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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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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미·일 빙글빙글 돌아가는데

중국 지렛대 삼은 북한, 전방위 유화책…
MB 정부는 정상회담 사전접촉설 속 제자리 빙글빙글
등록 2009-10-29 14:22 수정 2020-05-02 04:25

고 김일성 북한 주석은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1912년 4월 태어났다. 그의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42년 2월생이다. 2012년은 김 주석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김 위원장이 70살을 맞는 해다. 북에선 ‘떨어지는 해’를 중시한다. 일찌감치 그해에 맞춰 “강성대국의 대문을 활짝 열겠다”고 공언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10월10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와 한·중·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손을 맞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대통령이 10월10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와 한·중·일 정상회담을 하기에 앞서 손을 맞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강성대국’은 작지만 강한 나라를 뜻한다. 그 바탕은 역시 안보와 경제일 터다. 안보는 다시 나라 안과 밖의 문제로 나눌 수 있다. 나라 안의 안보 문제는 권력 승계로 모아진다. 2012년이 가지는 ‘상징성’ 탓에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 구도가 그해에 공식화할 것으로 본다. 나라 밖의 안보 문제는 이미 어느 정도 갈피를 잡았다. 2차 핵실험을 통해, 잠정적이나마 ‘핵 보유국’ 행세를 할 수 있게 된 게다. 최고 수준의 억지력·방위력을 갖췄으니, 어떤 외부의 위협도 두려울 게 없다. 대북 협상에 회의적인 이들이 “적어도 2012년까지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의 대북 지원으로 유엔 제재 힘 잃어

경제는 어떨까? ‘최악의 상황’이란 건 세계가 알고 있다. ‘강성대국 원년’까진 시간이 많지 않다. 손에 쥔 게 워낙 없으니, 스스로 이뤄낼 수 있는 일에도 한계가 있다. 외부의 지원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김정일 위원장도 통감하고 있을 터다.

방법은 네 갈래다. 첫째, 전통적 우방인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는 게다. 이를 위해선 핵실험과 6자회담 불참 등으로 서먹해진 북-중 관계 복원이 선행돼야 한다. 둘째, 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등 국제 금융기구에 가입해 차관을 끌어오는 방식이다. 북-미 관계 진전이 전제가 될 터다. 다음으로, 북-일 관계 정상화를 통하는 길도 있다. 북한과 일본은 아직 ‘전후 처리’를 매듭짓지 못했다.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은 남쪽에서도 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됐다. 마지막으로 남쪽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다. 이미 그 ‘맹아’도 싹을 틔웠다. 금강산과 개성공단이 그것이다. 남북관계가 나아진다면, 단기간에 남쪽 자본의 대북 직접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다.

‘안보는 어느 정도 다잡았다. 문제는 경제다.’ 북이 최근 전방위 외교를 선보이며, 적극적인 유화 행보를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 시작은 북-중 관계 복원이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9월18일 방북한 다이빙궈 중국 국무위원과 만나 북핵 문제를 “양자 또는 다자회담으로 풀자”고 말했다. 6자회담 주최국인 중국에 대한 ‘배려’였다. 10월4일엔 방북한 원자바오 총리 일행을 공항에서 직접 영접하는 등 각별히 예우했다. 이튿날 원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도 김 위원장은 6자회담 복귀 가능성을 더욱 구체적으로 내비쳤다. 과 이 10월6일 전한 김 위원장의 발언을 들어보자.

“조-미 양자회담을 통해 조-미 사이의 적대 관계는 반드시 평화적 관계로 전환돼야 한다. 우리는 조-미 회담의 결과를 보고 다자회담을 진행할 용의를 표명했다. 다자회담에는 6자회담도 포함돼 있다. …조선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다. 조선반도 비핵화 목표를 실현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변하지 않았다.”

장핑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과 천더밍 상무부장 등 중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을 대동하고 방북길에 오른 원자바오 총리의 ‘화답’도 시원시원했다. 원 총리 방북 기간에 북-중 두 나라는 △경제원조에 관한 교환문서 △경제기술협조협정 등 폭넓은 경제협력 방안에 합의했다. 유엔 차원의 대북 제재는 이로써 사실상 의미를 잃게 됐다. 중국이 ‘몸’으로 이를 웅변한 셈이다. 그리고 북-중 관계는, 완벽히 복원됐다.

북-미 샌디에이고 접촉 주목

북-미 협상도 본궤도에 오르고 있다. 6자회담 북쪽 차석대표인 리근 외무성 미국국장이 10월26~27일 미 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동북아협력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10월23일 뉴욕에 도착했다. 리근 국장은 행사에 앞서 ‘뉴욕 채널’을 통해 북한이 초청 의사를 밝힌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 특별대표 방북 문제를 포함한 북-미 현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또 샌디에이고 행사엔 6자회담 미국 쪽 수석대표인 성 김 국무부 대북특사가 참석한다. 대화는 사실상 이미 시작된 게다.

아직 가시적인 움직임은 없지만, 북-일 관계 역시 변화의 조짐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가 취임한 이튿날인 9월17일 북한의 대외채널인 은 “조-일 양국이 평양선언을 존중하고 그를 준수 이행해간다면, 양국 간의 현안은 지체 없이 해결되고 관계 정상화를 향한 긍정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날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방북해 김정일 위원장과 양국 관계 정상화 방안을 뼈대로 한 ‘조-일 평양선언’에 합의한 지 꼭 7년째 되는 날이었다.

북의 ‘선창’에 일본도 발빠르게 ‘화답’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9월24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평양선언에 입각해 현안을 풀고, 국교 정상화를 도모하겠다”며 “북한이 전향적이고 성의 있는 행동을 취한다면 일본도 전향적으로 대응할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하토야마 총리는 지난 10월10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일 3자 정상회담에서도 북-일 관계 개선 의지를 재차 내비쳤다. ‘통’하고 있다는 얘기다. 일부 전문가들이 “김정일 위원장이 조만간 일본 쪽이 요구해온 ‘납치 문제 재조사’를 수용하면서, 북-일 대화의 물꼬를 틀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은 건 남과 북이다. 외부 환경은 ‘최적화’로 수렴하고 있다. 최근 잇따라 새나오는 ‘남북 정상회담 사전 접촉설’을 예사롭게 넘기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의 모호한 태도에도, 남과 북의 ‘접촉설’은 ‘사실’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한국방송 등이 보도한 ‘싱가포르 접촉설’에 대한 청와대 쪽의 “현재로선 확인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설명은 ‘만난 건 사실이지만, 합의된 건 없다’는 말로 받아들일 만하다.

고 김대중 대통령 조문단 파견을 시작으로 지난 10월14일 황강댐 무단방류 사건에 대한 ‘유감 표명’에 이르기까지, 대화에 더 적극적인 건 북쪽이다. 왜? 북-미 협상을 통해 일정한 합의를 이뤄내면, 그 이행 책임은 어차피 6자회담 참가국이 고루 나눠져야 한다. 이때 남쪽이 어깃장을 놓으면 합의사항 이행이 순탄치 않을 수 있다. 북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중·미 양국도 남북 대화 재개를 촉구하고 있다. 설령 대화에 실패하더라도, 이를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남쪽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카드’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경론 주도 땐 외교적으로 고립될 수도

우리 정부는 어떨까?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10월23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정상회담이 가능한가’를 묻는 질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북핵 문제 해결”이라고 말했다. 남북 대화 재개의 걸림돌이 돼온 ‘선 핵포기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게다. 그럼에도 ‘정상회담’과 관련한 소문의 꼬리는 잘라내지 않고 있다. 현 장관은 이날 ‘정상회담 사전 접촉설’에 대해 묻는 의원들의 잇따른 질문에 “아는 게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앞선 정부에서 외교·안보 고위직을 지낸 한 인사는 상황을 이렇게 분석했다.

“북쪽이 대화에 적극성을 보이는 건 ‘대북 압박이 먹혔기 때문’이라고 보는 분위기가 정부 안에 남아 있다. ‘시간은 우리 편’이란 근거 없는 낙관론도 여전해 보인다. 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외부 환경이 변했다. 중·미·일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자칫 외교적 고립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그러니 ‘일단 가서, 할 말을 하면 된다’고 봤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실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여기까지가 전부일 공산이 크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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