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제조업 기반 대기업들, 증권·보험사 인수 등 금융시장 진출 잇따라… 제2 외환위기의 악몽 떠오른다?</font>
▣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은 지난해 말부터 금융회사 2곳을 사들이고 1곳을 새로 세웠다. 롯데는 지난해 11월 롯데자산개발을 설립했다. 지난 4월에는 대한화재 인수를 마무리짓고 회사 이름을 롯데손해보험(롯데손보)으로 바꿔 출범시켰다. 이어 6월에는 투자자문사인 코스모투자자문도 사들였다. 현재 롯데그룹 자산은 40조원. 이 가운데 롯데카드·롯데캐피탈·롯데손보 등 금융 계열사의 자산 규모는 6조원. 금융자산 규모는 그룹 전체의 15%를 차지한다. 신 부회장은 1997년 부회장 취임 뒤 금융시장 진입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그는 2002년 동양카드(현 롯데카드) 인수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롯데의 다음 타깃은?
롯데의 다음 타깃은 증권업체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하다. 은행과 기업들이 증권사를 새로 세우기 위해 최근 금융위원회에 잇따라 증권사 신설 신청을 냈으나, 롯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롯데의 다음 먹잇감이 ‘대신증권’이나 ‘교보증권’이라는 식의 얘기가 증권가에 나돈다. 그러나 정작 롯데는 강하게 부인한다. 이창원 롯데 이사는 “인수 계획은 없다. 현재 하고 있는 금융사업에 충실하기 위해서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 대기업의 간부는 “롯데는 원래 보수적이다. 돈을 아끼는 기업이다. 지금 증권사들의 몸값이 너무 높아졌다고 보기 때문에 인수에 안 나선 거다. 증권사들의 몸값이 떨어지면 증권사 인수전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껌’과 ‘롯데백화점’으로 대표되는 식품·유통기업인 롯데가 금융업에 뛰어드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짭짤한 ‘수익의 추억’이 있다. 롯데는 동양카드를 인수한 뒤 롯데백화점을 활용해 단숨에 1천만 명의 카드 고객을 확보했다. 롯데손보도 이와 비슷한 전략을 추진 중이다. 롯데손보는 롯데백화점 24곳과 롯데마트 56곳에 보험판매 대리점 설치를 준비 중이다. 화재보험이나 자동차보험 등을 백화점 고객에게 팔겠다는 생각이다.
롯데는 ‘계열사에 물량 몰아주기’라는 비판에도, 계열사들이 다른 보험사에 가입하고 있는 500억원가량의 보험 물량도 롯데손보로 넘길 계획이다.
롯데처럼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들이 잇따라 금융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증권사 사냥’이 대표적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이 올 1월 포문을 열었다. 전국에 14개 지점을 둔 소형 증권사인 신흥증권을 전격 인수해 현대IB증권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증권은 “비슷한 이름으로 소비자를 현혹시켜 기업 간 경쟁의 룰을 흐려놨다”며 ‘현대’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해달라는 회사명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냈다. 결국 현대IB증권은 ‘HMC증권’으로 다시 이름을 고쳐 달았다. 정몽준 의원이 대주주인 현대중공업그룹은 지난 7월 CJ투자증권을 인수해 증권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로써 범현대가는 기존 현대증권을 합쳐 증권사 3곳을 갖게 됐다.
두산그룹은 대주주 자격 논란에 휩싸이면서도 자회사인 두산캐피탈을 통해 중소형 증권사인 BNG증권중개를 사들였다. LG그룹에서 분가한 LS그룹도 계열사인 LS네트웍스를 통해 이트레이드증권을 인수했다. LIG그룹은 LIG증권을 새로 만들었다.
10대 그룹 가운데 금융업에 진출하지 않은 그룹은 LG, GS, 한진 3곳뿐이다. LG는 2003년 카드 사태의 책임을 지고 LG카드·LG투자증권 등 금융 자회사 모두를 채권단에 넘겼다. 한진의 경우 조양호 회장의 넷째 동생인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이 증권업을 하고 있어 진출이 쉽지 않다.
제조업 기반의 대기업들이 ‘비전공 분야’인 금융업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명박 정부가 산업과 금융을 분리하는 금산분리 원칙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내년부터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시행으로 증권사가 은행처럼 예금을 받을 수 있게 돼, 증권사만 있으면 은행을 갖지 않아도 자금을 쉽게 조달할 수 있다. 사실상 증권사가 은행과 비슷해진다.
새로운 성장동력, 계열사 밀어주기
한 기업 임원은 금융권 진출 이유에 대해 “여유 자금이 있어도 본업에서는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 보니, 새로운 성장 동력을 금융업에서 찾기 위해서다. 증권사와 같은 금융기업이 있어야 인수·합병(M&A)과 같은 고부가가치 수익사업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들은 오너 2세에 대한 증여·상속 등과 관련해 세금 문제 해결을 고려했다는 얘기도 나돈다.
대기업들이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증권사 인수는 계열사 물량을 밀어주기 위한 측면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증권사가 은행처럼 예금을 유치할 수 있게 되면 기업 직원들의 예금계좌만 옮겨도 대기업 계열 증권사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짭짤한 수익을 거둘 수 있다. 벌써 이같은 움직임은 보인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 7조원이 넘는 그룹 계열사 금융 거래 물량을 HMC증권에 넘겨주겠다고 밝혔다. 롯데그룹도 계열사의 손해보험을 롯데손보로 밀어줄 계획이다. 하지만 계열사들은 좀 더 저렴한 가격에 보험드는 방법을 찾기가 어려워져, 결과적으로 계열사 주주들이 손해를 볼 수 있다.
대기업의 금융권 진출에 대한 시각은 곱지 않다. 대기업이 너나없이 금융업에 뛰어들면서 자통법의 애초 취지를 무력화해버렸기 때문이다. 자통법 취지는 국내의 고만고만한 중소형 증권사 간 M&A를 이끌어 몸집을 키운 뒤 미국의 골드만삭스와 같은 투자은행을 만들기 위함이다. 이에 따라 금융당국은 지난해 11월 증권사 간 경쟁 촉진과 대형화를 위해 증권업 허가 문턱을 대폭 낮췄다. M&A를 통해 증권사 몸값을 낮추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대기업이 증권사 인수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증권사 몸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정부가 기대하는 중소형 증권사끼리의 자연스러운 M&A는 물 건너가버렸다. 여기에 대기업이 증권사를 자회사로 꿰차게 돼 M&A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대기업의 물량 밀어주기에 기대어 해외 진출보다 안정적인 국내 시장에서 안주하지 않겠냐는 우려도 나온다. 증권사 규모가 작다 보니 M&A 중개와 신용상품 투자 등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투자은행과 경쟁하기 힘들 것이라는 비판도 일고 있다.
한 애널리스트는 “금융업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과 전략 없이 뛰어들 경우 대기업 오너가 도덕적 해이에 쉽게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대기업들이 금융회사를 사금고로 삼거나 오너의 아들, 사위 등을 최고경영자에 앉혀 족벌체제로 운영하다 실패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재벌 소유 증권사들의 무리한 지급보증
외환위기 당시 대기업 소유의 증권사들이 줄줄이 쓰러진 원인은 무리한 지급보증이었다. 과거 대주주인 모기업들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끌어다 쓰면서 관행적으로 계열 증권사들에 지급보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잘못된 금융업 진출은 국가적인 위기를 낳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 정부는 재벌에 증권·보험 등 제2금융기관을 가질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금융감독 체계는 엄격하지 못했다. 재벌 소유의 종금사 등 금융기관은 재벌과의 부적절한 거래와 방만한 경영으로 줄줄이 부도를 맞고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됐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경제학부)는 “제조업체들이 시장에서 경쟁하는 ‘선수’라면, 금융기업은 제조업체에 합리적인 투자를 하는 이른바 ‘심판’이다. 선수가 무리하게 심판을 하겠다고 하면 안 된다. 금융업을 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전략과 철저한 준비가 먼저 선행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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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업에 실패한 재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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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대기업들은 금융업에 뛰어들어 큰 재미를 못 봤다. 제조업에서 잘나가던 기업들도 금융업에선 힘을 쓰지 못했다.
LG그룹은 금융계열사가 없다. 2003년 카드사태 전까지만 해도 LG카드·LG투자증권·LG투신운용 등의 금융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LG는 카드사태 무마를 위해 금융계열사를 모두 팔아치웠다. LG카드는 신한은행에 매각됐고, LG투자증권도 우리은행에 합병돼 우리투자증권으로 영업 중이다.
SK그룹은 금융계열사로 SK증권만을 갖고 있다. SK그룹은 2003년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SK해운 분식회계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채권단에 ‘금융업에서는 손을 떼겠다’고 약속했다. SK는 투신운용사와 생명보험사를 미래에셋증권에 팔았다. SK증권은 시장에 매물로 내놓았지만 사려는 쪽이 없어 현재까지 보유하고 있다.
대우채권 사태를 몰고 온 대우그룹은 금융업부터 손을 뗐다. 대우증권과 서울투신운용이 산업은행으로 넘어갔다. 계열사였던 한국종합금융도 결국 우리금융그룹으로 편입됐다.
현대그룹은 국민투신과 부실투성이인 한남투신을 인수해 현대투신을 세운 뒤 고전하다 현대투신증권으로 회사명을 변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실 경영으로 그룹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고, 2003년 푸르덴셜에 헐값 매각하고 말았다.
한화그룹은 외환위기 뒤 부실 종금사 정리 때 한화종금을 청산했다. 계열사인 충청은행도 1998년 5개 은행 퇴출 과정에서 하나은행에 흡수 합병됐다.
그나마 삼성그룹이 증권과 화재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반도체나 다른 제조업에 견줘보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평을 받는다.
제조업 분야에서 나름대로 잘나갔던 대기업들이 금융업에서 맥을 추지 못하는 이유는 산업과 금융의 체질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산업과 장기적인 안목으로 투자를 진행해야 하는 금융업의 특징은 다르다. 금융업에 진출했다 실패한 대기업들은 증권사를 독립 사업 영역이 아니라 모기업을 지원하는 병참 부문처럼 여겼다. 하지만 금융업은 변화가 빠르고 전문 인력 의존도가 높아 확고한 경영 철학과 집중력 없이는 해낼 수 없다.
대기업은 전문성이 필요한 금융회사에 제조계열사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인 최고경영자(CEO)를 앉혀놓는다. 하지만 제조업 출신 CEO는 외형 확장 경쟁에 나서 금융업 부실의 단초를 제공한 경우가 흔했다. LG그룹의 카드 외형 경쟁, 현대그룹의 옛 국민투신 인수 등이 모두 외형 확장 경쟁을 하다 스스로 무너진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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