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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필리버스터가 그리운 이유

소수파의 견제수단인 의사진행 방해연설… 본회의장에선 횟수·시간 제한
등록 2009-08-07 14:16 수정 2020-05-03 04:25

“국회의원들이 원시인이고 교양이 없어서 본회의장 점거하고 물리력으로 막는 것 아닙니다.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국회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나 대안은 없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날치기’와 ‘몸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의문이 든다. 대한민국 국회에는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장치가 과연 없는 것인가? 야당은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는가?

민주당 강기정 의원(국회의장 연단 앞)이 지난 7월22일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에 반대하며 국회의장 연단으로 뛰어들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런 모습이 연출되는 건 몸싸움 이외의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민주당 강기정 의원(국회의장 연단 앞)이 지난 7월22일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에 반대하며 국회의장 연단으로 뛰어들고 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런 모습이 연출되는 건 몸싸움 이외의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중요한 건 제도보다 합의하려는 자세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국회법은 야당에 강력한 견제 수단을 부여하고 있다. 국회법 제60조 1항이다. ‘위원은 위원회에서 동일 의제에 대하여 회수 및 시간 등에 제한 없이 발언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완벽한 필리버스터(의사방해연설)다. 단, 이는 상임위로 국한된다.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동일 주제에 대해 2회과 15분으로 제한된다. 발언 시간 제한이 없었던 1964년 4월20일 당시 제6대 국회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5시간19분 동안 쉬지 않고 연설한 이후 제한됐다. 대한민국 의정 사장 가장 긴 필리버스터였다. “박정희 정권이 비밀회담으로 일본 비자금 1억3천만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한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상정을 저지하기 위한 비상수단이었다.

이 족쇄를 40여 년 만에 풀자는 말도 나왔다. 지난해 12월 이른바 ‘제1차 입법전쟁’이 끝난 직후,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원혜영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는 ‘합리적인 수준의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뜻을 밝혔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학)는 “본회의장에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하고 의장의 직권상정 제도를 없애는 방향으로 간다면, 국회에 제출된 모든 법안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상임위와 본회의에 상정되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합의를 하겠다는 태도다. 이준한 교수는 “한국과 유사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프랑스에서도 사르코지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던 ‘일요근무규제 완화법’이 의회를 통과하는데 2년 이상이 걸렸다”며 “여야뿐만 아니라 노동계 등 이해 당사자의 의견을 꾸준히 청취하고 합의하기 위해 노력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윤재 미국변호사(법무법인 자하연)도 “한국은 필리버스터를 국회법에서 성문화해 제도 면에서는 미국보다 오히려 더 탄탄한 측면이 있다”면서도 “문제는 청와대와 다수당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밀어붙이기 때문에 제도로서의 의미가 힘을 잃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계층과 계급의 갈등을 전제로, 그 갈등을 타협으로 풀자는 제도다. 타협에 들어가는 시간은 낭비가 아닌, 사회적인 투자다. 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는 평등이고, 이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위에서 실현된다.

공룡 민자당의 몰락 벌써 잊었나

최재성 민주당 의원은 “여야가 의사일정에 합의해야 국회가 개원될 수 있는 제도와 관행을 만든 것도 아무런 저항권이 없는 야당에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을 전통적으로 인정했던 것”이라며 “이런 관행을 ‘낭비’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8대 국회보다 의석 불균형이 더 심했던 때가 13대 국회다.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3당 합당’ 결과 신생 민주자유당은 218석을 보유한 절대다수 정당이 됐다. 민자당은 절대적인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힘의 정치’를 밀고 나갔지만, 결국 14대 총선에서는 149석으로 내려앉았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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