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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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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활동보조인 횡포 분통 터지지만…

장애인에게 금품 요구하거나 불친절해도 교체 어려워
“정부가 활동보조인 교육 강화하며 수요 예측 실패한 탓”
등록 2009-09-11 17:51 수정 2020-05-03 04:25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세수하기, 밥 지어먹기, 이 닦기, 옷 입기, 집 밖에 나가기, 화장실 가서 일 보기…. 서울 수유5동에 사는 이광섭씨가 혼자서는 전혀 할 수 없는 일들의 목록이다. 심지어 그는 밤에 잠을 자다 등살이 배겨도 혼자 돌아누울 수 없다. 누군가 뒤집어줘야 한다. 선천성 뇌성마비 1급의 중증장애를 갖고 있는 탓이다. 그는 머리를 뺀 목 아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언어장애도 심한 편이다.

2년전 시작된 중증장애인 거동 돕는 서비스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인 이광섭씨가 입에 문 볼펜으로 휴대전화를 걸고 있다. 이씨에게 활동보조인은 손·발과 다름없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인 이광섭씨가 입에 문 볼펜으로 휴대전화를 걸고 있다. 이씨에게 활동보조인은 손·발과 다름없다. 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그런 그에게 2007년부터 국가가 시행한 장애인 활동보조 서비스는 ‘복음’이었다. 개인 돈을 내지 않아도 비장애인이 집에 찾아와 하루에 몇 시간씩 집안일은 물론 바깥 출입까지 도와주기 때문이다. 장애 정도를 보고 활동보조인 할당 시간을 판정하는 구청은 그에게 한 달에 230시간을 줬다. 하지만 다른 모든 중증장애인이 그렇듯,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 한 달 230시간은 그나마 턱없이 부족하다.

최근 이씨의 고민이 하나 더 늘었다. 활동보조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고 싶은데 여의치 않은 것이다. 어떤 보조인은 너무 불친절하고 또 어떤 보조인은 이씨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국민기초생활 수급자인 이씨가 한 달에 장애수당까지 포함해 국가에서 받는 돈은 모두 53만원에 불과하다. 불가능한 요구에 기가 질렸다. 활동보조인을 연결해주는 장애인센터 쪽에 교체를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새로 공급되는 활동보조인이 없어 바꿔주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센터 7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답은 매한가지였다. 9월1일 서울 국립재활원에서 만난 이씨는 “이런저런 이유로 나처럼 보조인을 바꾸고 싶어도 바꾸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주변에 엄청 많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보건복지가족부는 올해 초 전국의 모든 장애인센터에 지침을 내렸다. ‘3월 이후부터 장애인 활동보조인 교육을 받지 않은 보조인들이 투입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활동보조인으로 일하려면 60시간짜리 교육을 이수해야 했으나 현장에서는 실제로 상당수 보조인들이 교육을 받지 않은 채 활동을 해 왔다. 이 때문에 활동보조인 자질 시비가 끊이지 않자 정부가 교육을 강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교육을 받지 않고 활동하던 기존 활동 보조인들이 3월 말까지 교육을 받으려 갑자기 교육기관으로 몰리면서 올해치 교육 예산이 다 소진돼버린 데서 비롯됐다. 이 때문에 올해 들어 새로 활동보조인으로 일을 시작하려던 이들은 교육기관의 문을 두드려도 ‘올해는 강의가 끝났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즉, 애초 예산은 올해 들어 발생하는 신규 교육 수요를 목적으로 잡은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예산의 대부분이 교육을 받지 않고 활동하던 기존 보조인 교육에 쓰여버린 것이다.

서울에 있는 보건복지가족부 지정 5개 교육기관의 경우, 7∼8월까지 내부 예산을 쥐어짜듯 교육을 간간이 이어왔으나 신규 수요를 감당하기는 버거웠다. 이 때문에 새로 활동보조인을 하겠다는 이들은 교육을 받지 못해 현장 투입이 안 돼서 아우성치고, 서비스 받는 시간이 늘었거나 여러 이유로 보조인을 바꾸려는 중증 장애인들은 활동보조인을 제때 수급받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한 교육기관 관계자는 “우리 단체는 이미 교육을 마감했는데 활동보조인 교육을 받을 수 없냐는 전화가 요즘에도 한두 통씩 꾸준히 걸려온다”고 말했다. 장애인센터 쪽에도 ‘활동보조인을 섭외해달라’는 중증장애인들의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서울 강북에 있는 한 센터 직원은 “활동보조인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의 상황을 살펴 요일과 시간대별로 기존 보조인들의 투입 일정을 짜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보건복지가족부가 지난해 활동보조인 교육 예산을 잡으면서 2009년치 신규 교육과 기존에 교육을 받지 않고 활동하던 보조인들에 대한 정확한 수요 예측 및 예산 배정에 실패한 탓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교육 이수한 보조인은 적고 수요는 많고

보건복지가족부 장애인정책과는 이에 대해 “예산이 부족해 7월 말 이미 5억4700여만원을 전용해 투입한 데 이어 곧 2차로 전용한 예산을 추가 투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 장애인단체 관계자는 “보건복지가족부야 예산을 추가로 투입하면 된다지만, 그동안 서비스를 받지 못한 장애인들의 고통은 뭐란 말이냐”며 늑장 행정을 비판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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