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교과서에 한 전문가 칼럼이 실려 있다.
“청소년이 말하는 태도에서 무엇보다 큰 특징의 하나는 버릇이 없고,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말을 예사로 쓰고 욕설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어른이 부르면 ‘왜요’ 하고 볼멘 표정이고, 말을 하면 ‘그게 아니고요’라고 이유를 말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같이 천방지축 날뛰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말버릇이다.”
‘청소년의 언어생활’을 ‘전문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다.
고등학생 대상의 한 사회 교과서에는 이런 삽화가 있다.
한 남자, 머리를 긁적이며 “내년에 월급이 5% 인상되니 생활이 좀 나아질 거요”.
앞치마를 두른 한 여성, 바가지를 긁는 표정으로 “무슨 소리예요. 물가는 8%나 오른다고 한단 말이에요”.
‘실업과 물가불안’ 소단원이다.
중학교 2학년 도덕책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직업생활에서의 게으름은 단순히 나쁜 습관일 뿐만 아니라,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근로자와 기업인의 화합과 협력’ 단원이다.
청소년은 날뛰고, 게으름은 죄악이다?지식의 결정체라 보는 교과서가 ‘인권침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때론 가르치고 조장한다. 중·고등학생 50명과 현장 교사 34명이 집어낸 대목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모니터단을 구성해 4개월가량 톺았다. 이를 토대로 지난 10월7일 인권위에서 ‘인권 친화적 교과서 집필 기준 모색을 위한 워크숍’이 열렸다. 제언이기에 앞서 성토이고, 성토이기 전 반성이다. 지적한 대목 일부는 자신의 상식을 대변해왔던 것인 까닭이다.
“상식의 틀을 깨며 사고를 넓혀간다는 면에서 (보람이) 상당했어요.” 모니터단에 참석한 한 남성 교사는 그러면서 “한편으론 저명 인사들이 모든 지식을 집약해놓아 비판이 금기시되던 것을 깨가는 쾌감도 있었다”고 말한다.
모니터단은 크게 다섯 갈래의 ‘상식’을 비틀며 교과서의 삽화, 내용, 서술 방식을 분석했다. △남녀·인종 등에 대한 반차별적 관점 △장애인·외국인 등 소수자에 대한 편견 △사회적 갈등에 대한 편향성 △ 청소년 입장에서 살펴본 청소년을 향한 불평등 시선 △국제사회의 기준에 견준 한계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도식을 넘어 모니터단이 지적한 교과서의 숱한 결함들은, 이미 당대와도 맞지 않는 고정관념, 소수자 배제와 차별, 사회 갈등을 주류적 논리로 바라보는 편향성으로 관통된다. 사회 전반에선 이미 비판적·반성적으로 인식되는 대목들인 것이다.
현행 교과서는 특히 성역할에 대한 오랜 고정관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배우는 삽화에선 여성들만 앞치마를 두른 채 밝게 웃으며 음식을 준비한다. ‘함께하는 한가위’가 단원 제목이다. 영어 교과서마저 남녀의 직업을 1970년대 잣대로 경계짓고, 주방에서 요리하고 상을 차리는 이는 다들 여성이다.
인종(국가) 차별 또한 마찬가지다. 고등학생용 한 사회 교과서(ㄱ출판사)에는 “온실가스의 발생을 막기 위해 무역 제재도 불사해야 합니다. 개발도상국들도 환경기준을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좋은’ 미국·유럽연합과 “우리는 삼림밖에 없으니까 빚을 갚으려면 개발할 수밖에 없소”라고 말하는 ‘이기적인’ 브라질이 대립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도 다르다. 발제자 이선영 교사는 “미국이 온실가스를 많이 내고,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발표도 있다”며 “결국 후진국은 무지하고 비인간적이란 선입견을 갖게 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주류적 편견과도 동닿는다. 초등학교 5학년 대상의 도덕 교과서에는 이런 삽화가 있다.
“장애인복지관 설립 절대 반대!”
머리띠를 두른 주민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오른쪽엔 휠체어를 탄 노인이 맞세워져 있다.
“장애인 종합복지관 건립 계획이 알려지자, 근처 주민들이 집값이 떨어진다고 시 당국과 시 의회 등에 장소 변경을 요구하면서 집단으로 반대하였습니다. 시 당국은 결국, 처음에 지으려고 했던 장소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장애인 종합복지관을 짓는다고 합니다.”
책은 설명하고서 묻는다.
“장애인 종합복지관이 세워지면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점이 좋지 않을까요?”
이를 분석한 신홍철 교사는 “답은 공익을 위해 사익을 감내해야 하는 쪽으로 도출되겠지만, 애초 질문부터가 공정하지 않아 지역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건강한 시각을 갖기 어렵게 한다”고 우려한다. 이른바 ‘님비현상’을 다루면서, 왜 핵시설이나 쓰레기처리장이 아닌 장애인복지관을 사례로 드느냐는 것이다.
주류적 편견은 용어로 드러나거나 강화된다. “지역감정 발언이 극에 달하자 총선참여연대가 9일 각 당에 쳐들어가… 지역감정 자극을 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강제로 받아내는 준폭력 행위도 벌어졌다”(고1 , ㄷ출판사), “철도청은 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해 끊임없는 대화를 하고 건설부지로 책정된 토지의 일부를 동대문구 내의 학교와 공원 같은 공공시설을 짓는 데 제공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많은 보상 비용을 들이고서야 반대 운동은 잠잠해졌다.”(중3 , ㄱ교과서). 다들 불공정한 기술이라고 지적된다. 관점은 물론, 선택한 단어들만으로도 이미 선입관은 싹튼다.
삽화 통한 무의식적 이미지 주입 우려돼
결함들은 대개 지식이 아닌 이미지만 주입시킨다는 데서 첫 번째 위험성이 찾아진다. 특히 삽화에서 발견되는 오류가 적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이조차 빙산의 일각이다. 주제별 발제 뒤 자유토론에서 한 대학 강사는 “장애와 관련된 내용에서는 여전히 (삽화 등이) 사실과 다르거나 모호함이 많은데도 간과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과서에서 △장애인이 대부분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으로 획일화되거나 △그를 비장애인이 밀어주는 모습 등으로 고정관념을 심고 △시각장애인을 비장애인이 전방에서 붙잡고 이끄는 모습 등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가 완벽하다 해서 교육이 완전할 순 없다. 허종렬 서울교육대학 교수(사회교육)는 “교대와 사범대에서 (미래 교사를 위한) 인권이나 법과 관련한 강좌가 마련되지 않은 것이 본질적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한다. 현재 10개 교대에서 법학 전공 교수가 재직 중인 곳은 3개 대학에 그친다. 자신과 타인의 권리까지 지킬 수 있는 최소 장치로서의 법은 인권과 뗄 수 없다. 집필진·삽화가도 해당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까닭이다.
인권 학습이 초등학교 6학년 2학기가 돼서야 시작하는 점도 문제다. 미국은 유치원부터 가르치는 곳(위스콘신주)도 있다. 프랑스에서 중학교 2학년을 상대로 가르치는 의 단원 제목은 다음과 같다. ‘평등의 쟁취, 법 앞에서의 평등, 차별과 싸우다, 일상생활에서의 연대, 국제적 연대….’ 중학교 3학년이 되면 다음과 같은 단원 또는 주제를 배운다. ‘다운로드의 자유와 지적재산권, 통행의 자유와 파업을 할 권리, 무죄의 추정과 소송에 대한 권리, 조사를 받는 미성년자의 권리, 유럽 시민의 가치·권리·의무, 인권의 수호, 유럽의 소수민족 보호….’ 발제자 노의환 교사는 “(우리) 현행 교과서에는 국제사회가 제시하고 있는 ‘인권’ 단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사회과의 여러 단원 속에) 산재돼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2002년에도 개선안 건넸지만 흐지부지
인권위는 이번 실태분석 보고서를 전문 감수한 뒤 교육과학기술부에 전할 예정이다. ‘협의’가 안 되면 ‘권고’로 수위를 높인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인권위는 국내 최초로 현행 교과서의 반인권적 요소를 분석한 2002년을 기억한다. 교육과학기술부(당시 교육부)에 ‘개선’의 필요성을 담은 공고문도 전달되었다. 워크숍에는 교과서 편수 담당 과장이 정부 책임자로도 참여했다. 하지만 실무자가 바뀌고 주목을 받지 못하자 시나브로 묻혔고, 반영은 되지 않았다. ‘인권침해’ 혐의를 받는 교과서가 이번엔 오명을 벗을지 알 수 없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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