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체제에서 선출된 공직자가 시민의 선호와 요구를 얼마나 잘 대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3, 4년 또는 5년을 주기로 하는 선거에서 선출된 대표를 어떻게 항상적으로 인민의 의지를 대표할 수 있게 하는가의 문제는 매우 어려운 과제다. 시민·유권자들이 선거 이후 선출된 정부와 대표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한다면 이런 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피치자로서의 인민과 선출된 대표 간의 거리를 책임의 원리를 통해 최소한으로 좁힐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는 자신의 저서 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을 ‘시민의 선호·요구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지난 7월22일 날치기 처리한 미디어법은 ‘시민의 선호·요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여러 조사에서 미디어법 반대 여론이 60%를 넘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미디어산업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절차상 하자를 무릅쓰고 ‘재투표’까지 감행했다.
반발은 거세다. 시민단체들의 모임인 ‘민생민주국민회의’와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네트워크’는 기자회견을 열어 “국회가 언론악법 무효를 선언하지 않을 경우, 18대 국회 해산은 마땅하다”고 날을 세웠다.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와 개인 블로그 등에도 “차라리 국회를 해산하라”거나 “한나라당을 해체하라”는 격앙된 주장이 심심찮게 올라왔다. 이미 뽑힌 ‘시민의 대표’가 ‘시민의 요구’를 거스르는데도 이를 직접 통제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울분과 무력감의 표현이었다.
역사적으로 ‘대의’(代議)를 배반한 대표는 시민에게 ‘응징’당했다. 가까운 사례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을 발의한 뒤 17대 총선에서 역풍을 맞은 한나라당이다. 앞서 1996년 김영삼 정부는 노동관계법을 날치기했다가 노동계 총파업과 국민적 저항에 맞닥뜨려 ‘식물정부’ 상태에 빠졌다.
“차라리 국회를 해산하라” 울분 쏟아져
이런 응징을 제도로 순화한 사례를 미국의 중간선거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출된 대표가 늘 민심에 촉각을 곤두세우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은 4년 임기 중 2년이 지나면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상·하원의원 선거를 치러야 하고, 그 결과는 곧 대통령 재선 가능성의 척도가 된다. 임기 6년인 상원의원 100명은 선거를 한꺼번에 치르지 않고 2년마다 3분의 1씩 선출하도록 해 선거 주기를 맞췄다. 하원의원은 임기가 2년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민심을 거스르면 2년마다 돌아오는 선거에서 패배하기 십상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 때인 1994년 중간선거에서 야당인 공화당은 중산층 감세, 균형예산을 위한 헌법 수정, 10대 미혼모 및 합법이민자의 복지 철폐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40년 만에 상·하원을 모두 장악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선거 결과를 연금·교육·의료 분야 지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재정 적자는 축소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고, 정책 방향을 중도로 틀었다. 민주당 안에선 재정 건전성을 지지하는 ‘블루도그’(Blue Dog·민주당의 상징색인 파란색과 개의 합성어로 ‘항상 감시하는 민주당’이란 뜻) 그룹이 성장했다. 반면 공화당은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의 주도로 중산층 복지 예산 축소를 주장하며 두 차례나 연방정부 출입을 폐쇄하는 등 강경보수·시장중심 기조를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클린턴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고, 1998년 중간선거에서도 호황과 국민의 중도파 선호 분위기에 힘입어 민주당이 다시 승리를 거뒀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우리나라에서는 개헌이 전제돼야 하므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민심과 동떨어진 정치권력을 4년 동안 우려먹는 일은 막아야 한다”며 “의원 절반씩이든,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이든 임기를 교차시켜 중간평가를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소장학자들은 ‘국회의원 소환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주권자의 뜻을 대신할 대표를 ‘뽑을’ 권리뿐만 아니라 대표의 자리를 ‘박탈할’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는 논리로,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활용해 대의제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부분의 나라에선 지방의원·지방자치단체장을 대상으로 한 주민소환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 등 중앙 정치인을 상대로 소환제를 운영하는 나라는 베네수엘라가 유일하다. 정파적 이해에 따라 소환 추진이 남발될 우려가 있고, 이 경우 정국이 늘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윤철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미디어법 강행의 배경을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는 재벌이나 주류 언론 등 선출되지 않은 사회적 권력의 힘이 매우 강한 반면 정당은 허약한 구조다. 이를 견제할 방법은 정책·노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당을 키우는 것과 동시에 국회의원 소환제처럼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창은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도 “국회의원의 임기를 보장하는 이유는 정치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는 것이지, 임기 동안 의원이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다. 주권자인데도 제 권리를 향유할 수 없다면 그 대안을 찾는 데 제한을 둬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민의를 거스를 확률을 낮추도록 국회의원 선거제도부터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한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자 1명을 선출하고 일부를 정당 지지율에 근거한 비례대표로 뽑는 우리나라 선거제도는, 실제 표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대표성이 낮다는 지적을 받는다.
지난 18대 총선 결과를 보면, 한나라당은 43.5%의 지역구 득표율로 지역구 의석의 53.4%(131석)를 차지했다. 지역구 1석당 평균 5만7089표가 필요했다는 얘기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득표율 3.4%를 기록했지만, 지역구는 불과 0.8%(2석)밖에 얻지 못했다. 지역구 1석에 필요한 투표 수가 평균 29만1832표로, 한나라당의 5배 가까운 수치다.
또 전체 지역구 245곳 가운데 50%를 넘지 못한 득표율로 당선자를 낸 곳이 절반 가까운 112곳에 이른다. 뒤집어 말하면 112곳에선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원치 않는 후보가 당선됐다는 얘기다. 심지어 최소 득표율 1위를 기록한 무소속 이인제 의원은 27.67%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2위 후보와 1천 표 미만 차이로 당선된 이도 신영수 한나라당 의원을 비롯해 14명이나 된다.
중대선거구제 다양한 운영 방식지난 9~12대 국회의원 선거 때 운영했던 중선거구제가 13대 선거 때 소선거구제로 바뀐 주된 이유가 지역별 지지 기반이 달랐던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의 이해관계 때문이었고, 그 결과 지역주의가 더욱 공고해졌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현행 선거제의 ‘공정성’에 의문은 더 커진다.
이 때문에 정치학자와 일부 정치인들은 중대선거구제, 결선투표제,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 다양한 대안을 주장한다.
중대선거구제는 선거구 범위를 넓혀 한 지역구에서 득표순으로 여러 명을 뽑는 것인데, 나라마다 구체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은 다르다. 가령 오스트레일리아나 아일랜드에선 투표 때 1명만 선택하는 게 아니라 모든 후보를 선호하는 순서대로 적어낸다. 1순위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최하위자가 탈락하는 대신 그를 1순위로 찍은 유권자들의 2순위 투표를 나머지 후보들에게 보태준다. 이런 과정이 과반 득표자가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또 스페인 등에선 정당득표율에 근거해 의석수를 배분한다. 프랑스에서 시행하는 결선투표제는 지역구 1위가 과반을 득표하지 못할 경우 1·2위를 대상으로 다시 투표를 하는 제도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후보와 정당에 각각 1표씩을 준다. 각 정당이 얻는 최종 의석수는 정당 득표율로 결정되는데, 지역구에서 얻은 의석을 뺀 나머지가 비례대표 몫이다. 가령 전체 의석수가 300개라면 150석은 지역구에서 뽑는다. ㄱ당이 정당 투표에서 40%, 지역구 투표에서 60석을 얻었다면 이 당이 얻는 전체 의석은 120석이 된다. 지역구에서 얻은 60석을 뺀 나머지(60석)만큼이 비례대표 의석으로 돌아간다. 우리나라 현행 비례대표제와의 차이는 18대 총선의 정당별 득표율로 의석수만 계산해봐도 확연하다. 한나라당의 정당 득표율은 37.5%였으므로 112석,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율은 5.7%였으므로 17석을 얻게 된다. 선거 결과보다 한나라당은 41석이 줄고, 민주노동당은 12석이 늘어난다는 얘기다.
다수결은 토론과 설득의 과정 전제로하지만 선거제도를 바꾸려면 국회가 법을 고쳐야 한다. 고양이 스스로 방울을 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밥그릇’을 놓고 각 정당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엇갈리는데다, 국민적 공감과 합의를 이끌어내는데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국회와 정당 운영의 민주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설득력 있게 제기된다.
“올바른 다수결의 원리는 성원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서, 먼저 충분한 토론과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민주정치에서는 토론을 통해서 문제를 충분히 제시하고, 이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진술하는 가운데 상대방의 동조를 얻기 위해 설득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비록 다수에 의한 결정이라도 토론과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만 소수가 기꺼이 그 결정에 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수의 의견이라도 자유로운 토론을 거친 다음에야 결정을 할 수 있다.”
중학교 3학년 사회 시간에 배우는 민주주의와 다수결 원리에 관한 내용이다. 하지만 미디어법 날치기 과정에선 중3도 아는 기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청와대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청와대 회담 제안마저도 “국회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며 거절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국회, 특히 야당을 설득하는 노력은 대통령의 중요한 역할이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올 초 경기부양법 통과에 협조를 당부하려고 직접 의회를 찾아가 공화당 지도부를 만났다. 지난 5월 소냐 소토마이어 연방 항소법원 판사를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하기 전엔 인준 청문회를 주관하는 상원 법사위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의견을 물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등도 중요한 법안 처리를 앞두고 상원의원을 대통령 전용기로 초청해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설득 작전을 폈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학)는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 청와대와 여당은 정무 기능 부재, 정치력 부족을 또 한 번 여실히 보여줬다. 여권이 정말 중요한 법안이라고 생각한다면, 반대가 심할수록 소통하고 설득하려는 노력이 중요한데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고 지적했다.
의원들이 당론과 다른 생각을 갖더라도 소신을 쉽게 행동에 옮기기 어려운 구조도 문제다.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이 7월27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은 그 단면을 보여준다. “준엄한 비판은 달게 받겠다. 아무리 정치 개혁을 외쳐도 궁극의 순간에 결국 갈등의 구조에 갇혀 있던 저의 모습을 제가 더 또렷이 기억하겠다.” 한나라당 내 대표적인 개혁 성향 의원으로 꼽히는 그는 미디어법을 놓고 “재벌이 방송 경영에 참여하는 덴 절대 반대”라는 의견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 역시 7월22일 본회의장에서 미디어법에 찬성했다. 김 의원은 자신을 가둔 ‘갈등의 구조’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았지만 그것이 헌법기관인 의원 개개인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나라당의 분위기, 나아가 청와대와의 관계를 뜻함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구조의 정점엔 의원 개인의 미래를 좌우하는 공천제도가 있다.
공천권자 눈치 안 보는 정당 민주화 시급
의원들도 여당을 ‘거수기’로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보스’가 가진 공천권임을 모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김성식 의원 등 한나라당 개혁 성향 초선의원 모임으로 불리는 ‘민본21’은 지난 6월 말 국정 쇄신을 제안하면서 “공천권을 볼모로 한 통제 시스템은 극복 대상”이라며 민주적 당청 관계 확립을 촉구했다. △경선을 통한 상향식 공천 △공천에 청와대 영향력 배제 △의원 자율성 존중과 강제적 당론 금지 등도 제안했다. 한나라당 쇄신특별위원회 역시 쇄신책으로 “비민주적 공천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상향식 공천 원칙을 실질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규정을 개정키로 했다”고 밝혔다.
정당이 해결책을 찾아도 실행하지는 못할 것이란 불신이 짙다. 그래도 정당 스스로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제기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어떻게 시민이 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가?” “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생각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 그는 정당이 시민과 정부를 잇는 매개체로서 강력해지는 것이 답이라고 결론지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당 특히 야당은 다시 ‘거리’에 섰다. 이는 그동안 시민의 요구를 대표하지 못한 대가일까, 아니면 시민으로부터 정부를 통제할 힘을 얻어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한 걸음일까.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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