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과 경찰, 국정원 등 3대 사정기관장이 1월2일 내놓은 신년사 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법무부 장관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입이 모은 대목은 ‘공안통치 강화’였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친북좌익’ ‘발본색원’이라는 표현을 썼다. 김성호 국정원장 역시 안보 확립을 강조했고, 어청수 경찰청장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국가 정체성을 뒤흔드는 세력에는 경찰이 중심이 되어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한 법무부 장관도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부정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공안정국의 부활 조짐은 도처에서 드러났다. 검찰은 이르면 1월 말 대검찰청 공안3과를 부활시킬 계획이다. 대검 공안3과는 2005년을 끝으로 사라졌던 부서다. 서울중앙지검에는 사이버범죄수사부(가칭)도 신설된다. 촛불집회 때 위력을 발휘했던 사이버 집단행동이 위축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경찰은 올해 경찰관 기동대 5천 명을 새로 선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 진압이 이들의 주요 임무다. 경찰은 지난해 ‘백골단’ 부활 논란에도 이들 시위 진압 전문요원 1400명을 처음으로 뽑았다. 게다가 이철우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국정원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국정원의 공안 기능도 크게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사정기관장들이 새해 벽두부터 공안정국 분위기를 띄우고 나선 것이다. 우려는 현실화됐다.
2008년 12월31일 촛불시위대에 대한 경찰 대응이 그랬다. 이날 저녁 8시30분께 서울 종로 평화박물관 앞에 전교조 해직교사가 모였다. 전교조 등 시민단체는 이날 자정이 되면 노란 풍선 5천여 개를 하늘로 날려보낼 계획이었다. 경찰은 풍선을 시위용품으로 간주하고 마구 빼앗았다.
밤 10시, 이번에는 민생민주국민회의(민민국) 등 ‘MB악법 저지 48시간 국민행동’이 촛불집회를 위해 탑골공원 앞에 모였다. 집회는 무산됐다. 촛불시위대가 모이자마자 경찰이 사방을 포위해버렸기 때문이다. 집회도 열지 못한 채 갇힌 시민들이 보내달라며 항의했다. 경찰은 깃발과 풍선, 손팻말 등 시위용품을 내놓기 전까지 통행을 허락할 수 없다며 맞섰다. 결국 일부 시민은 집에 가기 위해 탑골공원 담장을 넘었고, 시위대는 풍선 등을 모두 압수당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국회에서 MB악법 저지농성을 벌이던 1월4일 새벽, 국회 앞 상황도 흡사했다. 김아무개(36)씨는 그날 국회 근처에서 촛불을 들고 ‘걷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그냥 걸었다. 1월3일 자정부터 촛불시민 몇 명이 10m 거리를 두고 국회도서관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 사람들 고착시켜’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방패 든 경찰이 우리를 가운데 놓고 ㄷ자 형태로 감금했다. 여자친구랑 몇 명이 항의를 하니까 누군가 ‘저놈 잡아넣어’라고 말해 체포됐다. 그게 전부다.”
이아무개(46)씨는 그보다 3시간 전 국회 앞에서 경찰이 망가뜨린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 변상을 요구하다 붙들려갔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국회 앞 국민은행 건물 화단에 앉아서 PMP로 TV를 시청하다 일을 당했다. “경찰의 통행을 방해했다면 모를까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다 나를 쳤다. 이 와중에 들고 있던 PMP가 떨어지면서 망가졌다. 20분 정도 쫓아다니면서 물어달라고 하니까 변상은커녕 되레 나를 잡아넣었다.”
김씨와 이씨는 연행 직후 꼬박 48시간 동안 영등포경찰서에서 조사받았다. 김씨는 집시법 위반 혐의, 이씨는 공무집행방해 혐의를 받고 있다. 수사는 1월9일 현재 진행 중이다.
경찰은 시시비비는 법정에서 따지라는 태도다. 영등포경찰서 관계자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촛불을 들고 그냥 걸어간 사람은 집시법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현장에서는 집시법 위반이라 본 것”이라며 “판례라는 잣대를 들이댔을 때 경찰이 무리하게 체포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건 법정에서 가리면 된다”고 밝혔다. 이씨에 대해서는 “PMP가 망가진 사안은 형사가 아니라 민사로 가릴 문제”라며 “현장에서 112 신고를 해서 해결했어야 할 일인데, 경찰들을 쫓아다니며 항의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대졸 실업자를 ‘체제 위협 세력’ 간주정면 충돌을 향해 치닫던 공안기관과 시민사회는 1월6일 여야가 쟁점 법안 처리에 합의하면서 다소 진정됐다. 촛불의 한 축을 담당했던 언론노조는 파업을 잠시 중단했다. 연말연초 산발적으로 피어올랐던 촛불도 잠잠해졌다.
평화는 지속될까. 정부와 시민사회 모두 지금의 고요함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선 정부부터 ‘체제 위협 세력’ ‘친북좌익’ ‘진보좌파’ 등 자극적이거나 이념적 용어를 남발하며 시민사회를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 대졸 실업자가 쏟아지고 중소기업의 부도가 속출하면서 현 정부와 체제에 대한 위협이 가해질 것이란 정정길 대통령실장의 최근 발언은 이명박 정부의 현실 인식을 잘 보여준다. 정부가 대졸 실업자를 언급하는 경우는, 주로 실업대책을 언급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현 정부는 대졸 실업자를 잠재적인 ‘체제 위협 세력’으로 간주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1월6일 “지금 일부 법안을 두고 마치 촛불집회 때처럼 소위 진보좌파들이 결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일부 법안이란 언론관계법과 사이버모욕죄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보통신망법, 마스크 처벌 조항을 담고 있는 집시법, 광범위한 휴대전화 도·감청을 허용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국정원법 등을 가리킨다.
정부·여당의 논리대로라면 현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진보좌파가 된다. 이들이 거리로 나오면 ‘친북좌익’이 되기 십상이고, ‘체제 위협 세력’인 실업자들과 함께 이들은 모두 ‘국가 정체성을 뒤흔드는 세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시민사회는 정부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경제위기 극복에 자신이 없는 정부가 공안정국 조성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돌리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계없이, 현 정부가 MB악법을 포기하지 않고 일방적 구조조정 등으로 서민과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면 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시민사회의 입장이다.
노동계 움직임이 일단 심상치 않다. 무엇보다 고용 불안이 최대 화두다. 이미 상당수 기업이 감산과 휴업 등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는데다 정부마저도 2월 임시국회에서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처리할 계획이다. 60살 이상 고령자에게 최저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줄 수 있도록 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도 함께 상정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정부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근로기준법 완화 카드까지 꺼내든다면 노·정 충돌은 시간문제다.
애초 민주노총은 3월 초 총력투쟁 선포대회를 가질 계획이었다. 경제위기에 따른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행태는 부당하다는 것이 민주노총 주장이다. 민주노총의 총력투쟁 시점은 이르면 2월로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다. 우문숙 민주노총 대변인은 “정부가 2월 임시국회에서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법은 물론 언론관계법 등 MB악법을 또다시 강행 처리하려고 시도한다면 전체 노동자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2월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2월25일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1주년이 되는 날이다. 만약 MB악법이 2월 임시국회에서 강행 처리되고, 이 대통령 취임 1주년이 맞물리는 것과 동시에 정정길 대통령실장 말처럼 ‘체제 위협 세력’인 대졸 실업자가 쏟아진다면 촛불이 조기 점화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400여 개 시민사회단체와 진보·개혁 정당이 모인 민생민주국민회의의 관심도 2월 임시국회에 쏠려 있다. 민민국의 올 상반기 핵심 과제 역시 MB악법 저지와 서민생활 지원정책 촉구다. 안진걸 민민국 정책네트워크 팀장은 “촛불은 몇몇 단체나 인사가 제안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예상하기 쉽지는 않지만, 이명박 정부가 지금처럼 MB악법을 밀어붙이고 청년실업과 고용불안까지 겹친다면 노동자와 서민의 분노는 어떤 방식으로든 폭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규모 군중시위 피할 수 없을 것”2008년 제1차 촛불집회에 이어 올해도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결과는 심각해질 수 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을 통해 이명박 정권의 통치체제에 변화가 없다면 조만간 대규모 군중시위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그 형태가 촛불군중일지 아니면 횃불 들기도 마다 않는 배고프고 성난 군중일지는 예측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일단 촛불에 불이 켜지면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도 촛불이 타오르는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그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한 교수는 “2008년 촛불이 정부에 대한 기대치가 그나마 남아 있는 상태에서 꺼졌다면, 지금은 이명박 정부가 경제위기 등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서 터지는 것”이라며 “현실에 대한 기대를 접었을 때 대중은 극단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의 공안정국 조성 움직임과 시민사회의 불만은 마주 보고 달리는 기관차와도 같다. 해법은 하나다. 어느 한쪽이 먼저 기관차에서 내리는 것이다. 양보하거나 굴복하는 경우다. 그게 아니라면 정면 충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변하지 않는 이상 정면 충돌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있다. 시민사회가 공안기관의 탄압에 무릎을 꿇은 사례는 없기 때문이다.
|
문제가 된 신년사 대목은 이렇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인하면서 친북좌익 이념을 퍼뜨리고 사회 혼란을 획책하는 세력을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특히 올해는 경제정책과 관련된 노사분규나 불법 집단행동이 대폭 증가할 것입니다.”
지난 10년간 역대 검찰총장은 어떤 신년사를 내놓았을까. 검찰총장들이 신년사에서 강조한 부분은 대개 검찰의 혁신과 개혁, 정치 중립이었다. ‘검찰은 권력의 시녀’라는 시민사회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2000년 박순용 당시 검찰총장의 새해 첫 목소리는 ‘정치 중립’이었다. 박 총장은 “외압과 회유를 단호히 배격해 검찰 임무 수행과 관련해 어떤 의혹이나 불신도 제기될 여지가 없도록 하겠다”며 “필요하다면 검찰 조직과 기능을 대폭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박 총장은 이듬해 신년사에서 “근거 없는 의혹까지도 수사하라는 것은 법과 수사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국민의 인권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는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말했다.
신승남 검찰총장도 2002년 ‘발본색원’이라는 단어를 활용했다. 하지만 대상이 달랐다. 신 총장은 ‘정의롭고 투명한 신뢰사회’를 1차적으로 강조한 뒤 “강력, 마약, 환경, 식품 등 민생침해 사범을 철저히 단속함과 동시에 사회 곳곳에서 근절되지 않고 있는 비리를 발본색원하겠다”고 다짐했다. 검찰 개혁의 의지도 빠뜨리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첫해인 2003년 김각영 검찰총장은 “자발적 개혁에 대한 확실한 목표를 세워 능동적으로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노 대통령이 검찰 지휘부에 대해 불신을 드러내자 스스로 옷을 벗었다.
2004년과 2005년에는 송광수 검찰총장이 신년사를 내놓았다. 특히 그는 2004년 청와대가 검찰의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 결과에 유감을 표시한 것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법치주의 확립과 투명하고 공정한 검찰권 행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에 사건 실체의 규명과 무관한 고려는 배제한 채 진실의 발견과 정의의 실현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신년사를 남겨 검사들의 신망을 받았다. 송 총장은 이듬해 신년사에서는 인권과 검찰 개혁을 강조했다.
참여정부 후반기인 2006~2007년 검찰을 이끈 정상명 검찰총장은 일관되게 권위주의로 상징되는 검찰의 조직문화 변화를 주문했다.
그리고 참여정부 마지막 해인 2008년 검찰총장은 신년사에서 ‘원칙과 정도의 검찰, 품격의 검찰’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품격이 낮은 검찰 수사는 국민의 냉소와 불신을 초래한다”며 “이러한 현상이 검찰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제도적 견제장치의 도입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임채진 검찰총장이다.
그랬던 임 총장이 불과 1년 사이에 ‘친북좌익’ ‘발본색원’을 운운한 사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지난 10년간, 아니 자신이 검찰을 지휘한 지난 1년간 거의 보이지 않았던 ‘친북좌익’이 갑자기 보이기라도 했다는 뜻일까. 분명한 것은 검찰총장 신년사만 놓고 본다면 우리 사회가 10여 년 전으로 돌아갔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도수치료 본인 부담 3만원→9만5천원…정부안 들여다보니
[단독] “김 여사에게 돈 받으면…” 검찰, 미래한국연구소 채무이행 각서 확보
서울 ‘11월 폭설’ 117년에 한번 올 눈…원인은 2도 높아진 서해
첫눈 21㎝ 쏟아진 서울…“버스가 스케이트 타, 제설 덜 돼”
112년 최장수 남성…매일 신문 읽었고, 즐겨 한 말은 “고마워요”
‘시험 유출’ 연세대, 결국 12월8일 수시 논술 추가시험 치른다
70년 성실한 삶 마치고 “생명 살리는 소중한 나눔” 실천한 안명옥씨
분당 샛별·일산 백송 등 1기 새도시 3만6천가구 먼저 재건축한다
서울양양고속도로 눈길서 5대 추돌…1명 사망, 6명 부상
‘정년이’ 큰일 했다…여성국극 연일 매진, 신작 제작도 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