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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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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돈’ 곁눈질하는 국가장학재단

8천억원 사회 환원으로 만든 삼성장학재단 삼키려 표적감사·이사진 교체 등 집요한 개입 흔적
등록 2009-10-20 13:46 수정 2020-05-03 04:25
5·16 쿠데타 뒤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는 고 김지태 삼화고무 사장의 부일장학회를 강제로 국가에 헌납하게 했다. 김 사장은 부일장학회 땅 10만 평과 주식 100%, 한국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100%를 군사정권에 넘겼다. 부일장학회는 1982년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씨의 이름을 한 자씩 따 정수장학회로 바뀌었다. 서류상 자진 납부한 것으로 돼 있지만, 김 사장의 유가족들은 군사정부가 빼앗아갔다고 주장해왔다.
‘삼성 돈 곁눈질하는 국가장학재단’

‘삼성 돈 곁눈질하는 국가장학재단’

이명박 정부가 친서민 행보를 위해 삼성그룹이 조건 없이 사회에 헌납한 장학재단에 외압을 가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과정에서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을 밀어낼 때처럼 ‘공조직 동원 → 표적감사 → 이사회 교체 → 이사장 교체’ 방식이 고스란히 적용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시작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2007년 11월 이명박 대통령 후보는 대선 공약 중 하나로 ‘글로벌 인재양성 및 대학경쟁력 강화를 위한 맞춤형 국가장학제도 구축’을 내놓는다. 국가장학재단을 설립해 경제적 여건에 관계없이 누구나 의지와 능력에 따라 고등교육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재단이 설립되면 구체적으로 대학 학자금 지원사업을 맡는다. 상고 출신의 이 대통령이 어렵게 대학에 입학해 고학한 성장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이 대통령은 올해 신년 국정연설에서도 “돈 없어서 공부 못하는 사람은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 저의 확고한 신념입니다”라고 말했다.

국가장학제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구체화했다. 2008년 2월 인수위는 국가장학제를 192개 국정과제의 하나로 선정했다. 당시 교육 분야는 이경숙 인수위원장, 이주호 사회문화분과위원회 간사(현 교육과학기술부 차관), 천세영 사회문화분과위원회 전문위원(전 청와대 교육비서관) 등이 호흡을 맞췄다.

“삼성 돈 갖고 올 수 있을 것”

하지만 재단을 설립하려면 밑천이 필요했다. 이들이 어떻게 ‘밑천’을 마련하려 했는지는 한국장학재단 설립준비위원회 녹취록에서 엿볼 수 있다. 한국장학재단 설립준비위원회 1차 회의록(2009년 2월6일)을 보면, 천세영 전 비서관(한국장학재단 설립준비위원)은 “삼성장학재단이 갖고 있는 7500억원은 엄밀히 따지면 여전히 삼성이 갖고 있는 형태이므로, 사회적 명분에 의해 한국장학재단이 설립되면 재단으로 갖고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천 전 비서관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래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작은 2005년 7월 ‘삼성 X파일 사태’였다. 삼성의 전 방위적 로비 실태가 담긴 안기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이 공개됐다. 2006년 2월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대국민 사과의 뜻으로 8천억원을 사회에 조건 없이 환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해 10월 ‘소외계층과 저소득계층의 교육 기회 확대’를 목표로 ‘삼성고른기회 장학재단’(삼성장학재단)이 출범했다. 삼성장학재단은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우리 사회의 교육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춰 사업을 펼쳤다. 저소득층 아동·청소년에게 멘토를 선정해주는 멘토링 장학사업, 대안학교나 각 지역 공부방 등을 지원하는 배움터 장학사업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삼성장학재단 출범 뒤 재단 이사들은 독립적인 운영을 위해 참여정부의 교육부 공무원 출신 인사들을 배제하고 사무실 규모도 축소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왔다.

삼성장학재단의 한 이사는 “애초 이사들이 재단 이름에서 ‘삼성’을 떼버리자는 논의도 했다. 하지만 기금을 삼성이 지원했고 삼성의 브랜드가 붙어야 앞으로 다른 대기업도 사회공헌에 더 나서게 될 것이라는 판단으로 삼성 브랜드를 그대로 가져갔다. 삼성의 이름으로 수천 명의 공부방 아이들을 지원했으니, 삼성 내부에서도 평이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장학재단에 ‘보이지 않는 손’은 서서히 뻗쳐온다. 2009년 2월11일치 는 ‘삼성 환원 8천억, 한국장학재단에 편입 추진’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교육과학기술부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 보도했는데, 공교롭게 한국장학재단법 통과와 이주호 교육부 차관 임명 직후였다.

재단 해산 쉽도록 정관 삭제 요구

그 뒤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3월9일 서울시 중부교육청은 뜬금없이 삼성장학재단에 공문을 보내 ‘재단 해산 정관’의 삭제를 요구했다. 삼성장학재단 정관 36조(해산)는 “이 법인은 해산하고자 할 때에는 이사 정수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감독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단, 설립자의 의사에 반하여 해산할 수 없다”라고 돼 있다. 이 정관이 삭제되면 이사회 결정에 따라 언제든 해산이 가능해진다. 이사회만 장악하면 한국장학재단으로 합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삼성장학재단이 강하게 반대해 정관 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삼성이 현 정권에 시달린 흔적은 여럿 포착된다. 삼성이 ‘사회에 환원한 기금이어서 재단 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고 선을 긋자, 청와대 쪽에서 삼성의 한 사장을 직접 불러 종용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지난 5월 출범한 한국장학재단의 1대 이사장을 맡은 이경숙 전 인수위원장도 나선다. 이 이사장은 5월22일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만났다. 삼성장학재단 관계자는 “이 이사장이 이 자리에서 삼성이 장학재단에서 손을 떼고 재단을 정부에 편입시키도록 종용하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삼성은 “장학재단은 삼성이 관여하고 있지 않으며, 이 이사장이나 청와대 쪽 인사와 삼성 임원들이 만난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삼성장학재단 사태 일지

삼성장학재단 사태 일지

하지만 이경숙 이사장은 10월12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국정감사장에 나와 “장학재단 공간이 필요한데 삼성생명 본관이 비어 있다고 해서 찾아갔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이 이사장은 6월16일 와 한 인터뷰에서도 “민간 장학재단은 우리 정보를 갖다쓰면 되기 때문에 우리와 연계하면 더 좋아질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한국장학재단에 수탁을 하면 얼마든지 도와주겠다. 그래서 지금 민간 재단 이사장들도 만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경숙 이사장, 민간 재단 접촉 시인

삼성을 통한 해결이 여의치 않자, 감사가 등장한다. 6월18일 갑자기 서울시교육청은 삼성장학재단에 대해 감사를 벌인다. 서울시교육청은 2005년부터 해마다 900여 개 장학재단 가운데 16~18개를 뽑아 정기적인 감사를 벌여왔다. 주로 사업 실적이 저조하거나 지역 교육청이 본청에 감사 요청을 하는 등 문제가 있는 법인이 대상이었다. 그런데 올해 감사에선 ‘2008년 법인결산서 기준 기본 재산 150억원 이상 보유 법인 중 최근 4년 이내 본청 감사를 받지 않은 법인’으로 감사 대상을 정하면서 삼성장학재단이 포함됐다.

그러나 감사에서 걸린 게 없었다. 감사 결과는 “공익 법인으로서의 사회적 사명과 책무에 충실하며, 공공성 및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관련법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준수할 뿐만 아니라 (중략) 장학사업 집행 및 재단 운영 전반에 걸쳐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음”으로 돼 있다.

그러다 언론이 갑자기 등장한다. 지난 7월 말 발간된 8월치는 ‘친노·좌파 인사가 핵심 관계자로 참여’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은 신인령 이사장을 비롯한 삼성장학재단의 일부 이사와 평가위원이 친노·좌파 인사라고 물고 늘어졌다. 이에 대해 한 삼성장학재단 이사는 “사전 정지작업으로 느꼈다. 9월에 임기가 끝나는 이사를 물갈이하기 위한 언론 플레이라고 여겼다. 언론까지 동원한 걸 보면, 단순히 교과부 차원에서 진행된 일이 아니라 그 윗선에서 뭔가 일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 뒤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의 노골적인 이사회 장악 시도가 본격화된다. 8월21일치 삼성장학재단 이사회 회의록을 보면, 신인령 이사장은 “(서울시교육청은) 전 정부에서 선임된 이사들이므로 임기 만료된 이사들은 현 정부에서는 연임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같은 달 24일 회의록에서도 신 이사장은 “교육부 쪽에서는 임기 만료 임원 모두를 교체하기 위한 7명의 명단을 준비해뒀다. 적어도 공석인 2명의 자리라도 추천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사장 승인 열흘 만에 재선임 지시

결국 에서 친노·좌파로 지목한 한 이사와 공무원 출신 이사가 사퇴한다. 사퇴한 이사는 “한 사람도 사퇴하지 않으면 재단 흔들기가 더 심해질 것 같아 재단의 안정을 위해 자진 사퇴했다”고 밝혔다. 이틀 뒤인 26일 이사회에서 손병두 한국방송 이사장과 신영무 변호사가 삼성장학재단 이사로 선임됐다.

하지만 삼성장학재단 장악 시나리오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손병두 이사를 재단 이사장에 앉히기 위해 무리한 일들이 벌어졌다. 지난 9월7일 신인령 이사장 등의 임원 취임을 승인한 서울시 중부교육청은 열흘쯤 뒤인 18일 돌연 “임원 취임 승인서를 정정한다”며 신인령 이사장을 ‘이사’로 바꾼 뒤 “새 이사장을 선임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손병두 이사는 10월12일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손 이사장은 삼성장학재단에 들어간 지 두 달도 채 안 돼 이사회를 장악한 셈이다.

왜 이처럼 무리하게 삼성장학재단을 장악하려 했을까? 지난 5월 한국장학재단 출범 뒤 교과부는 운용 기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내년부터 취업 후 상환 대학 학자금 대출을 시행하려면 막대한 재원이 드는데, 채권을 발행해 이를 마련해야 한다. 따라서 삼성장학재단이 한국장학재단에 편입되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는 분석이다.

정치권에선 청와대의 특정 라인이 이번 사태를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야당 의원은 “민정과 정무 라인에서 조직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청와대 교육 라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고 들었다. 청와대 정무 라인에서 MB의 서민 행보를 기획했는데, 이를 뒷받침하려면 실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부자 감세와 4대강 사업으로 재정은 파탄났다. 재정에 부담 주지 않고 서민 행보를 할 수 있는 방안을 찾다 보니 삼성장학재단이 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야당 보좌관은 “한나라당의 한 실세 의원도 ‘이건 지나치다’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교과부 실무자가 교과부 장관에게 ‘정치적으로 커질 위험성이 있으니 장관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진언했다는 말까지 나왔다”고 전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삼성은 발언을 자제하고 있다. 재계의 한 임원은 “삼성이 장학재단 사업의 투명성을 통해 그룹 이미지를 되살려놓으려 했는데 이런 일이 불거졌으니 삼성으로선 불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기업이 정권에 뭐라고 말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소득층 지원사업 축소 가능성”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삼성교육재단 관계자는 “손병두 이사장이 재단 내부 이사의 3분의 2를 장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분간 여론 추이를 지켜보다 국민의 관심이 멀어지면 저소득층 교육 지원사업 등을 축소하는 대신 MB식 정책에 맞는 교육 장학사업 콘셉트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손병두씨가 이사장이 된 것에 대해 여권에서는 삼성 부사장 출신인데 무엇이 이상하냐고 말하지만, 삼성장학재단은 손병두씨를 이사장으로 원하지 않았다”면서 “삼성장학재단을 장악하는 과정에서의 정부 외압과 협박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7년 5월2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정수장학회 헌납 사건과 관련해 ‘강탈’이라고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글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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