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정치 보복’을 말하지 않고 2009년 한국을 요약하기란 어렵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2009년을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이었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노 전 대통령은 5월23일 죽음을 택했다.
박연차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을 수사하던 검찰이 2008년 말 노 전 대통령이 박 전 회장에게 15억원을 빌렸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검찰은 해가 바뀌면서 노 전 대통령을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그가 박 전 회장에게서 600만달러를 받았다는 것이 의혹의 핵심이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12월18일 서울 마포구 노무현재단에서 검찰수사관들에게 체포돼 연행되고 있다. 한 전 총리는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 5만달러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집요했고, 이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난폭했다. 사건을 둘러싼 노 전 대통령과 검찰의 공방이 치열해질수록 상처를 입는 쪽은 노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홈페이지 글 등을 통해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글은 보수 언론과 검찰이 주고받는 핑퐁게임 속에서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부인 권양숙씨의 억대 명품시계 수수 의혹, 자녀들의 미국 저택 매입 문제 등이 언론에 속속 공개됐다. 언론의 폭로와 주장이 검찰 수사를 견인하고, 검찰이 포착한 혐의 사실은 또다시 보수 언론을 통해 확대됐다.
2009년 초부터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직전까지 ‘언론의 폭로 → 검찰 수사 → 노 전 대통령의 항변 → 정치적 상처’로 이어지는 패턴이 되풀이됐다. 노 전 대통령은 5월23일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모욕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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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한국 사회에 몇 개의 중요한 과제를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검찰 개혁이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검찰이 편파적으로, 혹은 자의적으로 검찰권을 행사해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행태에 비판이 제기됐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추모시를 쓴 이승철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시인)은 검찰의 책임을 물었다. “검찰이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노 전 대통령을 압박했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도 외면으로 일관한 반면, 노 전 대통령에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검찰권이 그런 식으로 활용되는 현실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정권이 바뀔 때 전 정권 핵심 인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뤄진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특히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검찰의 행태는 정치보복 혐의가 짙다는 지적이다. 2008년 이후 검찰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의 청와대 기록물 반출에 대한 수사에도 공을 들였다. 그 밖에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등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들도 대부분 별개의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았거나 구속됐다.
과거와 달리 검찰 스스로 정권의 이해관계에 맞춰 수사를 한다는 비판도 있다. 검찰이 기록한 ‘실적’이 이를 뒷받침한다. 2008년 정부가 공기업 선진화 방안을 밀어붙일 때 검찰은 마침 공기업 비리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다룬 문화방송 에 대한 수사와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을 배임 혐의로 기소한 것도 검찰의 ‘정권 코드 맞추기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 전 사장 등 일부에게 최근 법원은 잇따라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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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검찰 개혁의 과제는 2009년 한 해 동안 거의 진전되지 못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주체가 없다는 현실이 문제였다. 참여정부 때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를 이끌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김선수 변호사는 검찰 등 기득권 그룹의 저항을 원인으로 꼽았다.
검찰 개혁 주도할 진보 지식인 없어“막강한 권력기구인 검찰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청와대가 나서서 범정부적 추진기구를 구성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국회에서 국회의장에 속하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의제화 작업을 주도해야 한다. 법제사법위원회 정도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니다. 그래야 검찰의 반발을 극복하고 제대로 된 개혁 방안을 도출할 수 있는데, 국회 내 특위 구성은 야 4당의 요구에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검찰 개혁 논의가 출발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민주당 내부에는 지도부의 전략 부재에 원인을 돌리는 시각도 있다.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검찰개혁특위 설치를 포함해 △이명박 대통령 사과 △책임자 처벌 △특별검사제 도입 △국정조사 등 ‘5대 선결조건’을 내세우며 장외투쟁을 벌였다. 5개 요구 조건이 충족돼야 국회에 등원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거리로 쏟아져나온 조문 인파가 민주당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민주당은 아무런 성과 없이 7월12일 언론관련법 저지를 명분 삼아 국회에 등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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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검찰 개혁에 대한 요구로 이어졌지만 2009년 한 해 동안 구체적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5월29일 노 전 대통령 영결식에 모인 시민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당시 민주당 내부에는 명분도 없이 빈손으로 국회에 등원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지만, 이강래 원내대표 등 당시 지도부가 언론관련법 저지를 위해 등원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며 지도부 책임론을 제기했다.
검찰 등 기득권층의 저항을 검찰 개혁을 가로막는 외부적 요인이라고 한다면, 진보개혁 진영 내부에 검찰 개혁을 주도할 만한 지식인 그룹이 없다는 사실은 내부적 요인에 해당한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가 소개한 일화다.
“상식적 수준에서 검찰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전문적 영역에서 검찰 개혁 논의를 주도할 수 있는 그룹이 없다. 최근 역사 잡지인 가을호가 검찰 개혁을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다. 한국 검찰제도의 역사 등 검찰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부하자는 취지였는데, 사회과학이나 정치학 영역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전문가가 없었다. 결국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들끼리 모여 검찰 개혁을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검찰 개혁에 대한 전문적 정보와 대안을 지닌 지식인이 대중과 소통에 나서야 이 문제가 본격적인 공론화 과정을 거칠 수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형편이다.”
“선별적인 법의 잣대가 보복 논란 불러”
최근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바로 그 방식 그대로 전개되는 것은 지지부진한 검찰 개혁과 무관하지 않다. ‘특정 기업에 대한 먼지털이식 수사 → 참여정부 인사 관련 진술 확보 → 보수 언론의 피의사실 공표 → 검찰의 본격 수사 → 보수 언론의 집중 보도’로 이어지는 패턴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 이전과 이후, 달라지지 않았다.
한 전 총리의 ‘5만달러 수수’ 여부를 논외로 하면, 검찰과 보수 언론의 행태에 적잖은 의혹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전 총리 수사를 담당하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한상률 전 국세청장 의혹 수사팀이기도 하다.
가 12월 초 한 전 총리의 5만달러 수수 의혹을 실명으로 보도하기 직전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안원구 국세청 국장의 폭로 등 한상률 전 청장의 로비 의혹이 추가로 제기됐다. 미국에 도피성 체류 중인 한 전 청장의 강제 입국을 시도하지 않는 검찰에 비난이 쏟아졌다. 안 국장의 주장에 따르면, 한 전 청장은 자신의 청장직 유임 등을 위해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 등 현 정권 실세에게 로비를 시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태광실업 세무조사도 정권 차원의 기획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민주당과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이명박 정권·검찰·수구언론의 정치공작 분쇄 및 정치검찰 개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한명숙 공대위)가 “현 정권 핵심 실세가 개입된 한상률 사건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검찰과 가 합작한 것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는 것도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한명숙 공대위에서 ‘보수 언론의 피의사실 공표’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보수 언론과 검찰이 합작해 한 전 총리를 ‘표적 사정’하고 있다는 의심이다.
한 전 총리 쪽과 공대위의 고민은 사건이 본격화되며 검찰 수사의 절차적 정당성이나 피의사실 공표 문제보다 자연스럽게 혐의 내용 자체에 관심이 쏠리는 여론 구조에 있다. 검찰과 보수 언론의 행태에 잘못이 있더라도 한 전 총리의 금품 수수 사실을 둘러싼 공방이 오가기 시작하면 상처를 입는 사람은 대개 당하는 쪽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합리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법의 잣대가 모든 통치집단과 엘리트에게 동일하게 적용돼야 하는데 선별적으로 적용되니까 정치 보복 논란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내용적으로는 정치 보복이라 해도 형식상 법의 이름으로 행사되니까 대응이 어렵다. 과거 경험을 보면 수사 결과 관련 혐의가 일부 드러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만약 한 전 총리가 본인의 주장대로 5만달러 수수 혐의에서 전면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국면은 달라질 수 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검찰 수사를 받은 참여정부 인사는 대개 검찰과 진흙탕 싸움을 벌여야 했다. 가족이 돈을 받은 사실을 본인은 몰랐다거나, 뇌물이 아니라 빌렸다거나 하는 식으로 논란에 발을 담글 수밖에 없었다.
체포영장 내용에 의구심주목할 만한 부분은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넸다는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이 ‘직접 건넸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한 전 총리의 측근은 “검찰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처럼 총리 공관에서 돈을 건넨 것이 사실이라면 증거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며 “이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검찰이 허위 진술을 가지고 사건을 키웠다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한 전 총리 쪽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총리공관에서 돈을 전달받는 일은 불가능하다며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검찰이 12월18일 한 전 총리를 체포하면서 제시한 영장 내용이 언론보도와 다른 것도 눈길을 끈다. 언론은 그동안 한 전 총리가 곽 전 사장으로부터 한국남동발전 사장직 청탁과 함께 돈을 전달받았다고 보도했다. 체포영장에는 이와 달리 한국석탄공사 사장직 로비가 5만 달러의 대가로 적시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곽 전 사장의 진술이 오락가락한다는 뜻이다.
박상훈 대표는 “한 전 총리가 돈 받은 사실이 전혀 없었다면 이는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와는 다른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는 것”이라며 “새로운 현상은 대중에게 새로운 태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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