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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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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있는 여당 밧줄로” “박근혜 위하는 길로”

경주 민심, 친이-친박 후보 백중세 속 “정책선거 어디갔나” 비판 여론도
등록 2009-04-23 17:44 수정 2020-05-03 04:25

4·29 재선거 후보 등록 마감 하루 전날인 4월14일 오후 5시 경북 경주역 주변 성동시장. 35년 동안 이불장사를 했다는 김아무개(64)씨가 가게 밖에 쌓아둔 이불을 서둘러 안으로 들여놓으며 문 닫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옛날 같으면 이 시간에 문 안 닫니더. 지금은 종일 있어도 하루 5만원, 10만원이라. 100만원도 넘는 달세 주고, 전기요금이다 뭐다 떼고 나면 돈 몇 푼 남지도 않아서 속만 시끄럽고…. (정종복 한나라당 후보가 17대 때) 의원 되고 나서는 경주 일도 안 하고, 니 언제 봤냐는 듯이 (지역 주민들한테) 인사도 안 해서 미워하기는 다 미워하는데…. 그래도 사는 게 너무 힘드니까 정종복이 찍어야지예. 대통령 측근이라 카니까 암만 캐도 힘있는 데 찍으면 (지역 경제가) 안 낫겠나, 그 생각밖에 없어예.”

경북 경주 재선거에 출마한 정종복 한나라당 후보(왼쪽)와 정수성 무소속 후보(오른쪽)의 선거사무실. 정종복 후보는 ‘힘있는 여당 후보’를, 정수성 후보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함께’를 강조하고 있다.

경북 경주 재선거에 출마한 정종복 한나라당 후보(왼쪽)와 정수성 무소속 후보(오른쪽)의 선거사무실. 정종복 후보는 ‘힘있는 여당 후보’를, 정수성 후보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함께’를 강조하고 있다.

길 건너 곡물가게 차재호(73)씨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정종복이 이명박하고 같이 박근혜를 얼마나 괴롭혔노?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두 분 다 나라 위해 몸 바쳤고, 박근혜도 그렇잖아. 박근혜가 남편이 있나, 자식이 있나. 나라밖에 없는데, 그런 사람을 얼마나 괴롭혔냐고. 정수성이는 자기 잘되려고 박근혜 파는 거지만, 그래도 정종복이는 안 돼!” 차씨는 정종복 후보가 한나라당 사무부총장으로 18대 총선 공천을 주도하면서 박근혜계와 갈등을 빚었던 사실을 자기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역사문화도시 조성 서로 적임 주장

김일윤 전 친박연대 의원의 선거법 위반으로 4월29일 재선거를 치르게 된 경주 민심은 선거 시작 전부터 예견된 것처럼 ‘친이’ 대 ‘친박’으로 갈라져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보문단지가 개발된 탓에 경주는 ‘박정희 향수’와 ‘친박근혜 정서’가 강한 곳이다. 경주 재선거엔 정종복 한나라당 후보와 채종한 민주당 후보, 이채관 자유선진당 후보, 무소속 정수성·최윤섭·이순자·채수범 후보 등 모두 7명이 등록했지만, 사실상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과 가까운 정종복 후보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 전 대표의 안보특보를 지낸 정수성 후보의 양자 싸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주민들은 “정종복 후보가 17대 국회의원이 된 뒤 거만해졌다. 자기는 초선인데도 이상득 측근이 돼서 공천까지 좌우할 힘을 누렸을진 몰라도, 우리는 손이라도 한번 잡아줄 사람을 원했는데 정종복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힘있는 여당 후보’가 당선되면 침체된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컸다. 동천동 주민 김아무개(72)씨는 “밧줄도 좋을 때 써먹는 기지, 안 그렇소?”라고 입을 뗐다. “경주가 살라카믄 정종복이 돼야지. 이명박이랑 가까우니까 (예산도) 많이 땡겨올 수 있고,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이다, 방폐장이다 해서 경주에 얼마나 일이 많노. 줄이 있을 때 땡겨서 그런 일을 해야지. 정종복이 목에 힘을 줬네 어쨌네 하는 건 개인 사정이고, 경주시 발전을 위해서는 그런 사람이 일을 해줘야지.”

정종복 후보 쪽이 강조하는 점도 ‘여당 프리미엄’과 ‘측근의 힘’이다. 정 후보 캠프 관계자는 “실세가 국회에 들어가야 경주에 예산을 많이 갖고 올 수 있는 것 아니냐”며 “30년간 3조3천억원이 들어가는 역사문화도시 조성 사업도 정 후보가 국회에 가야 특별법을 제정해 국비로 추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4월16일 경주역 광장에서 지원유세를 펼친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도 “국회의원이 300명이나 있는데, 누가 경주를 위해 예산을 주겠느냐. 많은 돈을 경주까지 싣고 올 힘있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함께 지원유세에 나선 이병석 의원이 국회 국토해양위원장이란 사실도 강조하면서 “경주가 발전하기 위해 제일 필요한 상임위가 국토해양위다. 이병석 의원이 여기 왜 왔겠는가. 결국 경주 발전을 도와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수성 후보를 지지한다는 주민들도 어쨌거나 ‘깔끔한 기분’은 아닌 듯했다. “정수성이 잘나서 찍어주나. 박근혜 때문이지”라는 얘기였다. 성동동에서 만난 50대 초반의 임아무개씨는 “방송 토론회 보니까 지역 사정도 잘 모르더라. 경주 발전을 얘기하지만 경주에서 활동한 적도 없다”면서도 “그래도 대안이 없다. 경주는 박근혜라고 하면 선거 끝”이라고 말했다. 황오동에서 만난 40대 후반의 한 여성은 “누가 되든 똑같고, 찍을 사람도 없다”면서도 “경주는 누가 뭐라 해도 박근혜고, 정수성이 박근혜 쪽 아니냐”고 했다. 그러면서 “김일윤은 경주를 위해 한 일도 많았는데 왜 그렇게 됐는지(의원직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지난 총선 때 정종복 후보를 누른 탓에) 운이 없었던 것 같다”며 재선거로 오기까지 ‘정치적 의도’가 작용한 게 아니냐고 의문을 나타냈다.

감정적 대결 구도로 흘러

정수성 후보 쪽은 “현실적으로 선거전략은 ‘박근혜’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정 후보 선거사무실 바깥쪽 벽엔 박근혜 전 대표와 정 후보가 함께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박근혜님과 함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 등의 캐치프레이즈가 쓰인 대형 현수막 2장이 붙어 있었다. 박 전 대표의 사진과 ‘박근혜님 대권 가도에 누가 걸림돌이고 누가 디딤돌인가’라고 쓰인 벽보가 도배되다시피 한 사무실 내부는 박 전 대표 선거사무소를 방불케 할 정도다. 정 후보의 한 참모는 “경주를 역사문화특별시로 승격시키겠다는 게 제1 공약인데, 그건 대통령령으로 가능하다. 말하자면 정 후보가 최선을 다해 박근혜 전 대표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나서, 경주를 특별시로 만들겠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선거 구도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흐르는 것을 우려하는 유권자도 물론 있었다. 성동동에서 만난 박아무개(35)씨는 “자기 영달을 위해 당이나 박근혜한테 기대는 건 후진적”이라며 “누가 정말 경주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지 가리는 정책선거가 되지 못해 안타깝다”고 했다. 황오동 김아무개(43)씨는 “당선 가능성은 없겠지만 ‘촛불 후보’로 나선 무소속 채수범 후보를 찍을 생각이다. 그동안 ‘아고라’에서 글도 많이 봤는데, 1천 표만 얻어도 서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는 백중세다. ‘리얼미터’가 4월15일 경주 시민 7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정수성 후보와 정종복 후보는 각각 33.3%와 33.1%의 지지를 얻어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식 선거운동 기간인 13일 동안 누가 더 효과적으로 표심을 사로잡는지에 선거 결과가 좌우될 것이라는 얘기다. 정종복 후보는 “당 공천을 받고 나서 주민들을 만나보니, 몸으로 지지율 상승세가 느껴진다. 시간만 지나면 이길 수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정수성 후보 쪽은 “한나라당이 조직과 소속 국회의원 등을 동원해 물량공세를 퍼부을 테지만, 경주 시민들은 우리 후보가 경주가 낳은 최초의 4성 장군이라는 점, 경주를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점을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주=글·사진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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