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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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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플루보다 지독한 ‘신종 플루 신드롬’

치사율 0.2% 내외의 ‘치명적이지 않은 독감’…
정부의 잘못된 대응이 불안을 크게 증폭시켜
등록 2009-09-03 13:51 수정 2020-05-03 04:25

“중국 상해 공항에서는 비행기가 착륙할 때마다 하얀 가운에 마스크를 쓴 중국 검역원이 비행기에 탑승해 레이저 총 모양의 체온계를 승객들에게 겨누며 고열 환자를 찾는다. 고열의 ‘신종 플루 의심환자’가 발견되면 데리고 나가 격리 조사를 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입국 수속이 평균 40분가량 늦어지고 있다.”
“개학이 다가오자 신종 플루의 대규모 전염을 우려한 전국의 학교장들이 개학을 늦추거나 휴교를 신청한 가운데, 한 학부모는 TV 뉴스 인터뷰에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학은 했지만, 애를 학교에 안 보내려고요. 신종 플루 걸리고도 학교 나오는 애들 때문에 우리 애가 옮으면 어떡해요.’”
“야, 국민의 30%가 걸린다잖아. 그런데 정부에서 비축해둔 타미플루는 인구 5%의 양밖에 안 된대. 어디서 타미플루 좀 구할 수 없냐? 내 친구는 타미플루가 바닥나기 전에 일부러 감기에 걸려서 ‘신종 플루 의심환자’인 척해서 미리 타미플루 좀 받아놓겠다고 하던데. 아마 한두 달 지나면 한반도엔 ‘타미플루 대란’이 올걸!”

개학을 맞아 각급 학교에서 신종 플루 예방에 비상이 걸렸다. 신용산초등학교 교사들이 8월27일 오전 마스크를 한 채 등교하는 학생들의 체온을 재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개학을 맞아 각급 학교에서 신종 플루 예방에 비상이 걸렸다. 신용산초등학교 교사들이 8월27일 오전 마스크를 한 채 등교하는 학생들의 체온을 재고 있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사스는 11%, 스페인 독감은 2.5%

지금 대한민국은 신종 플루보다 더 지독한 ‘신종 플루 신드롬’을 앓고 있다. 8월 한 달 동안 50∼60대 남녀 3명이 신종 플루 감염으로 사망한 이후, 신종 플루에 대한 공포감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다. 게다가 이번 신종 플루의 대유행으로 미국에선 약 30만 명이 집중치료실에서 치료를 받을 전망이며, 어린이와 노약자를 중심으로 3만 명에서 최대 9만 명까지 사망자가 발생하게 될 전망이라는 미국 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의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신종 플루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확산되고 있다. (신드롬이 맞냐고? 예방 차원에서 타미플루를 미리 먹어두겠다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백신이 안 나와서 불안하다면 폐렴 백신이라도 먹겠다는 무모한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100%입니다!)

신종 플루(H1N1·Swine flu)는 돼지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변이를 일으켜 사람의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호흡기감염질환. 발열과 콧물, 기침, 인후통 등 전형적인 계절 인플루엔자와 유사한 증상을 일으키지만, 사람들 사이에 퍼진 공포감은 1918년 5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나 1968년 창궐했던 홍콩 독감을 연상시킨다(스페인 독감은 우리나라에서도 740만 명이 감염됐고, 그중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신종 플루가 ‘치명적인 독감’은 아니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현재 우리나라에선 4천 명 가까이 감염됐지만, 대부분 치료됐거나 통원 치료를 받고 있으며,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 수는 수십 명 정도다. 치사율은 0.2% 내외로, (8천 명이 감염돼 900명이 사망했던) 11%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바이러스나 2.5%의 스페인 독감은 물론, 평소 계절독감보다 오히려 낮은 수준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고위험군에 속한 50∼60대 3명이 사망했지만,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천식, 폐렴으로 인한 폐혈증 등에 의한 합병증이지 신종 플루 자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신종 플루에 대해 이처럼 전국적인 공포감이 확산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중첩돼 있다.

원래 ‘공포감’이란 상대가 막강할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일 때 발생된다. 실제로 발병률이나 치사율로만 따지면 높지 않지만, ‘전 국민의 30%가 감염될 것이다’ ‘미국 보고서 수치를 그대로 적용하면 한국에선 1천만 명이 걸리며, 그중 1만5천 명이 사망할 것이다’ ‘방학이 끝나는 9월부터 신종 플루 대유행(Pandemic)이 올 것이다’ ‘서울대병원이 거점병원을 거부했다’ 같은 언론 보도가 공포감을 확산하고 있다.

이 불확실성 속에는 정부의 안일한 태도와 늑장 대응이 한몫하고 있다. 정부가 확보해놓은 타미플루 양이 예상 발병률에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포감은 ‘타미플루 쟁탈전’을 낳았다. 발병률이 낮더라도 질병을 관리해야 할 정부의 태도가 미덥지 못하다면, 불안은 크게 증폭된다.

대한의사협회와 서울시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8월27일 서울광장에서 신종 플루 안내상담센터를 설치해, 시민들에게 손 씻는 요령을 알려주는 등 각종 상담을 해주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대한의사협회와 서울시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8월27일 서울광장에서 신종 플루 안내상담센터를 설치해, 시민들에게 손 씻는 요령을 알려주는 등 각종 상담을 해주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신종플루가 우리에게 남길 유산

광우병 사태를 떠올려보시라.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낮았지만, 그것이 전국적인 촛불시위를 불러일으킨 이유는 삶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먹을거리 관리’와 ‘위생 청결’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국민의 기대를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정부는 국민이 원하는 수준에 턱없이 모자란 대응을 하고 있고, 그것이 ‘불안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광우병 사태에 이어 이번 신종 플루 신드롬은 ‘우리나라는 결코 바이러스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인식’을 확대재생산할 가능성이 높다.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제목처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지 않던가! 사람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부족한 타미플루를 집에 비축해둘 이기적인 궁리를 하고 있고, 기침을 하는 친구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마스크로 입을 감싸는 예의 없는 태도를 버젓이 보인다. 학부모들이 자녀를 학교는 물론이요, 그 좋아하는 학원도 안 보내겠다고 할 정도이니, 신종 플루가 ‘독종’이긴 한가 보다.

여기에 병명도 한몫했다. 이번 ‘H1N1’형 인플루엔자 A 바이러스에 의한 독감에 대해 언론이 붙인 이름이 바로 ‘신종 플루’다. 인플루엔자 A 바이러스는 계속 변종을 만들어 끊임없이 신종을 양산할 텐데, 다음에 나올 변종 바이러스는 뭐라고 부르려고 ‘신종’이라는 이름을 덜컥 갖다 붙였을까? 무엇이든 ‘신종’은 강력하고, 치사율이 높을 것 같으며, 치료약이 없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아마도 이번 신종 플루는 올가을과 겨울을 넘기면서 수만 명의 감염자를 발생시킬 것이며, 그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망자를 초래할 것이다. 매년 독감으로 사망하는 사람 수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신종 플루의 공포감은 우리에게 끔찍한 악몽을 선사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앞으로 신종 플루가 우리에게 남길 유산은 무엇일까?

사실 매년 독감 예방접종을 하는 사람들 수가 그동안 많지 않았다(그중 절대다수는 유아·소아·청소년들이다!). 그러나 전 국민과 언론이 과학자에게 신종 플루 백신 개발을 종용하고, 정부에 타미플루 특허권을 정지해달라며 카피약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보면서 앞으로는 철마다 독감백신 접종을 하는 성인들이 꽤 늘어날 것으로 기대해본다.

한국인의 위생 관념도 크게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2003년 무렵 우리나라에서도 병원에만 있던 손소독제를 생활용품 회사들이 ‘핸드 새니타이저’란 이름으로 상용화했다. 그러나 구매자가 없어 대부분 실패했다(물론 그때 끝까지 버틴 다국적 기업은 이번에 호재를 맞았다!). 그러나 이번 신종 플루를 계기로, 비누로 손을 씻는 문화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을 ‘소독’하는 위생 수준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지 않을까 싶다(요즘은 손소독제를 없어서 못 판다고 한다!). 특히 학교와 공항, 레스토랑 등 공공장소에 손소독제를 비치하는 문화가 생길 것이다.

또 하나는, 앞으로는 제발 ‘한국인은 김치를 많이 먹어 바이러스에 강하다’ ‘한국인은 마늘을 많이 먹어 신종 플루에 잘 안 걸린다’ 같은 언론 보도에 현혹되지 마시길. 언론은 오늘도 ‘대책 없는 공포감’을 조장하며 정부를 질책하지만, 신종 플루가 생각만큼 기승을 부리지 않고 사그라지면 이내 보도할 것이다. 김치가 우리는 구했다고. 그러나 속지 마시라. 내년에 다시 기승을 부리면 언제 말을 바꿀지 모른다.

‘신종’은 언제나 ‘오래된 종’이 된다

끝으로,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예측하건대, 내년에는 바이오벤처들의 주가가 크게 오를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정보기술(IT) 벤처 붐이 일면서 IT 회사들의 주가를 크게 오르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Y2K’였다. 2000년 1월1일이 되면 전세계 컴퓨터의 날짜 체계가 말썽을 일으켜, 은행·물류·보안 등 컴퓨터로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재앙이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이 전세계인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면서 IT 붐을 만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인간을 한순간에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인식은 바이오 산업의 중요성을 전 국민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야말로 전염병과의 투쟁사이기도 하다. 식문화가 천박해지면서 동물로부터 옮겨온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고, 전세계적 교류와 왕래가 잦아지면서 바이러스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퍼져갈 것이다. 아마도 학교와 학원·일터·백화점·대형마트·쇼핑몰·병원은 바이러스의 ‘행복한 온상’이 될 것이며, 값비싼 검사비와 치료비를 내지 못할 가난하고 고단한 사람들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인류는 대재앙을 극복하면서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의학이 질병을 앞서가는 법은 없다’는 사실이다. 의학이 발전하듯, 바이러스도 끊임없이 진화한다. 우리가 ‘신종’이라고 믿는 것들은 이내 더욱 강력한 것들에게 밀려 ‘오래된 종’이 되고 만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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