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회사 로비는 춥다. 문을 여닫는 사람들이 많아서다. 안내데스크 여직원의 추위에 지친 모습도 보게 된다. 최고경영자(CEO)는 그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직원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뭔가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고급 호텔 로비 앞이나 놀이공원 출입문에 설치된, 몸을 녹일 수 있는 스토브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이 선정하는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서 드러나는 공통점이 있다. 회사는 직원들을 존중하고 직원들은 상사와 경영진을 신뢰(Trust)하고, 자기 일에 자부심(Pride)을 갖고 있으며, 회사에서 즐거움(Fun)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들 기업은 일하기 좋은 일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뛰어난 경영성과도 보이고 있다. 마치 스토브로 몸이 따뜻해진 호텔 도어맨이 고객에게 한결 친절해지는 것처럼.
국내에선 어떤 기업들이 ‘일하기 좋은 회사’일까. 불황의 시대 ‘마른 헝겊도 비틀어 짜라’고 강조하는 때 ‘신나고 재미있게 일하기 좋은 회사’를 이 찾아나섰다.
로비는 출입문 아닌 즐기는 공간금융회사들이 들어선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현대캐피탈 본사도 여의도에 자리잡고 있다. 이 회사의 로비는 색다르다. 여느 금융회사 로비처럼 엄숙하거나 웅장하지 않다. 출입문에 들어서면 로비 중앙에 탁구 테이블과 게이트볼 필드가 눈에 띈다. 점심시간에 여기서 직원들은 탁구와 게이트볼 경기를 한다. 로비 한켠에는 자전거 비치대가 있다. 직원들은 자전거를 타고 한강 둔치나 여의도 공원에서 바람을 쐬기도 한다. ‘미우로’라는 인공지능 스피커가 로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경쾌한 음악을 쏟아놓는다. 로비 한 켠엔 사과·바나나·오렌지 등 신선한 과일이 담겨 있다. 로비는 단순한 출입 공간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즐기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일하기 좋은 기업은 이처럼 시설을 잘 갖춰놓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선도적 기업문화다. 현대카드·현대캐피탈 기업문화의 핵심은 혁신과 창조다. 대표적인 것이 혁신적 인사제도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벗어나 다른 일을 하고플 때가 있다. 새 부서에서 전문적인 경력을 쌓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회사의 인사제도는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인력수급 문제, 또는 미묘하게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때문에 좀처럼 소속 부서를 떠날 수 없다.
하지만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직원은 언제든 소속팀을 옮길 수 있다. ‘커리어 마켓’(Career Market)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위험한 실험’이었지만 지금은 ‘화려한 성공’으로 다가왔다. 2007년 이 회사는 팀장급 아래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사내 인력시장, 즉 커리어 마켓을 도입했다. 인력이 필요한 팀이 사내 공지를 통해 인력을 구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직원 개인이 사내 ‘채용시장’에 본인을 내어놓는 시스템은 유례를 찾기 힘든 인사 제도였다. 직원에게 원하는 일을 희망 부서에서 할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다.
사내 온라인 망으로 운영되는 커리어 마켓은 ‘오픈커리어 존’(Open Career Zone)과 ‘잡포스팅 존’(Job Posting Zone)으로 나뉜다. 오픈커리어 존은 다른 부서로 옮기고 싶은 직원이 자신을 등록하고 ‘마케팅’하는 공간이다. 부서장은 이곳을 들여다보며 필요한 인재가 있는지 살펴본다. 반대로 잡포스팅 존은 각 부서가 ‘이런 인재가 필요하다’고 공모하는 곳이다. 한 부서에 2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선 전출·후 충원’ 원칙이 적용돼 옮기겠다고 손든 직원은 부서장이 막을 수 없다.
제도 도입 이후 커리어 마켓으로 부서를 옮긴 직원은 2008년 12월 말 기준으로 무려 190여 명에 이른다. 전체 인사 이동 중 80%에 이르는 비율이다. 지난해 2월 오세훈 시장을 비롯한 서울시 간부들이 이 회사를 찾아 기업문화에 대해 강의를 듣기도 했다. 그 뒤 서울시가 가장 먼저 벤치마킹한 것이 바로 이 커리어 마켓이다. 6급 이하 서울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헤드헌팅 및 드래프트제’가 그것이다.
세계 배낭여행 비용 전액 지원IT캐피탈팀에서 5년 동안 일한 뒤 오토크레디트팀으로 이동한 조윤희 대리는 “다른 금융회사에서 IT를 담당하고 있는 동창들은 아예 입사 때부터 이동이 막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역시 커리어 마켓이 생기기 전까지는 퇴사해야 할지를 고민한 적도 있다. 새 인사 제도로 내가 원하는 부서로 이동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한다.
정태영 사장은 “직원에게 자신을 개발할 기회를 주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고 믿는다. 직업 선택의 자유에 입각해 우리 회사를 선택한 만큼 입사 뒤에도 중앙집권형 인사 제도가 아닌 시장 원리에 입각한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인사 시스템을 만들자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직원 동기부여를 위한 ‘글로벌 배낭여행 프로그램’ 역시 톡톡 튄다. 일인당 최고 400만원까지 배낭여행 비용을 지원해주는 이 프로그램은 매달 여행 계획서를 공모해 그 가운데 여행 취지가 분명하고 열정이 뛰어난 한 팀을 뽑아 지원한다. 평소 관심이 있었던 분야를 심도 있게 체험할 수 있는 여행계획서에 후한 점수를 준다. 클래식 음악가들과의 만남, 유럽 자전거 문화 체험, 실크로드 탐방, 미국 테마파크 기행 등 선정된 여행테마도 자유롭고 다양했다.
의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가 “우리 사장은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단지 볼 수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 CEO는 “내 방이 개방돼 있으니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평사원에게 사장실은 언제든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CEO는 그냥 찾아오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소통 채널을 만들어 구성원에 다가가야 한다는 얘기다.
팬택, 회의 탁자 없이 둘러앉아 토론박병엽 팬택계열 부회장도 그렇다. 팬택 본사 빌딩에는 임원용 엘리베이터가 없다. 박 부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같이 탄다. 허름한 호프집에서 호프 한잔을 마실 때도 종종 있다. 직원들도 박 회장이 옆 술자리에 있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박 부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에는 회의 탁자가 없다. 그는 탁자에 앉아 딱딱하게 진행하는 회의보다 원형으로 자연스럽게 배치된 의자에 앉아 격의 없이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직급과 직책에 상관없이 사원도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담배를 피울 수 있는 토론도 진행한다. 그렇게 결론이 날 때까지 토론하는 ‘결론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며 회사의 경쟁력을 높인다.
박 회장은 회사의 경영 상황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공유하는 소통문화를 활성화했다. 매 분기 경영설명회를 통해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경영 상태를 구성원들에게 직접 설명했다. 경영설명회는 무엇이 잘됐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해당 부문장과 본부장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구성원에게 설명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팬택계열은 2007년 1천억원대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지난해 영업이익은 21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 강남파이낸스센터 22층. 통유리창 너머 강남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글코리아 카페테리아는 오전 11시30분만 되면 사내 식당으로 변신한다. 커다란 중앙홀 한가운데에서 쌈밥 정식, 중국식 볶음면, 연어 스테이크 등 한·중·양식 요리가 어우러진 뷔페 스타일의 식사를 맛볼 수 있다. 식사 서비스는 아침과 점심 때마다 제공된다.
카페테리아서 아침·점심 무료 제공24시간 무료로 운영되는 이곳엔 음료수·우유·피자·빵으로 가득한 2대의 냉장고와 두 종류의 커피머신, 신선한 과일과 수십 종의 간식거리로 가득한 미니 주방, 당구대, 미니 축구게임기 등이 있다. 구글코리아에는 ‘구글 4’라는 말이 있다. 구글에 입사하면 몸무게가 4kg 늘어난다는 뜻이다. 구글코리아의 정김경숙 상무는 “구글이 직원들 먹을거리에 신경쓰는 이유는 직원에게 늘 감사하며 보답하기 위해서다. 건강에 좋고 맛있는 공짜 점심은 그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구글 엔지니어들은 개인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 업무 시간의 20%를 쓸 수 있다. 관심 분야가 회사 매출과 연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개발자에게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할 시간적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구글의 핵심 경쟁력은 여기서 비롯된다. 구글뉴스·지메일·구글맵스는 구글의 ‘20% 시간’을 통해 세상에 나온 서비스들이다.
구글코리아 사무실에는 10여 개의 주인 없는 자리가 있다. 다른 사무실에서 출장이나 현지 근무를 온 직원들을 위한 배려다. 미국 본사와 다른 지사도 마찬가지다. 정김경숙 상무도 최근 이집트 카이로의 구글 사무실에 있는 주인 없는 자리에서 업무를 보았다. 이 때문에 구글코리아는 취업업체인 커리어와 잡코리아가 신입 구직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일하고 싶은 외국계 기업’ 1위에 꼽혔다.
국내 생활용품업계 1위인 유한킴벌리는 ‘가족친화 경영’의 대표주자다. 10여 년 전부터 ‘가족이 살아야 기업이 살고 사회도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이념을 실천해오고 있다. 여직원에게 법정 출산휴가(3개월)와는 별개로 2개월 산전휴가를 준다. 의료비와 출산 축하금도 지급한다. 남자 직원도 아내가 출산하면 이틀간의 휴가를 쓸 수 있다. 회사 눈치를 보느라 휴가를 꺼리는 경우는 전혀 없다.
유한킴벌리는 일의 성격에 따라 차별적인 탄력근무제를 운영한다. 생산직은 나흘 일하고 나흘 쉬는 ‘4조 교대제’, 영업직은 회사에 나올 필요가 없는 ‘현장 출퇴근제’, 관리직은 핵심 업무시간 이외에는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시차 출퇴근제’를 이용할 수 있다.
고령화 대책도 빠지지 않는다. 유한킴벌리의 정년은 몇 년 전만 해도 55살이었다. 하지만 차츰차츰 연장하면서 올해엔 58살로 높아졌다. 퇴직 전 6개월과 퇴직 뒤 3개월가량은 상담과 교육을 받는 시간으로 할애하고 있다.
유한킴벌리 차별적 탄력근무제그 결과 이 회사의 이직률은 0.2%로 국내 제조업체 평균의 4분의 1 수준이다. 애사심과 충성도도 높다. 회사가 펴낸 ‘2008년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보면, 직원 조사에서 “우리 회사는 장수 기업이 될 것이다”라고 답한 비율이 94%, “우리 회사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이 91%에 이르렀다.
한국마사회는 이질적인 부문들이 서로 만나 의사소통하는 공식 채널이 유난히 많다. 회장과 실무직원들의 간담회인 M2C(Member to CEO), 본부장과 실무직원들의 만남인 M2D(Member to Director), 노동조합과 실무부서가 모이는 GNS(Good Neighbor Session) 등 10개가 넘는 의사소통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직원은 이러한 모임에서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껏 하고 관리자는 현장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한다.
김광원 한국마사회장이 취임 뒤 직접 만든 ‘회장에 특별제안’ 제도도 시행되자마다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회장에게 직접 전달하는 제안 방식으로, 분량이나 형식에 제한이 없다. 최고 300만원의 포상금도 지급한다. 김 회장의 책상 위에는 경마사업을 선진화하고 고객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수북이 쌓여 회장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마사회는 지난해 10월 ‘대한민국 훌륭한 일터상’ 시상식에서 공공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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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사장이 내건 자릿세는 대리 이하 1인당 3천원, 과장 이상 1인당 5천원이었다. 정 사장은 직원들이 사진을 찍는 동안 직접 소품을 챙겨주고, 표정 연출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벤트 뒤 정 사장은 직원들이 낸 자릿세만큼 금일봉을 내 사내 사회공헌 담당 부서에 이웃돕기 성금으로 기탁했다.
정 사장은 “사장실 문턱은 은행 문턱보다 낮아야 합니다. 그래야 경영진과 직원들이 소통할 수 있어요. 우리 직원들은 앞으로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의 CEO가 될 사람들입니다. 사장실에서의 작은 추억이지만, 우리 회사 CEO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매우 멋진 경험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기업의 임직원은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된다. 물론 정 사장도 넥타이를 잘 매지 않는다. 정장을 입되 넥타이는 매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사무 복장이다. 회사에선 3주 동안 전문 스타일리스트의 특별 강의를 마련하고 개개인에게 가장 잘 맞는 스타일 연출을 위해 1대1로 컨설팅을 받게 했다.
이같은 기업문화는 ‘튀는 행동’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정 사장은 “튀는 행동의 이면에는 경영자의 철학과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가 녹아들어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그런 행동이 나타나게 만드는 경영철학과 기업의 가치 체계죠. 바로 직원 존중의 정신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정 사장은 전자우편으로 직원들과 소통한다. 자신이 1~2개월에 한 차례씩 ‘직원들께 드리는 보고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전 임직원에게 발송한다. 회사의 중점 추진 과제, 미래 전략과 비전을 직원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다. 정 사장은 “직원들은 회사에 인생을 기탁한 분들이죠. 직원들을 책임지고 있는 CEO는 회사의 정확한 정보를 직원에게 투명하게 보여줘야 해요”라고 말한다.
정 사장의 의사소통 방식은 회의에서도 드러난다. 새로운 브랜드 출시 등 회사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대해선 임원이 참석하는 ‘포커스 미팅’을 한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좌석 배치는 자유롭다. 흔히 말하는 ‘상석’이 없다. 오는 순서대로 앉고 싶은 데 앉으면 된다. 포커스 미팅 전날 참석자들에게 전달되는 회의 자료는 5장을 넘지 않는다. 자료에는 회의 주제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이 있을 뿐 구체적인 결론은 언제나 치열한 논쟁 끝에 나온다. 정 사장은 “임원들의 승진을 좌우하는 가장 큰 것은 실적입니다. 두 번째가 바로 회의에 얼마나 열정적으로 참여하냐입니다. 회의에서 발언하지 않는 사람은 잘릴 수도 있습니다”라며 웃었다.
1.8%의 초라한 시장점유율로 시작한 현대카드·현대캐피탈은 이같은 기업문화를 발판 삼아 5년 만에 점유율 13.2%라는 7배 성장을 일궈냈다. 이런 노력 덕에 지난해 한국능률협회가 조사한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 신용카드 부문에서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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