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국내외 경제 여건이 악화되는 가운데,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끝내 외면했고, 기륭전자와 코스콤 등 장기투쟁 사업장은 여전히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기업 프렌들리’한 이명박 정부의 철학이 갑자기 바뀔 것 같지도 않았고, 그건 경찰 수배를 피해 조계사로 몸을 피한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의 신분도 마찬가지였다.
10월21일 민주노총 16차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열렸다. 회의가 열린 곳은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사무실이 아닌 조계사였다. 최근 노동계가 맞닥뜨린 위기감은 회의 분위기에서도 그대로 묻어났다. 이날 회의에는 민주노총 산하 각 산별연맹위원장과 지역본부장, 총연맹 실장급 간부들이 모였다. 이석행 위원장이 입을 뗐다.
“이명박 정권이 위기의식을 부추기며 뉴라이트 중심의 제3노총을 계획 중인데,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자의 대표성을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전략적 과제를 제대로 설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규직 노동자는 연대에 대해 미동도 하지 않는 상황인데, 전략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논의해봤으면 합니다.”
이 위원장은 모두발언에서도 연대와 조직화, 그리고 실천을 계속 강조했다. 그의 제안에 각 산별연맹 위원장과 지역본부장들이 입을 열었다. 그들이 입을 모은 대목도 연대였고, 단결이었다.
“공기업은 절반 이상이 주식을 하는데, 조합원들도 주식으로 큰 손해를 봐서 노조, 운동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다. 조합원들은 단결할 힘도 없다. 운동을 이끌어갈 사람들이 단결해야 한다. 서로 합쳐져야 하는데 여전히 찢어지고 있는 분위기다. 현장의 문제가 심각하다.”(임성규 공공운수연맹 위원장)
“정부와 창구도 없는 상태에서 현장은 (지도부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실제 힘이 돼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민주노총 위기의 정점에 와 있는데 말만 대동단결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버려야 한다.”(이상진 화학섬유연맹 위원장)
“위기에는 공감하는데 어떻게 대처해나갈 것인가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바꿔야 한다고 하는데 작은 것이라도 바뀌어야 한다.”(김영진 부산본부장)
오후 5시30분에 시작한 회의가 마무리된 것은 밤 12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노동계가 맞닥뜨린 안팎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거의 일치했지만, 처방은 두루뭉술했다. 이날의 성과는 11월9일 전국노동자대회에 7만 명의 노동자를 모은다는 결의였다. 한 참가자는 “우리 조직이 어떤 상태인데 전국노동자대회에 7만 명이 모인다는 건지, 우리 사정도 모르면서…”라고 말했다.
노동계가 맞닥뜨린 안팎의 위기 가운데 외생적 요인은 우선 이명박 정부의 친기업적 노동정책이다. 여기에 최근 국내 경제 여건 악화가 얹혔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명박 정부가 노동계를 ‘과도하게’ 탄압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노동계 내부에도 별로 없다.
촛불 때문에 반노동 공세 어려워져노동정책을 말할 때 이명박 정부는 흔히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영국의 대처 정부와 비교됐다. 노동조합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1970년대 후반 집권에 성공한 대처 정부는 공권력을 동원해 강성노조인 탄광노조를 무력화한 것을 시작으로 노동계를 초토화시켰다. 국영기업 민영화와 노동시장에 대한 법적·행정적 규제를 가한 대처 정부는 파업 찬반에 대한 우편투표 도입으로 파업 자체를 절차적으로 규제했을 뿐 아니라 동정파업과 정치파업을 금지했다. 최저임금제와 클로즈드숍 제도도 폐지했다.
대처 정부의 급진적 반노동 공세에 비해 이명박 정부의 노동정책이 더 과격하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별로 없다. 물론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등 노동계 지도부에 대한 수배와 구속이 잇따르고 있지만, 이는 정세 변화에 따른 측면이 크다. 제도적으로 노동조합의 손발을 묶는 시도 가운데 아직 구체화된 것은 별로 없다는 뜻이다.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기초교양학부)는 “영국 대처 정부 등 과거 외국 우파 정권의 경험에 비춰보면,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는 노동운동 내부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이 안 되는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10월22일 만난 민주노총 한 산별노조 간부의 말은 노동계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솔직히 이명박 정권이 들어설 때 ‘우리는 이제 다 죽었다’ 이런 생각을 한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정권 초기에 촛불이 석 달 가까이 타오르면서 노동계에 대한 공세도 많이 줄어든 거죠. 함부로 밀어붙이기 어려워진 겁니다.”
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결국 노동계 내부로 수렴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연대의 고리가 끊어졌다는 지적이 노동계로서는 뼈아프다. 10월17일 금속노조 현대차지부가 비정규직에게 노조 문호를 개방하는 규칙 개정안을 부결시킨 것이 최근 ‘정규직 이기주의’의 상징적 사건이었지만, 이런 사례는 많다.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 74명이 겪는 고통은 더욱 심하다. 2007년 6월 회사 쪽의 직접고용 회피에 반발하며 시작한 이들의 파업은 10월25일로 410일째를 맞았다.
이들은 지난 7월18일 코스콤을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이기면서 잠시 희망을 가졌다. 서울남부지법이 “66명이 근로자 지위에 있다”고 판결하면서 코스콤을 직접적인 사용자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스콤은 오히려 항소로 맞서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조와 이들이 소속된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노조는 회사 쪽보다 오히려 정규직 노조가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무금융노조에 따르면 지난 7월 법원의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판결이 나기 이틀 전, 정연태 전 사장이 비정규직 농성장에 직접 찾아와 “비정규직 76명을 직접 고용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지만 정규직들이 반대한다”며 “회사와 정규직, 비정규직 등 3자가 직접 대화를 해보자”고 말했다. 서울 마포 홀리데이인호텔에서 열리기로 했던 3자 대화는 성립되지 않았다. 정규직 노조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지난해 11월8일 “코스콤 노조가 비정규직지부의 정규직화 투쟁을 외면했다”는 이유로 코스콤 노조를 제명했다. 코스콤 정규직 노조는 곧바로 한국노총 공공연맹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대응했다. 코스콤 노조는 민주노총을 떠나면서 “(정규직) 노조가 그동안 기간제 노동자를 위해 기업문화와 정서에 따라 고용안정과 복지증진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민주노총은 투쟁과 일방적 연대만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코스콤 사태는 노동계에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으로 남을 전망이다. 비정규직이 회사 경영진만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들과도 대립해야 한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형철 사무금융노조 조직실장은 “코스콤 사태는 정규직 노조의 의지만 있다면 진즉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며 “평균 9100만원이 넘는 연봉을 받는 정규직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별도의 직군을 마련해서 직원으로 인정만 해달라는 것이 비정규직의 요구”라고 말했다.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외면한 사태는 2001년 노동절 광주 캐리어공장에서도, 2004년 현대중공업에서도, 2005년 GM대우차 창원지부에서도 벌어졌다. 캐리어공장에서는 농성 중이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구사대 대열에 일부 정규직 조합원들이 섞여 있었고, 2004년 현대중공업에서도 일부 대의원이 하청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두 노조는 민주노총 금속연맹으로부터 제명당했다. 그런가 하면 2005년 9월 GM대우차에서는 ‘불법파견 노동자 정규직화’를 묻는 투표에 34%만 찬성표를 던졌다. 물론 부결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하지 못하는 원인을 정규직 노조에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도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직후 거침없이 이뤄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여파로 정규직 노동자들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즉, 자본은 노동조합에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사용 등 두 개의 카드를 내놓고 선택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과정은 이렇다. 정리해고를 단행한 빈자리에 비정규직을 채우는 현실을 노동조합은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노조 조직력 약화로 이어졌고, 노조의 사회적 발언력도 약화되는 것이 불가피했다. 게다가 산별노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한국적 현실도 각 단위노조 구성원들에게는 질곡으로 작용했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노동운동이 연대의 위기를 맞은 것도 사실이고 일부 정규직 노조가 도덕적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처럼 산별노조의 단체교섭이 확고한 효력을 갖지 못하는 노동 환경도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며 “일부 대기업 노조의 ‘우리도 어려운데 언제까지 비정규직까지 챙길 수 없지 않냐’는 주장에 일정 부분 진실도 담겨 있다”고 말했다.
‘연대의 고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만 단절된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 지도부와 현장 노동자들의 괴리도 심각하다. 지도부가 언론을 향해 약속한 사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이 10월23일 오전 과의 만남에서 직접 내린 진단이다. 이 위원장은 노동운동의 조직력을 복원하기 위해 2007년 3월26일부터 8월 말까지 약 6개월간 현장 대장정을 시도했다. 규모에 상관없이 전국의 거의 모든 사업장을 찾아다녔다.
실천율은 20~30%에 머물러“의결 단위에서 결의는 잘합니다. 파업이든 사업이든 결의만 해놓고 실천이 안 됩니다. 실천율이 20~30%에 머무는 것이 현실이에요. 이건 조직의 30%만 가동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오죽하면 내가 ‘의결 단위가 물 먹는 하마냐, 스펀지냐’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결정이 전달되지 않거나 전달 과정에서 왜곡되는 거죠.”
민주노총은 2007년 8월21일 그해 말까지 16억원을 모금해 이랜드 뉴코아 조합원들의 생계비로 지원하겠다는 결의를 한 적이 있다. 총 모금액은 11억원이었다. 목표액의 50%를 훌쩍 넘긴 이랜드 모금 사업은 그나마 민주노총이 최근 추진한 사업 가운데 모범사례로 꼽힌다.
노동계 위기에 대해 묻자 이석행 위원장은 작심한 듯, 소통의 실종을 꼽은 것이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민주노총 내부에서도 지도부와 현장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먼 겁니다. (민주노총이) 예비노동자와 조직노동자, 실업노동자 등 모든 노동자를 대표해야 하는데, 그런 게 전략적으로 준비되지 않을 수밖에 없죠.”
연대와 소통의 실종을 말한 그는 “위원장으로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 건데, 이제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말이 곧 노동계의 위기를 그대로 대변해주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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