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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 펀드를 모의법정에 세우다

리먼 형제· 유사 키코를 둘러싼 창과 방패의 공방으로 재판 파행 거듭
등록 2008-11-21 10:56 수정 2020-05-03 04:25
깡통 펀드를 모의법정에 세우다

깡통 펀드를 모의법정에 세우다

반토막은 필수, 열토막은 선택이라는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펀드 대란은 ‘펀드런’(대량환매)이 아닌 ‘펀드슈’(소송)로 구체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올 들어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펀드 관련 민원은 11월14일 현재 700건에 육박하고, 소송이 진행 중이거나 준비 중인 펀드만 10곳을 넘어섰다. 증권사 창구에서 직원들에게 고성을 지르며 몸싸움을 벌이던 과거의 활극이 이젠 금융기관의 ‘불완전 판매’에 대한 금융 소비자들의 권리장전 운동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지난 11월11일 광고 문구 조작 논란을 빚은 ‘우리파워인컴펀드’의 가입자에게 판매회사가 손실액의 50%를 배상하라는 금융감독원의 조정 결정으로 펀드 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펀드 분쟁의 다음 차례로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방아쇠를 당겼던 미국 투자회사 리먼브러더스 파산의 유탄을 맞았거나, 수출 중소기업에 재앙을 내린 키코(KIKO)와 유사하게 환헤지로 깡통을 차게 된 비운의 펀드들이 지목되고 있다. 은 이들 펀드 가입자들과 소송 대리인의 주장은 물론 문제의 펀드를 판매한 회사 쪽 소송 대책반의 반박까지 들어본 뒤 사건의 쟁점을 재구성해 지상 법정을 열었다.
최대한 팩트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지만 원고와 피고가 실제로 대면해 현실 법정에서 일합을 겨룬 것은 아니므로 ‘팩션’에 가까울지 모른다. 또 앞으로 있을지 모를 금융당국의 분쟁 조정이나 법원 판결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펀드 이름과 등장인물을 가명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다큐드라마’로도 읽힐 수 있다. 사건의 본질을 모의 법정의 방청석에서 바라보듯 쉽게 이해하자는 취지다. 따라서 누가 도덕적으로 해이했고 누가 법적으로 일탈했는지에 대한 최종 판결은 배심원인 독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편집자

2008년 11월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지법 736호실. “재판장님이 나오십니다. 모두 기립해주세요.”

재판장=사건번호 펀-3698번, 펀-3699번의 병합 심리 재판을 개시합니다. 먼저 원고 쪽 변론하세요.

원고 쪽 변호인=요즘 심각한 펀드 손실로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원고 한가위씨로부터 그동안의 경위를 들어보겠습니다.

원고 한가위=지난해 6월 만기가 된 적금을 찾으러 은행에 갔는데 창구 직원이 한국전력과 우리금융이 편입된 증권에 투자하래요. 뭐, 주가가 크게 떨어지지만 않으면 두 자릿수 이율이 보장되는데 둘 다 공기업이라 원금 손실이 안 난다고 해 솔깃해서…. 그런데 한가위 연휴였던 9월15일 워너브러더스, 아니 리먼브러더스가 망하는 바람에 지금 원금 2천만원 넣은 계좌에 달랑 2만6천원만 남아 있어요. 더 화나는 것은 환매 중단 통보를 휴대전화 문자로 보내더라고요.

원고 쪽 변호인=리먼브러더스 파산의 영향으로 현재 99%가 넘는 원금 손실을 보고 사실상 휴지가 된 펀드 2개가 있습니다. 기초자산의 주가 수준과 상관없이 리먼이 발행한 주가연계증권에 집중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발행사의 신용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판매회사들에 법적 책임이 있습니다. 특히 원고가 가입한 펀드는 모집 당시엔 발행사가 BNP파리바로 되어 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객 모르게 신용등급이 낮은 리먼으로 변경됐는데 이는 투자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사안입니다. 운용회사와 판매사는 연대책임을 지고 원금은 물론 이자까지 포함해 돌려줘야 합니다.

원금 2천만원이 2만원, -99%

피고 쪽 변호인=펀드 모집 당시에 리먼브러더스는 철옹성이었습니다. 천재지변과 같은 이번 금융위기를 일찌감치 예견할 수 있는 펀드 운용기관이 과연 있었을까요? 자산운용사와 판매사 쪽 대표로 나온 피고 리먼수씨, 그렇지 않습니까?

피고 리먼수=발행사 변경에 무슨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처음 목표한 규모보다 많은 돈이 들어오니까 BNP파리바에서 못 받겠다고 해서 모집된 규모만큼 수익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발행사를 찾던 중에 마침 똑같은 유형의 상품이 리먼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변경한 것이죠. 발행사 변경은 금융감독원의 승인을 받았고 판매 은행에도 보고했기 때문에 법적인 하자는 없습니다.

방청석=우~ 집어치워라!

재판장=조용히 하세요. 펀드 피해자 카페 회원들이 많이 나오신 모양인데 계속 소란을 피우면 퇴정시키겠습니다.

원고 쪽 변호인=사전에 고객의 동의를 받지 않고 발행사를 변경한 게 합법이라는 건가요?

피고 리먼수=변경 사실을 즉시 통지하지 않은 점에 대해선 책임을 인정합니다. 판결이 나오면 적절한 조처를 취하겠다는 게 회사의 공식 입장입니다. 단, 나머지 한 펀드는 판매 당시부터 발행사를 리먼으로 명기한 만큼 배상 책임이 없습니다.

원고 쪽 변호인=재판장님, 재정 증인 조기상을 신청합니다.

재판장=네, 채택합니다. 증인 선서한 뒤 신문하시죠.

리먼브러더스 파산 영향으로 휴지가 돼버린 한 파생상품 펀드의 투자설명서. 설명서엔 발행사가 리먼브러더스라는 구절이 전혀 나와 있지 않고 하단 쪽 ‘거래 상대방’이란 항목의 괄호 안(글씨를 확대한 부분)에 영어로 표기돼 있을 뿐이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영향으로 휴지가 돼버린 한 파생상품 펀드의 투자설명서. 설명서엔 발행사가 리먼브러더스라는 구절이 전혀 나와 있지 않고 하단 쪽 ‘거래 상대방’이란 항목의 괄호 안(글씨를 확대한 부분)에 영어로 표기돼 있을 뿐이다.

조기상환 충족됐는데 지급 보류

원고 쪽 변호인=증인 조기상씨는 지금 배상을 할 수 없다는 그 펀드에 가입했지요?

증인=네, 2년 전에 가입했는데요. 제가 한가위씨보다 더 기막힙니다. 추석 연휴 직전인 9월12일 드디어 조기상환 조건이 충족돼 저 조기상은 엿새 뒤 원금이랑 연 11.5% 이자를 받게 됐어요. 그런데 추석을 쇠고 나니 갑자기 상환이 무기 연기됐다는 연락이 오더군요. 안전하다고 권유했던 그 은행원이 자기 입으로 원금까지 모두 날릴 수도 있다고 말하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요? 차라리 추석 연휴가 없었다면 빨리 환매받았을 텐데… 리먼이 며칠만 더 버텨줬어도…, 별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원고 쪽 변호인=한국전력과 현대차 주식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이 펀드의 문제는 피고의 회사가 운용사인데도 조기상환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피고의 회사는 이 펀드에 편입된 주가연계증권의 발행사인 리먼이 돈을 주지 않는다고 자기들도 상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발행사가 자신이 아닌 리먼이라는 점을 수익자들에게 고지하지 않았습니다. 투자설명서에도 발행사가 리먼이란 사실은 적시되지 않았고 ‘거래 상대방’이란 알쏭달쏭한 항목의 괄호 안에 리먼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이 펀드 가입자들은 두 주식의 가격이 지나치게 하락하지만 않으면 원금이 보존되는 것으로 알고 운용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투자했습니다. 잘 모르는 외국 회사의 신용이 펀드의 상환을 좌우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겠지요. 따라서 조기상환 금액을 피고의 회사가 지급해야 마땅합니다.

거래 상대방 위험 놓고 해석 이견

피고 쪽 변호인=투자설명서에 거래 상대방의 신용상태 악화에 따라 원리금을 제때에 받지 못할 위험이 있다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리먼이 발행사로 되어 있었다고 해서 가입을 안 했을까요? 당시 리먼의 신용등급은 A+였습니다.

재판장=자, 진정들 하시고 양쪽의 주장이 충분히 개진됐으니 다음 사건 변론으로 넘어갑니다.

원고 쪽 변호인=다음 원고 황차손씨, 해외펀드 반토막에다 환헤지 손실로 깡통계좌가 됐다는데 직접 경위를 설명해주시죠.

원고 황차손=2007년 11월에 중국펀드에 가입했는데요. 창구 직원이 환헤지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 한대서 이게 뭐하는 데 쓰는 거냐고 물었더니, 현재 돈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는 안전장치라고 했고 선택사항이란 말은 안 했습니다. 그런데 만기를 20일쯤 남겨둔 올 10월 은행에서 전화가 와 환헤지로 손실이 나서 2천만원을 입금하지 않으면 펀드를 강제 환매해 변제한다는 갑작스런 통보를 했습니다. 원금은 6천만원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수치가 나올 수 있습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대출을 받아 집어넣긴 했는데… 환율이 치솟던 8~9월에는 왜 그런 위험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원고 쪽 변호인=국내 운용사가 출시하는 해외펀드는 대부분 펀드 자체 안에서 환헤지가 이뤄지고 펀드 순자산 증감에 맞춰 탄력적으로 헤지 규모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운용회사가 외국에 있는 역외펀드(Off-Shore)는 자체 환헤지가 불가능해 가입자가 원하면 판매사가 선물환 계약을 통해 대신 헤지를 해주는데, 주가와 환율 변동에 신축적으로 대응하지는 못합니다. 판매회사가 일률적으로 자산의 100%를 환헤지한 게 화근입니다. 주가가 폭락하면 펀드의 순자산 가치가 급감하면서 오버헤지로 인한 손실이 발생해 원금을 모두 까먹는 깡통 펀드까지 발생합니다. 중소기업의 키코 사태처럼 환율 하락 때 손실을 보전할 수 있다는 설명만 하고 반대의 경우에 나타날 위험에 대해선 두루뭉술 넘어간 겁니다. 펀드 가입 때 선물환 계약 사실을 몰랐거나 환율이 급등하면 추가 비용을 내야 한다는 설명을 듣지 못해 손해를 봤다면 판매회사 쪽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소견입니다. 피고 선물환씨, 금융지식도 전무하고 은행예금 말고는 모르는 노인이 평생 모은 노후자금을 은행 직원의 말을 믿고 역외펀드에 넣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국내 최대 규모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인사이트 펀드도 중국에 편중 투자했다는 이유로 가입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파생상품이 아닌 일반 주식형인 인사이트 펀드가 소송에 휘말릴 경우 국내 펀드업계에 미치는 파장은 엄청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사진은 미래에셋증권 본점.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국내 최대 규모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인사이트 펀드도 중국에 편중 투자했다는 이유로 가입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파생상품이 아닌 일반 주식형인 인사이트 펀드가 소송에 휘말릴 경우 국내 펀드업계에 미치는 파장은 엄청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사진은 미래에셋증권 본점.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고객 거부하는데 어떻게 계약하나

피고 선물환=고객이 거부하는데 환헤지를 강제로 했겠습니까? 투자설명서를 교부했고 선물환 계약서 쓴 것 다 있어요. 펀드 상담 당시 환율 전망이 900원대 초반이었어요. 이 일을 4~5년 해오면서 환율 헤지로 고객들에게 이익을 줬어요. 글로벌 금융위기로 환율이 이상 급등한 건데… 의사가 몸에 좋은 약을 처방하면서 10만분의 1 확률로 사망할 수 있다는 점을 환자에게 고지하나요?

피고 쪽 변호인=극단적인 비유는 유리하지 않아요. 흥분 가라앉히시고….

피고 선물환=네, 죄송합니다. 은행의 수익을 위해 선물환 계약을 체결한 게 아니라 고객의 환위험을 방어하려는 선의로 한 것이라고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피고 쪽 변호인=환헤지 계약 서류에 고객 서명을 받아뒀고 전화 상담 내용도 녹음돼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법적으로 고객의 펀드 손실 지원은 불가능합니다. 환차익이 날 때는 고객이 가져가고 손실이 났을 때 보전을 해준다면 은행은 영리회사가 아닌 거죠. 환손실이 생겼다고 트집을 잡는 건 곤란합니다.

원고 황차손=트집이라니요? 아까 리먼 변론 때도 그러더니 피고 변호인도 한국의 리만 형제와 같군요. 재판장님, 강만수 장관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묻지마 판매냐 묻지마 투자냐

재판장=원고, 지금 진술은 명예훼손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강 장관은 본안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므로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겠습니다.

원고 쪽 변호인=재판장님, 원고 황차손씨가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피해를 봤다는 울분을 토로한 걸로 받아들여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원고는 투자설명서를 받은 적이 없고 제대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1분 만에 계약서에 서명한 겁니다. 문제는 외국계 역외펀드는 개방형이라 만기가 없는데 판매사는 1년마다 선물환 재계약을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에서 거래되는 선물환의 만기가 대부분 1년짜리여서 그렇습니다. 장기 계약이 불가능해 환율이 오르면 1년 뒤에 차액을 투자자가 토해내야 하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더 웃긴 것은 선물환 계약을 하면서 은행 쪽이 펀드 계좌에 질권을 설정한다는 겁니다. 나중에 손실나면 보전하기 위한 것으로, 판매사가 위험한 계약임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뭡니까? 펀드 판매의 상도의에도 이른바 ‘3불 정책’이 있습니다. 불충분한 설명, 부당한 투자 권유, 묻지마(불문) 판매가 그것입니다.

피고 쪽 변호인=3불 중에서 한 가지가 틀렸네요. 묻지마 판매가 아니라 묻지마 투자이지요.

원고 쪽 변호인=불완전 판매는 투자자 피해뿐만 아니라 펀드 산업 전체 신뢰도에 부메랑이 된다는 점을 판매사들이 알고 자성해야 합니다. 판매 인센티브 제공 같은 과당경쟁에 대해 내부 고발을 해주실 용기 있는 직원분은 안 계실까요?

피고 쪽 변호인=또 본안과 상관없는 발언을 하시네요. 여기는 신성한 법정이지, 100분 토론장이 아닙니다.

재판장=안 되겠습니다. 원고·피고 쪽 모두 냉정을 되찾지 못하고 있어 더 이상 재판을 진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달 15일 2차 기일에 뵙겠습니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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