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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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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꺾인 ‘지혜의 여신’

위기 예측한 ‘미네르바’…
전문가·언론 역할 대신했건만 정권에 미운털 박혀 구속되고 ‘경방’ 황폐화돼
등록 2009-09-17 16:26 수정 2020-05-03 04:25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씨.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씨.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시작은 경제위기였다. 하지만 갈수록 언론과 민주주의의 위기로 치달았다. ‘미네르바’ 얘기다.

2008년 가을, 위기를 말해줄 사람은 없었다. 촛불시위를 간신히 짓밟은 정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른바 ‘386’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검찰이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경제정책 수장은 ‘질투의 경제학’이라며 이를 갈았던 종합부동산세를 어떻게 없앨 것인지 고민했다.

위기 실체·대안 밝힌 ‘인터넷 경제대통령’

그때 한 선지자가 아고라 광장으로 훌쩍 날아왔다. 미네르바다. 그는 다음 아고라에서 서브프라임 사태(미국발 금융위기)와 환율 급등, 리먼브러더스 파산 등을 정확히 예측하며 사이버 공간을 뜨겁게 달궜다. 당시 환율은 연일 폭등했다. 금리는 치솟았다. 물가마저 동시다발적으로 뛰었다. 주가는 폭락했다.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막막했다. 미네르바는 아고라 광장에서 이같은 불안을 풀어주고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미네르바 신드롬은 경제위기의 불안과 공포 속에 퍼져나갔다. 미네르바는 인터넷에서 ‘경제대통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리먼이 파산 신청을 하기 닷새 전인 9월10일 미네르바는 리먼 파산을 예측했다. ‘리먼 부도 → 미 증시 폭락 → 미 정부 재정 적자와 금융권 파멸 → 리먼 추가 구제금융 → 초장기 경기 침체’를 예시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한국은행의 10월30일 통화 스와프 협정 체결도 마찬가지였다. 미네르바는 10월9일 “이 모든 사태를 한 방에 해결할 올인 전략은 오로지 ‘미국 FRB 원-달러 통화 스와프’다”라고 명쾌하게 밝혔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합동 연차회의 개막을 약 일주일 앞둔 10월3일 미네르바는 “이 회의에 참석하는 강만수 장관과 이성태 한은 총재의 달러 스와프가 거부당할 경우 한국은 10월 하순부터 대대적인 역외 헤지 펀드의 추가 공격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하튼 강만수 전 장관은 성공했다.

미네르바는 날선 글솜씨와 각종 통계를 이용해 이명박 정권의 경제정책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한국 경제의 위기를 강조했다. “지금 돌아가는 판세는 한국 대통령이나 강만수 장관이 설친다고 수습이 되는 단계는 아니다. 이미 정책적 통제력 상실 수준으로 외국 애들은 보고 있다.”(10월24일 아고라 경제토론방)

한낱 인터넷 논객인 미네르바와 경제정책 당국의 수장인 강만수 전 장관은 정확히 대조를 이뤘다. 미네르바가 리먼 파산을 비롯해 물가폭등·환율상승·주가폭락 상황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동안 강 전 장관은 “위기가 과장됐다”는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정권이 국민에게 못해주는 걸 미네르바가 해주니 정권은 기분이 나빴나 보다. 국민과 시장은 인터넷 여론을 통제하려는 수사 당국과 금융위기 속에서 말 바꾸기로 일관한 경제부처의 오락가락 행보에 더 문제가 있다고 여겼는데 말이다. 미네르바는 올해 1월6일 체포됐고 4일 뒤 구속됐다.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는 게 검찰의 구속 근거였다.

미네르바는 상도 탔는데, 경제와 관련한 상은 아니었다. 언론과 관련한 상이었다. 그는 ‘권위 있는 1인 미디어’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아 지난해 말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이 선정하는 ‘제10회 민주시민언론상’ 본상을 받기도 했다.

돌아온 미네르바와 강만수

미네르바 구속 뒤 아고라 경제토론방(경방)은 황폐해져갔다. 경방 고수들은 블로그에 은둔하거나 다른 사이트로 떠나버렸다. 어떤 논객은 글 들머리에 ‘이 글은 소설이니 그냥 대충 보고 웃어버리라’는 얘기를 써놓는다. 이를 두고 어떤 누리꾼은 미네르바 구속 뒤 경방 글들이 자기 검열에 빠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누리꾼은 오히려 정부와 검찰에 대한 일종의 항의 또는 조롱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미네르바 박대성씨는 지난 4월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사회로 귀환했지만, 현재 검찰의 항소로 2심이 진행 중이다. 그가 되돌아온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보과 어떤 식으로 맞붙을지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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