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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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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헌재 놀이’ 또 다른 5년의 악몽

대선 1차·결선투표 위법 논란 속 선관위는 “카르자이 당선” 공포…
정당성 대신 군벌과 협력 선택
등록 2009-11-12 17:30 수정 2020-05-03 04:25

‘위법이지만 유효’라고 했던가? 2009년을 빛낸 대한민국 특산품 ‘헌재 놀이’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바람몰이를 하고 있다. ‘선거부정을 저질렀지만, 1위 득표자’가 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헌법은 어졌지만, 당선자’로 결정됐다. 법치도 염치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통속으로 돌아가는 국제사회의 후안무치가 눈물겹다.

‘부정선거도 유효, 헌법 무시도 유효!’ 결선투표까지 치르지 않고 재선에 성공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가운데)이 11월3일 자신을 지지하는 군벌과 측근을 대동하고 ‘부패 척결’ 의지를 다지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AHMAD MASOOD

‘부정선거도 유효, 헌법 무시도 유효!’ 결선투표까지 치르지 않고 재선에 성공한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가운데)이 11월3일 자신을 지지하는 군벌과 측근을 대동하고 ‘부패 척결’ 의지를 다지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AHMAD MASOOD

4표 중 1표가 ‘수상’… 결선투표도 무산

지난 8월20일 실시된 아프간 대선 1차 투표는 ‘말뿐인 선거’였다. 개표 초기 카르자이 대통령의 득표율은 당선권인 50%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선거부정 의혹이 잇따르면서 삽시간에 논란이 커지기 시작했다. 유엔 주도로 이뤄진 진상조사 과정에서, 전체 2만3천여 투표소 가운데 규모가 큰 곳으로만 3천여 투표소에서 선거부정의 정황이 포착됐다. 전체 566만여 표 가운데 135만여 표가 이들 투표소에서 나왔단다. 4표 가운데 1표꼴이다.

카르자이 대통령이 얻은 것으로 발표된 310만여 표 가운데 25만 표가량은 ‘독특한 공통점’을 지닌 투표소에서 쏟아져나왔다. 는 9월21일치 기사에서 “다른 후보자가 단 1표도 얻지 못한 이들 투표소에서, 카르자이 대통령은 꼭 600표씩을 얻었다”고 전했다. 일찌감치 떠돌던 ‘유령 투표소’의 존재가 현실로 드러난 셈이다. 이쯤되면 ‘재선거’를 치르는 게 순리였을 터다. 하지만 ‘결선투표’를 치르는 선에서 서둘러 봉합됐다. ‘위법은 있었지만, 결과는 유효’하단 게다. 이 과정에서 유엔의 미온적 태도를 강력히 비판하던 피터 갤브레이스 유엔 아프간지원파견단(UNAMA) 부대표가 해임되기도 했다.

결선투표를 앞두고도 1차 투표 때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영국 는 10월27일치 기사에서 “카르자이 대통령 측근들이 벌써부터 결선투표 부정선거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1차 선거 부정 자료를 수집하는 데 간여한 외교 관계자의 말을 따 “아프간 남부 파슈툰족 지도자들로부터 ‘공무원들이 선거부정 준비에 착수했다’는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압둘라 후보가 11월1일 돌연 선거 불참을 선언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이번에도, ‘봉합’의 바느질은 신속했다.

“선거의 합법성과 관련 없다고 본다. 개인적인 선택일 뿐이다.” 압둘라 후보가 사퇴 회견을 연 직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애초 이렇게 말했다. 11월7일 결선투표는 예정대로 치러야 한다는 게다. 아프간 선관위 역시 같은 반응이었다. 아지줄라 로딘 위원장은 11월1일 와 한 인터뷰에서 “아프간 헌법에 따라 압둘라 후보의 사퇴와 관계없이 결선투표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미 결과가 정해진 선거를 치르느라 유권자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지 않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진정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그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채 하루가 가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 관련 규정을 담은 아프간 헌법 제61조와 선거법 제18조 1·2항은 “자유·보통·비밀·직접선거를 통해 전체 투표의 50% 이상을 득표한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정해놨다. 또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선거결과가 확정·발표된 뒤 2주 안에 결선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며 “결선투표에선 최다 득표자를 당선자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후보 사퇴와 관련된 규정은 헌법에도, 선거법에도 없다.

눈여겨볼 만한 규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헌법 61조 하단에는 “당선자가 확정·발표되기 이전에 어느 한 후보자가 사망하는 경우에는 재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선거법 제18조 4항에도 같은 내용이 명시돼 있다. ‘후보자 사망’ 관련 규정을 ‘후보자 사퇴’에 준용해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과하다 해도, 최소한 결선투표는 예정대로 치러야 했던 게다. 그런데….

“과거와 같은 불필요한 상황을 피하고, 선거로 인해 소요될 막대한 비용을 절감하고, 아프간 국민의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해,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했고, 결선투표에 나선 유일한 후보인 하미드 카르자이가 아프가니스탄 차기 대통령에 당선됐음을 공포한다.”

반기문 총장 카르자이와 어깨동무

로딘 선관위원장은 11월2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발표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도 이내 ‘축하 전화’를 걸어왔다. 카불을 깜짝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카르자이 대통령과 어깨를 결었다. 모두들 하룻만에 낯빛을 바꿨지만, 어색해하는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헌법은 어겼지만, 당선은 유효’였다.

하긴 상황이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1명의 후보를 놓고 결선투표를 해봤자, 카르자이 대통령의 재집권에 ‘정당성’을 부여할 순 없다. 투표율이 극도로 저조하게 나오면 되레 상처만 커질 뿐이다. 더구나 선거 과정에서 유혈사태로 애꿎은 목숨이 스러진다면, 그 책임 역시 면키 어렵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게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정권이 정통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크게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부족장인 왕족 가문이란 전통에 기대는 방식이다. 둘째, 종교의 힘에 의지하는 방식이다. 셋째가 서구 방식의 합리성이다. 지난 2천여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방식으로 정통성을 인정받은 세력이 다스렸다. 8년여 짧은 세월 동안 이를 세 번째 방식으로 바꾸려는 건 부질없는 환상이다.”

토머스 존슨 미 해군대학원 문화·갈등연구소장은 10월23일 미 외교관계협회(CFR)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는 데도 150년의 기나긴 세월이 걸렸다”며 “아프간의 현 상황을 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은 ‘로야지르가’(부족 대표자 회의)를 통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특히 “저항세력 소탕작전(COIN)이 성공하려면 전 국민의 80~85% 정도가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며 “인기는 없어도 정당성만은 반드시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카르자이 대통령으로선 난망한 일이다.

그래서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향후 5년이, 지난 8년과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나마 최소한의 ‘정통성’마저 내팽개쳤으니, 그를 둘러싼 군벌의 부패한 입김은 더욱 강해질 터다. 카르자이 대통령이 이번 대선에서 부통령으로 지명한 타지크족 출신 거대 군벌 모하마드 카심 파힘은 이런 상황을 웅변한다. 지난 5월 파힘이 부통령 후보가 되자 ‘휴먼라이츠워치’(HRW)는 성명을 내어 “1990년대 내전 기간에 수많은 아프간인을 살육한 최악의 군벌인 파힘이 아프간 정부의 핵심으로 재등장하는 건 역사적 후퇴”라고 비판했다.

“아프간 민중이 두 개의 강력한 적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하늘에선 점령군이 폭격을 퍼부어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하고 있다. 땅에선 탈레반과 군벌들이 파시즘을 퍼뜨리고 있다. 외군군이 더 많은 민간인을 살상할수록, 그에 대한 저항도 늘어날 것이다. 미국과 나토가 자발적으로 물러가지 않는다면, 아프간 민중은 과거 러시아와 영국에 줬던 똑같은 교훈을 그들에게 줄 것이다. 두 개의 적과 싸우는 것보다 한 개의 적과 상대하는 게 우리에겐 더 쉽다.”

“아프간은 이미 내전 중”

탈레반 집권 시절 여학생들을 위한 비밀학교를 운영했고, 미국의 침공 이후엔 카불 정치권에서 부패한 카르자이 정권과 군벌에 맞섰던 말랄라이 조야 전 아프간 의회 의원은 지난 7월28일 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외국군이 철수하면 아프간이 내전에 휘말릴 것이란 주장은 말도 안 된다”며 “아프간은 지금도 내전 중이며, 오늘도 무고한 이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아프간을 돕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조야 전 의원의 조언에 귀기울일 일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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