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상황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동행지수(순환변동치)가 지난 1월 정점을 찍고 7월까지 6개월간 연속 하락했다. 수치는 6월부터 기준치인 100 아래로 떨어졌다. 경기가 후퇴 국면에서 이제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언제 회복세로 돌아설 수 있을지 전망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의미가 없다. 경기에도 관성이 있어서, 한번 추세가 바뀌면 되돌리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외부 여건이 점차 나빠지고 있다. 미국에 이어 유럽·일본의 경기도 급격히 나빠지고 있는 게 확인됐고,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성장세도 둔화하고 있다. 내수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수출까지 둔화되면 경기 침체의 골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내년 말이면 회복의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어떤 근거를 가진 얘기는 아니다.
고유가·주가 하락이 한국만의 일인가
고유가가 경기 악화의 가장 큰 원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관세청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난해 배럴당 68달러에 원유를 수입했다. 올해 7월 수입 단가는 127.6달러에 이른다. 올해 연평균 도입 단가가 110달러라면, 우리나라는 원유값으로 지난해보다 35조원 이상을 추가 지출해야 한다. 그만큼 국민총소득은 줄어든다. 고유가는 물가를 끌어올리고 가계의 실질소득을 감소시켜 소비 감소에 따른 내수 침체와 고용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미국, 유로권 등 주요 국가들도 고유가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뇌관이 되어 긴 호황을 마감하고 그동안 쌓인 거품이 터지는 국면을 맞았다.
보통의 경기 후퇴라면, 금리를 낮춰 돈을 풀고 정부의 재정 지출을 늘리는 부양책을 써서 경기 침체 정도를 완화하려고 시도하겠지만, 그것도 어렵다. 고물가 상황에서 이런 정책은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이 큰 탓이다. 소비자물가가 전년 동월 대비 5%대로 급등한 상황이고, 물가 상승 기대심리는 팽배하다. 이를 저지하지 못하면 경제가 악순환에 빠져들고 회복 기회가 마냥 지연될 수 있다. 경기가 나빠지는데도 오히려 정책금리는 올려야 할 판이다. 실제로 금융통화위원회는 8월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렸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추가 인상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뾰족한 수가 없다. 사회적 취약계층을 돌봄으로써, 경기 악화로 인한 고통과 더 심한 경기 침체를 막는 게 최선인 상황이다.
경기가 나빠지고 앞으로 더 나빠질 것으로 예견되는 상황에서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업 실적이 나빠지고 시장에 풀린 돈도 줄어든다면 사람들은 주식 같은 안전성이 떨어지는 자산을 먼저 팔아치우기 마련이다. 외국에 견줘 우리 경제가 더 나쁘면 원화가치가 하락(환율 상승)하는 것도 당연하다. 2004년 281억달러, 2005년 150억달러의 흑자이던 경상수지가 2006년과 2007년 50억달러대로 줄어들고, 올해 상반기 53억달러 적자로 돌아선 것도 달러가 비싸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경기가 아무리 나빠지고 있다고 해도 주가와 원화가치 하락폭이 지나치게 큰 것 아니냐고 느끼는 이들이 많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는 대외환경 변화에 따라 진폭이 크다. 금융시장은 실물경제를 발빠르게 반영하는 특징도 있다. 그렇더라도 “도대체 왜 외국인들은 ‘셀 코리아’를 그렇게 계속하는 것이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 심각한 문제를 그들은 알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그런데 정말 우리 증시의 주가 하락폭이 다른 나라에 견줘 ‘위기’를 거론할 만큼 큰가?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이는 느낌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세계 주요 증시가 고점을 찍은 것은 지난해 12월10일이다. 이때를 기준으로 지난 9월4일까지 주요 증시의 주가 하락률을 비교해보면, 뉴욕증시의 다우지수가 18.5%, 일본 닛케이225지수가 21.3% 각각 떨어졌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주가 하락률은 이보다 좀더 크다. 홍콩 항셍지수가 28.5%, 대만 TWI지수가 25.4% 떨어졌다. 우리나라 코스피지수는 25.2% 떨어졌다. 우리 증시 주가 하락률은 대만·홍콩 증시와 비슷하다. 중국 상하이종합지수의 경우 절반 이하로 떨어졌으니, 아예 비교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
위기 논쟁은 허깨비, 문제는 정책 실패최근 상황만 보면 우리 증시가 훨씬 많이 떨어지지 않았느냐는 반론도 물론 있을 수 있다.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주가 하락세가 다시 가팔라진 8월 이후 9월3일까지 홍콩·대만·한국 증시 주요 지수의 수익률을 비교해보자. 항셍지수 수익률은 -10.3%, 대만 TWI지수는 -9.3%다. 코스피지수는 -9.6%다. 별 차이가 없다. 이는 우리 증시의 주가 하락이 세계 증시, 특히 아시아 증시의 주가 하락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지, 한국 경제에만 고유한 어떤 위험을 경고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주가 최고치에 견줘 하락폭을 체감하기 때문에 우리 증시가 더 심각한 것처럼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외환시장의 환율 움직임은 어떤가? 원-달러 환율은 지난 7월11일 1002원이었다. 9월3일 1148원까지 환율 상승폭은 무려 14.6%에 이른다. 놀랄 만한 급등이다. 달러가 비록 유로에 견줘 강세를 보였다고는 하지만, 같은 기간 유로화의 가치 하락폭은 9.1%에 그쳤다. 원-달러 환율이 상대적으로 가파르게 오르자, 꺼져가던 ‘위기설’이 다시 피어올랐다. 이에 따른 불안감은 환율을 더 끌어올렸다.
‘9월 위기설’은 “외국인들이 보유한 우리나라 국채의 만기가 9월 둘째주에 집중돼 있는데, 외국인들이 이들 채권을 상환받아 한꺼번에 떠날 경우, 금융시장이 큰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그럴듯한 시나리오였다. 9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외국인 보유 국채는 60억달러에 이른다. 그 돈을 빼가면서 환율이 오르고 금리도 오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정부 관리들만이 아니라, 금융시장의 전문가들은 일찌감치 그 가능성을 부인했다. 무엇보다 외국인들이 만기 상환받은 자금으로 재투자를 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측됐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채권 투자로 비교적 높은 수익을 내고 있고, 여전히 그 기회가 열려 있는 까닭이다. 실제로 외국인 투자가들은 8월에 우리나라 국채를 1조5천억원어치 순매수했다. 9월 들어서도 3일까지 3거래일 동안 6천억원어치를 순매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용 외환 보유고가 부족해 외국인들이 원화 표시 자산을 계속 팔아 떠날 경우 지급불능 사태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과장된 것이 많다. 현재 단기외채는 외국계 은행 지점이 파생상품 거래 과정에서 빌려온 것이 많다. 한국은행이 수백억달러를 미국 모기지 대출 및 보증기관인 패니매와 프레디맥의 채권에 묶여 달러를 움직이기 어렵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한은이 보유한 채권은 선순위채권으로 손실 위험이 매우 적고, 지금도 국제 금융시장에서 높은 값에 잘 거래되고 있다.
그렇다면 ‘위기설’은 근거가 없다는 얘기인가? ‘위기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란 자체가 허깨비를 만들어놓고 다투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8월 하순 이후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유독 원화만 심하게 폭락한 것은 아니다. 2002년 초부터 유로 등 통화에 견줘 대하락을 시작한 달러가 국제 금융시장에서 강세로 돌아선 것은 지난 7월 초순이었다. 이는 실로 역사적인 반전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평가한다. 7월3일 이후 9월4일(원화는 당일, 외국통화는 전날 기준)까지 유로화는 달러에 견줘 9.1%나 절하됐다. 일본 엔화는 8월11일까지 4%가량 절하되다 다시 반등해 절하폭이 2.3%로 줄었다. 오스트레일리아달러는 8.7%, 인도네시아 루피는 9.9% 절하됐다. 원화는 9월3일 최고치를 기준으로 보면 같은 기간 9.3% 절하됐고,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 있었던 9월4일 종가로 보면 절하폭이 7.3%다. 유로, 오스트레일리아달러, 인도네시아 루피 등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
환율, 눌렸다 튀어오르는 스프링
그럼에도 사람들이 원화가치만 유독 큰 폭으로 떨어진 것처럼 느끼는 것은 왜일까? 이는 7월 초 정부가 달러 강세로 가고 있던 국제 금융시장의 흐름을 거슬러 원-달러 환율을 끌어내렸기 때문이다. 7월3일 1047원이던 원-달러 환율은 7월11일 1002원까지 떨어졌다. 원화만 홀로 강세를 보였다. 무리하게 끌어내린 환율이 되오르기 시작하자 상승 속도는 가팔라졌다. 7월11일 이후 9월3일(1148원)까지 원달러 환율은 무려 14.6%나 솟구쳐버렸다.
8월 들어 환율이 슬슬 오르는데도 정부는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았다. 외환당국 관계자는 8월27일 그 이유를 비공식적으로 설명했다. 달러가 강세이고, 외국인들의 주식 매도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며, 그동안 시장개입으로 외환보유고가 감소했는데 여기서 공격적인 개입을 계속하면 ‘외환보유고 부족’ 우려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책 실패를 자인한 것이었다. 당국이 시장에 더는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못할 것임을 예감한 외환딜러들은 더는 눈치를 보지 않고 공격적으로 달러를 사들였다. 눌려 있던 환율은 스프링처럼 급등했다. 외환당국은 결국 9월4일과 5일 수십억달러를 시장에 팔아가며 환율 폭등세를 다시 진정시켜야만 했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을 연출한 것은 상황을 오판하고 오락가락한 정부의 외환시장 정책이었던 셈이다. 고유가로 달러가 외국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미국 금융시장의 금융경색으로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을 계속 팔아치운다면, 원-달러 환율이 상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부가 외환시장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환율의 급변동을 최소화하는 것 정도다. 그리고 환율이 아닌 통화·재정정책으로 당면 문제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외환시장에 무리한 개입을 반복함으로써 외환보유고만 날리고 시장만 출렁거리게 했다. 출범 초 세계 경기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경기 부양을 위해, 어차피 오를 환율의 상승을 부추겼다. 그로 인해 물가가 급등하자 이번에는 달러 강세라는 큰 흐름을 거꾸로 거스르고, 환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200억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이를 두고 기획재정부의 한 간부는 “퇴진 위기에 몰린 강만수 장관 구하기였다”고 말한다. 정부의 무리수가 들통나자, 환율은 눌렸던 스프링처럼 튀어올랐다. 그것이 8월 말과 9월 초 금융시장에서 일어난 사태의 전말이다.
시장 참가자들은 이번 사태로 정부의 외환시장 대응 능력을 한층 더 의심하게 됐다. 애널리스트들을 모아 ‘쇼’를 하고, 위기설 ‘단속’으로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것을 보면서 의심은 굳어간다. 진짜 문제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위기에 처한 것임을 오직 정부만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 경제부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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