립 근거가 상실된다.
다시 말해, 평화체제 형성 과정에서 새로운 평화 관리 기구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평화체제로 가는 과정을 북한에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북한은 핵 폐기의 상응 조처를 취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 구상처럼, 북한의 핵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돈만 갖고는 북한의 핵 폐기가 어렵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핵을 포기하고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동북아 정세가 꿈틀거리고 있다. 오바마의 신중함은 초기에는 우유부단함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협상이 시작되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지속성의 근거로 작용할 것이다. 1994년과 2005년의 대타협과 비교했을 때, 지금은 다르다. 바로 오바마 행정부의 집권 초기이기 때문이다. 과거 두 번의 협상 국면과 다르다는 점이 희망의 근거로 다가온다.
그리고 중국의 새로운 동북아 전략이 작동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지역과 북한 경제의 만남은 이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새로운 변수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일본이 움직인다. 동북아 공동체의 외교적 비전과 ‘동북아 비핵지대화’ 구상으로 6자회담에서 일본의 역할이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 민주당은 북한과의 수교로 전후 외교를 청산하려 할 것이다. 물론 일본인 납치 문제의 늪에서 벗어나야겠지만, 새로운 동북아 질서에서 북-일 관계는 더 이상 부록이 아니라 본문에 포함될 것이다.
이념 놀음에 빠진 정부한국은 어디에 있는가? 여전히 이념 놀음에 빠져 정세를 읽지 못하고 있다. 2009년 북한은 자존심을 접고 이명박 정부의 문을 여기저기 두드렸다. 현대아산을 통해서, 싱가포르 접촉을 통해서, 그리고 개성에서 남북관계를 재개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핵 폐기의 ‘과정’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고, 핵을 포기해야 무엇을 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미국·중국 모두가 바삐 움직일 때, 한국은 여전히 낮잠 중이다. 어디서 자고 있는가? 화산의 분화구 위에서다. 동북아의 지각이 변동하고, 한반도 평화체제의 움직임이 분출하기 직전이다.
2010년이 기다려진다. 2009년 수면 아래서 진행되던 변화들이 드러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도 변화의 흐름을 거스르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예측한다. 결국 수동적으로라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다만 북한불변론·협상무용론, 그런 종교적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상식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걱정도 든다.
김연철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dootakim@hanmail.net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부끄러운 줄 알라” “폭동 옹호”…싸늘한 민심 마주한 국힘
“6시간 전엔 와야”…지금 인천공항은 ‘비상’, 폭설 때보다 더 혼잡
[속보] 경찰, ‘윤석열 체포 저지’ 김성훈·이광우 구속영장 재신청
[속보] 검찰, 중앙지법에 윤석열 구속 연장 신청
전공의 처단 포고령 두고 ‘낄낄’…박단 “웃어? 제정신 아냐”
“내란 확정처럼 쓰지말라, 선배로 당부” 복귀한 이진숙 ‘보도지침’
“경호처, 김건희 비화폰 번호 장관들한테 주며 잘 받으라고 했다”
트럼프 “다시 김정은에게 연락해 보겠다”
윤석열 머리는 디자이너 작품? 경호처 작품? “누가 했든 부적절”
[단독] 경찰 ‘전광훈 전담팀’ 꾸렸다…법원 난입 연관성 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