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좀 빠르다고 생각을 허죠. 그래도 통일부 장관도 하고, 당 대표도 하고, 대통령 후보도 한 사람 아니에요. 뭐, 자기 욕심이 있어서 고향으로 왔는가 몰라도 (공천을) 안 줘버리니까 반발심 때문에 더 지지를 허는 것 같아요. 만에 하나 자기 고향에서 떨어져버리면 인자 정치 생명은 끝난 것 아니냐, 그런 우려가 있죠.”
4월14일 양원석(49·가명)씨는 주저 없이 무소속 정동영 후보를 찍겠다고 했다. 전북 전주 덕진구 모래내시장에서 채소가게를 운영하는 양씨는 정 후보의 정계 복귀가 빠르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양반이 선택을 했으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찍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후보는 이날 전주 덕진 선거관리위원회에 4·29 국회의원 재선거 후보 등록을 마쳤다. 본격적인 선거전의 시작이었다.
전북 전주 덕진과 완산갑 국회의원 재선거는 정동영 무소속 후보와 민주당의 운명을 결정지을 전망이다. 4월15일 오전 장애인의 날 행사가 열린 전주 완산구 화산체육관 입구에서 덕진에 출마한 정동영 후보와 완산갑 이광철 민주당 후보가 만났다. 다른 무소속 후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정 후보는 이 후보가 악수를 청하자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정 후보는 말없이 체육관으로 향했다.
다음날 오전 전주 금암동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전주 재선거에 대한 열띤 공방이 오갔다. 터미널에서 일하는 김종진(56)씨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에게 화살을 돌렸다. “민주당을 살릴라문 ‘아무리’ 미우나 고우나 정동영씨를 받아줬어야 하거든. 정세균씨가 그래서는 안 된다 이 말이여. 자기가 당 대표인데 어떻게든지 화합해서 여당을 저지해야 할 거 아니에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정동영씨도 여기 와서 헌 거 없어요. 나도 미웁지만, 미워도 다시 한번 받아줬어야 하거든.” 김씨는 ‘아무리’라는 단어에 잔뜩 힘을 줬다.
“김근식 후보에 대해선 잘 모른다”김씨의 동료 최익선씨는 정동영 후보의 ‘나약함’을 질타했다. 기왕 정계 복귀를 결심했다면 아예 민주당을 ‘접수’했어야 한다는 것이 최씨의 지적이었다. “정동영 그 사람은 조직에 대한 카리스마, 그런 게 부족한 거 같애. 자기가 진정한 리더가 되고 싶으면 정세균이 다 뭐여. 그냥 ‘뭐시여’ 하고 당을 확 휘어잡았어야지. 뒷심이 부족헌게 이 모양 이 꼴을 당하는 거야.” 민주당이 전주 덕진에 공천한 김근식 후보에 대해 묻자 김씨와 최씨 두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입을 모았다.
전주에서는 덕진과 완산갑 두 곳에서 국회의원 재선거가 치러진다. 전주 재선거의 구도는 언뜻 정동영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구주류와 정세균 대표가 이끄는 신주류의 주도권 쟁탈전으로 보인다. 전반전은 정 대표의 완승이었다. 정세균 지도부는 덕진에 김근식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를 전략공천했다. 정동영 후보는 ‘탈당 뒤 무소속 출마’라는 독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후반전 결과를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선거를 앞둔 전주의 밑바닥 민심은 확실히 정동영 후보 쪽이다. 정 후보를 공천에서 배제할 때 민주당 지도부는 ‘명분과 원칙’을 내세웠다. 반면 정 후보는 자신에 대한 ‘동정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민주당 지도부가 ‘이성’에 호소했다면, 정 후보는 ‘감성’을 자극한 것이다. 눈물은 힘이 셌다. 현재까지의 결과는 정 후보의 우세다.
김근식 후보에게 대응 전략을 물었다. 그는 원칙과 정도를 강조했다. “정동영 후보가 ‘덕진의 아들 정동영’, 이런 식으로 감성에 호소하고 있는데, 제가 볼 때 정 후보가 당선된다고 해도 덕진 주민에게 돌아올 게 별로 없습니다. 당선되면 민주당으로 복당하겠다는 것도 감성적 호소 아닙니까. 민주당 복당은 제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저는 감성에 호소하기보다 덕진 주민의 미래를 약속하고 싶습니다.”
여론 주도층 시선은 싸늘정동영 후보의 등장을 바라보는 여론 주도층의 생각은 밑바닥 민심과 조금 다르다.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만난 황승일(48) 전주시 지역발전아카데미 봉사단장은 “정동영 후보가 당선이야 될 것으로 보지만 다들 그의 복귀를 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아닌 것 같다”며 “나는 (정 후보의 덕진 출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 후보를 밀겠다”고 했다.
정동영 후보를 전주 덕진 공천에서 배제한 민주당은 대신 ‘정치 신인’ 김근식 후보를 전략공천했다. 전주 덕진에 출마한 김 후보는 “선거전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 양강 구도로 좁혀질 것이고, 인지도가 약한 약점도 해결될 것”이라며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의 조동식 기자는 정동영 후보를 향한 전주 민심의 분화에 대해 “이성과 감성이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로 설명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정동영 후보의 4월 덕진 재보선 출마에 찬성한다는 여론이 40%를 웃돌고 있다. 노년층과 여성층에서는 찬성 비율이 높은 반면 공무원과 교수, 기자 등 오피니언리더층에서는 반대 여론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정동영 후보가 나타나면 지역이 시끌시끌했던 과거와 비교할 때, 분위기가 썰렁한 것은 분명하다.”
4월15일 오후 덕진구 진북동 정동영 후보 선거사무실 앞을 지나던 유완희(78) 참사랑낙원복지회 대표가 발걸음을 멈췄다. 물끄러미 정 후보 사무실 쪽을 응시했다. “같은 호남이라도 전남은 ‘예스까 노까’ 하는 그런 성격이 있는디, 전주 사람들은 소신이 없어요. 저 사람이 전주를 위해 일은 헌 게 아무것도 없어요. 도대체 내가 암만 저걸 해설할라도, 어떻게 저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냐 이거요.” 유 대표의 손끝은 정 후보 사무실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을 가리켰다. 현수막 문구는 이랬다. “어머니, 정동영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정동영.”
비슷한 시각, 신건 전 국정원장이 전주 완산갑에 무소속 후보로 등록하며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신 후보의 등장을 어떻게 봐야 할까? 후보 등록 직전 이 그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오늘 새벽에 출마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고민이 깊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정동영·신건 모두 전주고 출신신 후보의 등장으로 정동영·신건 두 무소속 후보의 연대 가능성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신 후보는 이날 “그쪽(정동영 후보)에서 도와주면 손해날 것은 없다”며 “선거하다 보면 협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무소속 연대의 성사 가능성을 사실상 시인한 것이다. 만약 정동영·신건 두 무소속 후보가 연대할 경우 전주 덕진은 물론 완산갑까지 무소속이 석권하는 결과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또 두 후보가 나란히 당선될 경우 이는 앞으로 정 후보 중심의 신당 창당 움직임에 동력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정동영·신건 두 무소속 후보의 조합에 대한 지역 여론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정동영 후보 한 명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과, 완산갑 신건 후보와 조합을 이루는 것은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모두 ‘전주고’ 출신이다. 신건 후보는 ‘전주고 출신의 대부’로 불린다. 정동영 후보 역시 대선 과정에서 전주고 동문모임 ‘정동포럼’ 등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전주 출신 한 언론인의 지적이다.
“신건 후보가 출마를 강행하면서 지역 정가에서는 ‘전주고 마피아’가 다시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정동영·신건 두 후보가 전주고 출신일 뿐 아니라 완산갑 경선에서 신 후보가 밀었던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도 전주고 출신이나 마찬가지다. 정동영·신건 두 후보의 캠프에도 전주고 출신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과거 전북을 지배했던 전주고 출신이 다시 똘똘 뭉쳐 정동영·신건 두 후보를 밀고 있는 상황이다.”
전주 완산갑에서는 무소속 신건 후보가 4월15일 후보 등록을 마쳤다. 신건 후보는 ‘전주고의 대부’로 불린다. 민주당 완산갑 경선 때는 전주고 인맥이 한광옥 전 민주당 대표를 밀었다. 한 전 대표가 경선에서 탈락하자, 신 후보 본인이 곧바로 무소속 후보로 출마를 선언했다.
물론 한광옥 전 대표는 전주고 출신이 아니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전주고의 전신인 전주북중을 졸업했다. 전주고 총동창회에서는 전주북중 출신도 전주고 동문으로 간주한다. 현재 신건 후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이무영 전 의원도 전주북중 출신이다. 신건 후보 캠프의 박종문 공보특보는 지난 대선 때 정동영 후보 캠프에 몸담았다. 역시 전주고 인맥이다.
전주에서 학교를 나오지 않은 사람은 전주에서 전주고가 차지하는 위상을 잘 알지 못한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의 칼럼 ‘전주고 이야기’는 ‘전주고 마피아’의 기원을 설명해주고 있다. “전주에서는, 전주고등학교를 나오지 못한 것이 그대로 불행의 씨앗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전주에서는 전주고등학교와 ‘나머지 고등학교’밖에 없으니까요. 단 한 번의 경쟁으로, 귀족과 평민이 영원히 갈리는 것입니다. 전주라는 지역사회에서는, 전주고등학교를 나오지 못하면 영원히 그 주류 사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제가 설핏 엿보았기 때문입니다.”
전주고 인맥의 ‘전북 지배’ 현상은 1980년 전후 고교평준화 시행과 함께 약화됐다. 전주고 아성을 무너뜨린 주축 세력도 평준화 이후 세대인 30~40대였다. 전주고 출신 언론인 모임인 ‘전언회’ 소속의 한 지역 언론인은 “전주고 마피아의 자존심을 건드린 결정적 계기는 정동영의 퇴장과 정세균 대표 체제의 등장이었다”며 “‘비전주고’ 출신의 정 대표가 이번 재보선 공천에서 역시 비전주고 출신 젊은 후보를 내려보내자 전주고가 집단적으로 폭발한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세균 대표는 전북 출신이면서도 전주고가 아닌 신흥고를 졸업했다. 이번에 민주당이 덕진과 완산갑에 각각 공천한 김근식 후보와 이광철 후보도 각각 전주사대부고, 군산고 출신이다. 보기에 따라 ‘비전주고’ 출신의 등장에 대항해 ‘전주고 마피아’가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전주고 동문으로부터 사퇴 압력‘전주고 마피아’가 4·29 전주 재보선 과정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정황도 있다. 3월31일치에 따르면, 전주 덕진에서 민주당 예비후보로 나섰던 한명규 후보는 전주고 동문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 후보는 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민주당 예비후보로 등록하자 전주고 출신 선후배들이 ‘전고 선배인 DY(정동영)가 출마하려 하는데, 네가 나서면 되겠느냐’는 식의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해왔다”며 “동문회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사퇴 압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건 후보는 양쪽 캠프의 주축이 전주고 출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신 후보는 “정동영 장관은 학교 후배이기도 하고 양쪽 모두에 고교 후배가 많으니까 평소 의견 교환이 많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전주 재선거의 구도가 정동영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구주류와 정세균 대표가 이끄는 신주류의 주도권 쟁탈전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시선을 중앙 정치무대에서 지역 정치무대로 옮기면, ‘구주류’와 ‘신주류’는 전주고 출신 ‘주류’와 비전주고 출신 ‘비주류’로 역전된다. 하지만 전주의 ‘비주류’는 이 지점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지난 수십 년간 전주는 ‘전주고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정동영·신건 두 무소속 후보의 ‘눈물’이 여전히 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주=글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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