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23일 아침 8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골든브릿지투자증권 임원회의는 비상이 걸렸다. 전날 미 뉴욕증시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372포인트가 빠진 1만1015로, 나스닥은 94포인트 하락한 2178로 마감했다. 미국 정부가 내놓은 7천억달러 규모의 부실채권 매입 방안의 효과가 의심받고, 국제 유가도 크게 뛰어오르면서 악재로 작용한 탓이었다. 전세계 증시에서 660조원이 증발해버린 9월16일 ‘검은 화요일’을 맞은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미국 증시는 도무지 회복의 가능성을 보이지 않는다.
# 같은날 오전 10시. 집무실로 돌아온 이정원 부사장은 관할 12개 지점에서 보내온 운용수익 보고서를 꼼꼼히 검토한다. 금융시장이 출렁이는 상황속에서 고객들은 자신들이 위탁한 주식이나 부동산의 최근 투자실적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투자처를 제대로 찾지 못한 채 만기가 닥쳐오고 있는 사모투자펀드도 골치다. 가만 생각해보면, 환란 이후 꼭 11년 만에 다시 금융 시스템에 위기가 왔다. 문득 2006년 5월부터 외국인 자금이 국내 증시를 떠나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는 데까지 마음이 쓰인다. ‘왜 다들 미리 알고 대응하지 못했을까.’
# 같은날 오후 4시. 장 초반 일정한 방향을 잡지 못하던 코스피 지수가 1481로 21포인트 반등했다. 미국 증시와는 탈동조화된 셈이다. 외국인이 사흘 만에 매도세를 보였지만, 국내 기관과 프로그램 매수세가 상승 흐름을 이끌어낸 셈이다. 증시가 반짝 좋았다지만, 담보 연장을 요구하는 고객사들의 전화가 이어진다. 그래도 코스피 지수가 90포인트씩 빠지고, 환율이 거의 주식처럼 급등락을 반복하던 일주일 전에 비하면 시장은 많이 안정됐다.
# 같은날 저녁 9시. 이 부사장이 오랜만에 회사 옆 대폿집에서 소매금융 쪽 직원들과 소주잔을 기울인다. 11년 전처럼 지독하게 오래가는 상처가 되진 않을까. 벼락같이 닥쳐온 금융시장 변화에 회사가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어떤 전략을 선택해야 할까. 입에 올리는 주제마다 소주처럼 씁쓰레하다. 문득 국내에서도 부실 금융사가 나타나 구조조정의 광풍이 몰아치는건 아닌가 겁도 난다. 전국증권산업노조위원장으로 외환위기의 한복판을 헤쳐왔고, 투기자본감시센터를 세웠던 이 부사장다운 걱정인지도 몰랐다. “왜 망가졌을까요?” 직원 하나가 빈 잔을 채우며 선문답을 던진다. “쏠린 게 터진 거지.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맡기라지만, 금융은 절대 극단을 달리면 안 돼. 돈이 부동산이든, 인터넷이든, 튤립이든 한곳에 쏠리면 그게 버블이잖아.”
9월16일 1387.75로 곤두박질했던 코스닥 지수는 사흘 뒤엔 한가위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다. 그러나 안정된 목돈 마련 수단이라는 말에 솔깃해 펀드에 쌈짓돈을 집어넣은 서민들은 마이너스 몇십%가 된 수익률로 한숨을 짓고, ‘키코’라는 파생금융상품에 가입했던 중소기업들은 돈줄이 막혀 흑자도산에 이를 지경이라고 호소한다. 세계 금융시장 불안이라는 긴 터널의 초입에 들어선 지금, 가계와 기업들의 살림살이에는 어떤 일들이 빚어지고 있을까. 또 외환거래, 펀드운용, 채권발행 등의 현장에서 일하는 금융권 종사자들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상황일단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돈의 흐름이 막히게 된다. 금융 시스템을 지탱해주는 근본인 거래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상황에선 금융사들이 자금동원력과 담보력이 취약한 기업들에 대한 대출과 투자에 인색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 들어 중소기업 대출 비중을 지속적으로 축소해온 은행들은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엔 아예 물꼬를 막아버린 상황이다. 서울 강남구에 본사를 둔 매출 3천억원대 벤처기업의 박아무개 부사장은 “금융위기 직후 500억원대 새 사옥을 담보로 250억원 정도를 대출하려 했지만, 은행에서 그동안의 관행을 깨고 대출 불가를 통보하더라”면서 “은행들이 외화 차입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알겠지만, 담보까지 확실한 견실한 중견 기업에 원화 대출마저 않겠다는 것은 자기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에 대해 한 시중은행의 자금담당 임원은 “외환시장이나 단기금융시장(머니마켓)에서 달러를 구하기 힘들어졌으며, 있어도 며칠이나 몇 주짜리 초단기 자금”이라며 “이미 올 하반기 들어 일선 영업점에 신규 대출을 자제할 것을 통보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조선업 경기 하락 전망 탓에 가뜩이나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전남 서남부의 중소 조선업체들은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생존의 기로에 처했다. 목포에 위치한 C&중공업은 3조원 이상의 벌크선 60여 척을 수주하고도 1700억원의 시설자금을 조달하지 못해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에 차질을 빚고 있다. 전남 해남군 화원반도 일대 80만 평의 부지에 3천억원을 투입해 조선소를 건설 중인 대한조선도 돈줄이 막히면서 제2독(dock) 건설이 늦춰져 수주한 선박의 납기를 맞추기 힘든 형편이다. 전남 진도군의 고려조선도 벌크선 8척을 수주해 내년 여름부터 중국 선주에게 인도할 계획이었으나, 설비투자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목포 대불공단에 입주한 조선기자재업체 서해마린엔지니어링의 유대형 상무는 “조선사들의 자금경색이 심해지면 이들에게 의존하는 노무도급 업체나 부품업체들이 연쇄적으로 어려워지거나 도산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소연했다.
통화옵션 상품인 키코에 가입한 중소기업들의 사정도 절박해졌다. 이 상품에 가입한 기업은 환율이 급상승할 경우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는데, 최근 외환시장의 수급 불안이 심화되면서 환율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9월25일 키코에 가입한 중소기업 102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68.6%인 70개사가 ‘원-달러 환율이 1200원에 이르면 부도 위험이 있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금융감독원은 올 들어 키코로 인한 손실액이 대기업 39개사 2700억원, 중소기업 480개사 8천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빠져나오려고 용쓰다간 더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모래 늪처럼, 파생상품 손실을 또 다른 파생상품으로 만회하려는 무모한 노력을 한 사례도 있다.
중견 기업도 키코에 코 꿰어 KO패2007년 말. 삼성전자에 LCD 부품을 납품하는 연매출 6천억원대의 중견 기업 태산엘시디는 키코라는 ‘기가 막힌 금융상품’을 만난다. 삼성 해외 공장에 주로 납품하다 보니 환율이 떨어지면 환차손이 만만찮은데, 수수료도 없이 환헤지를 해준다는 ‘키코’라는 상품이었다. 태산엘시디은 2008년 상반기 예상 매출액인 3억7천만달러만큼에 대한 계약을 여러 은행과 체결했다. 첫 번째 비극은 지난 3월 찾아왔다. 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환율은 지난해와는 정반대로 급등했고, 3월 말엔 환 손실이 390억원에 이르렀다. 손실을 메워보려고 손을 댄 파생상품 ‘피봇’은 업친 데 덮친 격이 됐다. 피봇은 계약금액 14억달러를 놓고 약정 구간인 980~1030원 안에서 환율이 움직이면 달러당 25원씩 이익을 볼 수 있는 상품이었다. 그러나 4월 이후 환율은 1100원대를 훌쩍 넘겨버렸고, 태산은 외려 2800억원대의 평가손실을 보게 됐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덮친 9월16일. 파생상품이 연출한 비극은 한 알짜 중견 기업을 법정관리로 내몰고, 빚덩이는 상품을 판 국내 은행에로 옮겨간다. 피봇 등 통화옵션 상품은 국내 은행들이 글로벌 투자은행에서 설계한 상품을 들여다가 국내 기업에 재판매하는 구조다. 정상적인 상황에선 계약 당사자인 기업이 국내 은행에 매월 정산하면 국내 은행도 글로벌 투자은행에 다시 정산하는 형태의 거래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러나 태산엘시디처럼 상품을 구매한 기업이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지면 해당 기업이 회생되기 전까지는 판매한 은행이 정산할 책임을 지게 된다. 현란한 금융공학이 빚어내는 비극은 미국산 ‘서브프라임’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눈덩이 같은 환차손을 감당 못한 기업이 흑자부도를 내고, 그 손실액이 다시 은행에 돌아오며 악순환의 고리를 완성하는 데까지 나간 것이다.
사소한 소문에도 자금시장 출렁요즘 외환·채권 시장 사람들을 만나보면, 자금흐름이 경색되는 데 대한 우려를 드러내는 목소리가 많다. 국내 은행의 한 외환거래팀장은 “원-달러 거래는 국내에서 장이 끝나고 난 뒤 미국과 유럽에서도 이뤄지는데, 금융위기 이후엔 그쪽보다 국내에서 (환율이) 더 높게 거래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달러를 벌어오는 국내 수출업체들은 서둘러서 (달러를) 팔지 않고, 정유사처럼 달러가 필요한 데서는 곧장 구매에 나서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국내 기업의 해외채권 발행 업무를 맡고 있는 한 투신사 관계자는 “올 들어 철도공사, SK에너지, GS칼텍스 등 해외채권 발행에 성공한 기업들도 높은 금리 때문에 곤욕을 치렀고, 아예 발행을 엄두도 못 내는 회사들도 많다”며 “금융위기 이후 사소한 소문에도 금리가 출렁이는 것이 이쪽 시장 분위기”라고 전했다.
펀드 가입자들 중에는 심리적 공황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난해 11월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1억원을 주식형 펀드와 주가연계증권( ELS) 펀드 등에 투자한 회사원 조영식(34)씨는 최근 석 달간 국내외 주식시장이 급락하면서 2500만원 정도를 허공에 날렸다. “전체 투자 금액의 절반을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나머지는 중국, 동유럽 등에 분산 투자한 셈이라 위험 요인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지난 9월16일 이후엔 주식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라 주가가 조금만 올라가면 환매를 할 작정”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중국 증시가 가장 고점일 때 중국펀드에 가입했다는 서울 시내 중학교 교사 이아무개(35)씨도 “가입한 4가지 펀드들의 수익률이 -4%에서 최악의 경우엔 -15%를 기록하고 있다”면서 “이자가 싼 적금에 들면 손해라며 펀드 가입을 부추긴 은행 창구 직원이 원망스러울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김학균 한국투자증권 수석연구원은 지난 9월16일 애초 계획됐던 ‘피티’를 진행하지 못했다. 피티는 하루 한두 번꼴로 자산운용사 같은 기관투자자들을 직접 찾아가 증시의 거시적 전망을 발표하는 자리인데, 만나기로 약속한 펀드매니저가 “머리가 너무 아프다”며 연기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김 수석연구원은 “주가가 90포인트나 빠진 ‘검은 화요일’엔 펀드매니저들이 심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라며 “이후에도 증시가 급등락을 거듭하는 ‘조울증’ 장세를 보이는데, 이럴 땐 시장 참여자들이 정서적으로 소진될 수밖에 없다”고 풀이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그는 “10년 전 한국은 금융 시스템을 붕괴했다가 재건하는 총체적 과정을 겪어봤다. 그러고도 대우그룹이나 현대건설이 부도를 맞는 등 여진이 계속됐다”면서 “미국 정부가 시장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난 2주간 보여준 솜씨는 전광석화 같았지만, 근원적으론 미국의 집값이 떨어지는 문제가 해결돼야 위기도 끝날 것”이라고 답했다. 그의 음울한 전망은 이어졌다. “주식이란 게 너무 빠지면 가격 반등이 따르기 때문에 연말까지 짧은 랠리가 있을 겁니다. 코스피 지수는 추세적인 하향 곡선을 그리는 중에도 1년에 두 번꼴로 반등을 하거든요. 하지만 거품이 크면 골도 깊죠. 한때 수익률이 좋았던 자산운용사가 시련을 겪고 펀드매니저들도 많이 바뀌게 될 겁니다.”
국민연금·외환보유고 운용 도마 위에 올라미국발 금융위기는 국민연금기금이나 외환보유고를 주식시장과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둘러싼 논란도 키우고 있다. 국민의 노후 종자돈인 국민연금기금은 리먼브러더스, AIG 등에 대한 국외 투자로 최소 5천억원 정도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외환보유고를 효율적으로 운영하자며 만든 한국투자공사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올해 초 메릴린치에 2조원을 투자했다가 주가가 폭락해 홍역을 치른 뒤 투자 조건을 재조정해 가까스로 원금을 확보했지만, 최근 부실을 견디지 못한 메릴린치가 뱅크오브아메리카에 인수되면서 상당한 규모의 투자 손실이 예견되는 상황이다.
유철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부)는 “이번 금융위기는 국민의 주거·의료·노후 문제를 금융시장, 특히 주식시장의 변동에 직접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고 지적한다. 메릴린치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때문에 입은 손실이 이 증권사가 36년간 벌어들인 이익의 4분의 1에 해당한다는 점에 비춰보면, 30년에 한 번만 위기를 맞아도 국민의 노후가 큰 위협에 직면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운용 과정의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전창환 한신대 교수(국제경제학)는 “한국투자공사의 포트폴리오를 자세히 공개하지 않고, 국민연금의 투자처도 기금운용위원들에게만 공개하는 것은 문제”라며 “거래를 전후해서는 시장 교란을 우려해 이런 내용들을 공개 못한다 치더라도, 일정한 기간이 지난 뒤에는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 금융사들이 월가와의 복잡다단한 파생금융상품 거래로 정확히 얼마만큼의 재무적 손실을 안게될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손실의 규모가 아니다. 금융시장에서 만난 ‘선수’들의 증언은 이미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에 따른 신용의 위기와 시장규율 실패가 우리 안에 내재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글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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