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수(86)씨는 2년 전 쓰러졌다. 당뇨와 고혈압 합병증이었다. 쓰러지기만 세 번째다. 이번엔 중풍까지 같이 왔다. 숟가락도 들지 못하던 그를 아내 허처녀(80)씨가 정성껏 보살폈다. 그 정성을 하늘이 알았는지 올해부터 박씨는 숟가락도 잡고 글씨도 읽는다. 하지만 매일같이 집에 들르는 부녀회장에게 “누구여?”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박씨는 찾아간 기자에게도 “누구여?” 하고 물었다. 잘 듣지 못하는 그에게 신문을 건네며 기자라고 말했다. 박씨는 대뜸 “대중이 아니여?” 한다. 신문 1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위독’이란 기사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의 얼굴 사진이 실려 있었다. 박씨가 쭈글쭈글한 검지로 사진 속 얼굴을 만졌다. 박홍수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로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났다.
신안 앞바다 연꽃을 닮은 섬
이곳은 하의도, 전남 신안군의 1004개 섬 중 하나다. 섬 크기로는 그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쾌속선을 타면 1시간10분 만에 닿는 곳이다. 섬이 연꽃 모양이라 하여 ‘연꽃 하(荷)’자 하의도다. 배에서 내리면 잘 정돈된 해안가 제방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지금은 1030가구, 1996명이 이곳에 산다. 주민의 88%인 905가구가 농사를 짓는다. 섬 어디서든 푸른 논밭을 볼 수 있다. 군데군데 천일염전도 있다. 1924년 1월, 여기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태어났다. 아버지 김운식씨와 어머니 장수금씨 사이의 둘째아들이었다.
8월9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김 전 대통령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하의도에도 전해졌다. 주민들은 기자에게 “대통령 워쩌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박홍수씨 부부도 걱정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이젠 이 사람은 죽어도 후회는 없어. 근데 김대중 대통령은 좀더 살아야 쓴당께. 아직 할일이 많잖여.” 부인 허처녀씨가 남편 박홍수씨를 일으켜 앉히며 말했다. “응, 대중이 안 죽어야 할 텐디.” 순간, 박씨의 정신이 맑아졌다. 김 전 대통령을 만나고 싶으냐는 물음에 “그럼!” 하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고는 옛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소년 김대중은 공부를 잘했다. 소년 박홍수는 싸움을 잘했다. 박씨는 “참말로 예쁘고 잘생겼었재”라며 김 전 대통령을 추억했다. 싸움을 잘해 ‘겡까도리’(쌈닭을 뜻하는 일본말)라고 불렸던 박씨도 김 전 대통령만은 때리지 않았다. “공부를 잘했기 때문”이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하의공립보통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목포로 전학을 갔다. 그때가 1936년 9월3일, 김 전 대통령이 12살 때다. 하의도는 김 전 대통령에게 순수한 유년 시절의 전부다.
목포에 가서도 소년 김대중은 지역 명문인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상고)에 진학했다. 싸움을 잘했던 소년 박홍수는 전남 순천으로 건너가 경찰이 됐다. 월등면의 월등지서 차석으로 있던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지서장이 전투에 동원돼 박홍수가 지서장 대리를 했다. 때마침 상부에서 ‘보도연맹’ 34명을 처치하고 후퇴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당시 보도연맹은 좌익 활동이 의심되는 ‘요시찰 대상’을 통칭했다. 박홍수씨는 고민 끝에 아무도 죽이지 말고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보도연맹원을 풀어주며 “훗날 우리가 다시 월등에 돌아올 때 당신들도 우릴 죽이지 말고 가라”고 당부했다. 향토지리연구소가 엮은 는 박홍수씨의 결정 덕분에 “6·25 동란 중 월등에서는 부상자가 없었다”고 기록한다.
DJ 뉴스 나오면 볼륨부터 높여
박홍수씨가 친구 김대중을 다시 만난 건 1995년 6월 하의도에서였다. 어느새 둘 다 일흔이 돼있었다. 박홍수씨는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었다. 당시 김대중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하고 정계를 은퇴한 상태였다. 그가 하의도를 찾자 동창들이 전부 모여 사진을 찍었다. 부인 허씨가 그때 찍은 사진을 꺼내와 박씨에게 건넸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7월18일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리고 1998년 2월, 마침내 친구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이 된 친구는 자신의 동창 박홍수에게 취임식 초청장을 보냈다. 당시만 해도 몸이 가벼웠던 박씨는 한걸음에 서울로 갔다.
박씨 부부는 텔레비전을 열심히 본다. 뉴스에 김대중 전 대통령 소식이 나오면 볼륨을 높이고 집중한다. 1973년 박정희 정권 시절 일본에서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1980년 전두환 정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도 부부는 TV를 보며 많이 울었다. 지난 8월11일에도 부인 허씨는 “김영삼씨도 그러는 거 아니재.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한테 화해한 거네, 아니네 할 수가 있어?”라고 말했다. 이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재진에게 “(우리가) 화해했다고 봐도 된다”고 말했다는 소식이 뉴스에 나왔다.
하의도에서 ‘김대중’이란 이름은 자랑이고 사랑이다. 김 전 대통령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우여곡절을 겪을 때마다 마을 주민들도 가슴 졸이며 응원했다. 1997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됐을 땐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꽹과리를 치며 우는 사람도 있었고 밤새도록 술과 고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재임 시절 고향 방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섭섭했다. 그러다가도 지난 4월24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14년 만에 하의도를 찾았을 땐 마을 부녀회가 나서 음식을 준비하고 주민 수백 명이 선착장으로 마중을 나왔다.
당시 하의도 부녀회장 정연순(45)씨는 음식 준비를 총지휘했다. 1500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며칠 동안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 특별히 이 지역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 돌 위에 낀 ‘독옷’으로 묵도 만들고 칠게 튀김, 연포탕, 홍어 등을 준비했다. “김대중 대통령 드실 음식을 한다니 정말 기쁘고 뿌듯”했다. 그는 “그때도 잘 못 드셨는데 위독하시다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부녀회는 현재 하의도의 기초생활수급자와 독거노인들을 위해 면사무소 앞 자원봉사의 집에서 점심 식사를 제공한다. 8월12일 식사를 하기 위해 모여든 노인들 사이에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 걱정이 오고갔다. ‘하의도 큰애기’였던 정덕진(70)씨는 “김대중 대통령이 인기가 좋았재, 나도 좋아했당께”라면서 웃었다. “이희호 여사가 화장하고 예쁘게 옆에 서있으면 복을 타고 났는가, 질투가 난다”는 말에 식사를 하던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 전 대통령과 한 동네 사람이라는 강수덕(75)씨는 “그 사람을 보면 우리 동네 가족이다, 하는 느낌이 항상 있다”며 “아프다니까 걱정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하의도 농민 정신으로 굴하지 않았다”
친척들도 그동안 반가움 반, 섭섭함 반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6촌 동생 김영단(64)씨는 “오빠가 대통령 됐을 때 한 번이라도 왔으면 좋았을걸…”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씨의 남편 윤홍의(70)씨는 목소리를 좀더 높였다. “전세계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고향 방문 한 번 안 한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밖에 없을 거여”라고 말했다. 하지만 곧 김씨가 김 전 대통령 편을 든다. “근데 오빠가, 여기 특별히 가족이 없기도 허고…. 오빠가 있응께 든든할 뿐이지 특별히 바랄 건 없재라.”
이제는 안타까움 뿐이다. 어서 건강이 회복되기만을 바란다. 8월10일, 혈압이 떨어져 손발이 찬 김 전 대통령에게 이희호씨가 손수 벙어리 장갑을 짜서 끼워줬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김영단씨는 “원래 오빠는 좀 툭툭한 성격이고 말도 별로 없어라. 근데 이희호 여사는 참 사분사분하지라”라며 ‘새언니’ 자랑을 했다. 김씨 안방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만나 손을 맞잡은 사진이 박힌 시계가 걸려 있다. 자랑스러움과 그리움이 절절하다.
박상명(50) 부면장은 지난 4월 하의도를 찾은 김 전 대통령과 악수하면서 8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의 아버지는 김 전 대통령과 초등학교 동창이다. 박 부면장 역시 하의초등학교 출신이다.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DJ’란 글씨만 봐도 클릭한다”는 그는 “김 전 대통령이 위독하시다니까 우리 아버지 일처럼 마음이 안 좋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한 주민은 “중국 갔다오고 나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을 텐데, 현 정부에 대한 불만까지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서 축사를 통해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의3도(하의도와 지금 신의면으로 분리된 상·하태도) 농민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투쟁해왔다”며 “그 결과로 국회의원 여섯 번과 대통령에 당선되고 노벨평화상도 받았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하의도에 살던 1930년대에도 농지탈환운동은 뜨거웠다. 소년 김대중의 가슴에도 ‘투쟁 의식’이 싹텄다. 농민운동기념관을 관리하는 정추곡(50)씨는 “여기에 오셨을 때 악수를 했는데 가슴이 벅차서 눈물이 났다”며 “편찮으시다니까 마음이 아프다. 얼른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저 악수했어요!” “아프지 마세요!”하의도 아이들에게도 김 전 대통령은 “우리 할아버지”다. 선착장 근처에서 만난 윤수빈(10)·김수빈(10)·김정은(9) 등 하의초등학교 학생들은 김 전 대통령을 아느냐고 묻자 신이 나서 말했다. “저 악수했어요!” “우리 학교 나온 할아버지예요!” “하늘만큼 땅만큼 또 보고 싶다.” “아프지 마세요!” 하의초등학교 김재홍 교감은 “전교생이 42명인데 대통령이 왔다 가신 뒤 아이들이 일기장에 나도 꿈과 희망을 갖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얘기를 많이 적었다”고 말했다.
오늘도 여전히 하의도 사람들은 바다를 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걱정한다. 12살 공부 잘하는 소년이 뭍으로 나갈 때부터, 정치에 입문해 대통령이 되고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지금까지 하의도는 김대중을 응원한다. 며칠 전, 하의면사무소는 지난 4월 김 전 대통령 내외가 초등학교에 심은 기념 식수가 시들시들하다는 말에 그 주변을 재정비했다. 나무가 잘 커야 하루빨리 김 전 대통령도 툭툭 털고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의도=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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