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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에 대목이 없다

지역 돈뭉치를 먹어치우는 불가사리 대형점포… 대형 유통업체의 ‘슈퍼 슈퍼마켓’은 더 무서워
등록 2008-09-11 18:23 수정 2020-05-03 04:25

“구청에서 지붕 공사를 해줘 없는 것보단 손님맞이 효과가 있지만, 대형 마트가 들어서니 손님이 뚝 끊어졌네요.”
대전에서도 손꼽히는 재래시장인 중구 문창동의 문창시장 상인들은 자동차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동구 가오동에 보름 전 대형 유통업체인 홈플러스가 문을 연 뒤 예상보다 피해가 크다고 울상을 지었다.

최근 인근에 대형 유통업체가 들어선 대전 중구 문창시장의 한가한 풍경. 상인들은 대형 마트가 들어선 뒤 더욱 찾는 손님이 줄어들었다며 울상을 지었다.

최근 인근에 대형 유통업체가 들어선 대전 중구 문창시장의 한가한 풍경. 상인들은 대형 마트가 들어선 뒤 더욱 찾는 손님이 줄어들었다며 울상을 지었다.

홈플러스가 문 연 지 보름째

25년째 문창시장에서 채소 등 부식류 가게를 운영하는 김종기(50)씨는 “추석이 다가오는데 평소보다 더 한산할 정도로 경기가 없다”며 “전체적으로 불경기에다 이젠 대형 마트까지 생겨 추석 대목은 옛말이 됐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전시는 2004년 4월 문창시장 통로에 지붕을 씌우는 아케이드 공사를 하고 지난해 초에는 15억원을 투입해 공영 주차장을 증축하는 등 재래시장 시설 개선 대책을 펴왔으나, 여전히 대형 마트와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천인기(53) 문창시장 상인회 부회장은 “문창시장에 점포만 300여 개인데 공중화장실은 3곳뿐”이라며 “시는 재래시장 활성화 대책을 마련한다며 재래시장 상품권을 발행하고 주차장을 늘리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전에서 대형 마트의 입점 포화 상태가 오래된 일인데도 또다시 대형 마트 입점을 허가하는 것은 재래시장 상인더러 죽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대전에는 현재 대형 마트 12곳이 입점해 점포당 인구가 8만6천여 명으로 적정 수준(인구 15만 명당 1개)을 초과한 상태다. 이에 대전시는 도시계획조례 등을 통해 2012년까지 매장 면적이 3천㎡ 이상인 대형 마트와 백화점 등 대규모 점포의 입점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동구 가오지구를 비롯해 오는 10월에 대형 마트가 들어설 예정인 유성구 노은지구와 대정지구 등 3개 지역은 이미 건축허가가 완료돼 입점 불허 방침을 적용할 수 없다. 10월이 되면 대형 마트 14곳, 백화점 5곳 등 공룡 같은 대형 유통업체가 19곳으로 늘어난다.

물론 재래시장 상인들도 손을 묶고만 있지는 않았다. 대전의 가장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동구 원동 일대 중앙시장 상인들은 ‘예전처럼 시장이 소통의 중심이 되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해 시장도 보고 미술도 감상하는 ‘시장미술 프로젝트 전시회’를 벌써 3년째 열고 있다.

횟집 주인으로 전시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재우(52)씨는 “땅거미 지고 인적이 끊긴 시장 골목을 보고 있으면 ‘울컥’ 서글픔 같은 게 치밀더라”며 “‘재래시장을 살리자’는 말에 선뜻 동의한 지역의 작가들과 힘을 합쳐 시장의 모든 풍경을 소재로 사진 등 다양한 장르를 종합한 전시회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이것은 체면 차리지 말고 옛날의 향수를 기억하고, 그래서 이왕이면 정이 넘치는 소통의 장인 우리의 시장을 찾아달라는 하나의 몸부림일 뿐, 거대한 자본으로 뭉친 대형 마트와 절대적으로 맞설 수 있는 근본책은 안 된다는 것을 안다”고 덧붙였다.


대전 소재 대형 유통업체의 지역사회 기여실적(위)· 주요 도시 대규모 점포 현황표(아래)

대전 소재 대형 유통업체의 지역사회 기여실적(위)· 주요 도시 대규모 점포 현황표(아래)

매출액은 다음날 본사로 모두 송금

이씨의 말처럼 거대 자본의 대형 유통업체는 자본의 성격에 충실할 뿐이다. 시장은 상품과 용역을 매개로 돈이 돌고 그 도는 돈의 발밑에 이윤이 쌓이는 곳이다. 돌고 도는 돈은 경제의 윤활유이고 모아진 이윤은 경제 성장의 크기에 비례한다. 하지만 대형 업체는 이윤을 지역에 다시 환원해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순환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 지역에 본사를 둔 대형 마트는 한 곳도 없다. 축적된 이윤을 서울로 쓸어갈 뿐 지역경제의 선순환을 가져오는 재투자와는 거의, 아니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의 전통적 대목인 추석 명절이 가까워져도 그저 그런 경기를 보이거나 오히려 해마다 매출 감소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해 씁쓸한 통계가 있다. 박병석 민주당 의원(대전 서구 갑)이 지난해 대전 지역 대형 유통업체의 지역사회 기여 실적을 조사해 발표했다(표1 참조). 이마트의 2004년과 2005년 합계 매출액은 2802억원, 당기순이익은 268억원이었으나, 봉사활동 지원 등 지역사회 기여 실적은 겨우 6323만5천원이었다. 홈플러스는 같은 기간 3232억원 매출에 188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으나 기여 실적은 2억7340만원이었다.

특히 매출액은 다음날 본사로 모두 송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출과 이익을 올렸으나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는 재투자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형 마트는 지역경제 활성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쯤 되면 ‘공룡’이라는 지적이 무색하다. 차라리 모든 쇠붙이를 먹어버리는 전설의 ‘불가사리’로 이름을 붙여도 무방할 듯하다.

사정이 이렇자 이재선 자유선진당 의원(대전 서구 을)은 대형 유통업체의 매출액 가운데 10%를 해당 지역 지방세로 전환하는 소득세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로 했다. 대전 지역 대형 유통업체의 연간 매출액이 1조2천억원 규모이고, 이 가운데 10분의 1인 1200억원을 대전에 내놓도록 해 지역경제 활성화 기반으로 삼자는 생각이다.

그러나 갈수록 태산이다. 대형 마트가 큰 물고기를 먹이로 삼는 고래라면, 새끼 고기까지 싹쓸이하는 저인망이 새로 등장해 유통시장을 급속히 잠식하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규제와 시장 포화 상태를 피해 만든 ‘슈퍼 슈퍼마켓’(SSM·Super SuperMarket), 즉 300평 이하의 ‘초대형 슈퍼마켓’이 그것이다. SSM은 의류까지 파는 등 대형 마트의 판매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되 매장 규모만 상대적으로 작을 뿐이다.

대전시 경제정책과 류병희씨는 “신규 대규모 점포의 입점을 제한하고 기존 점포의 무분별한 확장을 금지하는 등 유통시설 총량제를 도입할 계획”이라며 대형 마트 확장을 막을 뜻을 분명히 했지만 “법이나 행정력으로 규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각 동네마다 들어서는 대형 유통업체의 SSM이 더 무섭다”고 우려했다.

SSM, 규모만 작은 대형마트

현재 대전에서 초대형 슈퍼마켓은 8월 말 현재 모두 56개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개인 소유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롯데쇼핑, GS, 홈플러스, 농협 등 대형 유통업체들의 진출이 크게 늘어나 동네 시장마저 급격히 잠식해가고 있다. 회사원 김신일(36·대전 대덕구 송촌동)씨는 “아파트 주변에 초대형 슈퍼마켓이 3개 있었으나 개인 운영의 슈퍼마켓은 경쟁에서 탈락했고 최근 그 자리에 농협 하나로마트가 입주했다”며 “소비자 입장에서는 쇼핑의 편리함 때문인지 재래시장을 찾을 생각을 못한다”고 말했다.

대덕구 법동시장 상인회 김종련(69) 회장은 “상인 입장에서는 초대형 슈퍼마켓은 소리 없이 심장을 옥죄는 독가스 같다”며 “이달 안으로 시민단체 등과 함께 등록제를 허가제로 바꾸는 등 SSM 규제를 위한 입법화 운동을 전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전=글·사진 손규성 기자 한겨레 지역부문 sks219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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