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자비심만이 능사인가요. 아버지 같은 분을 의도적으로 욕보인 것 아닙니까.”
7월31일 오전 서울 수송동 조계사 대웅전에서 예불을 마치고 나오던 불자 여연화(55)씨는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이틀 전 조계사 들머리에서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의 차를 경찰이 검문한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묻자 기다렸다는 듯 나온 대답이었다. 그는 “불자들은 바깥에 발언하는 걸 삼가는 전통이 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상황이 아니라는 게 일반적 분위기”라고 했다. 결례의 책임자인 경찰청장부터 해임해야 한다는 여씨의 말에 옆에 모여든 몇몇 중년 불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군거렸다.
“언제까지 참고만 살 건가”
“가만히 당해서는 안 돼요. 언제까지 참고만 살 건가….”
최근 불거진 정부와 불교계 사이의 종교 편향 갈등이 시국에 초연했던 불자들을 대정부 투쟁의 대열로 돌려놓고 있다. 종교 편향 논란은 올봄부터 청와대 관료들의 잇따른 친개신교 발언이 이어지고 정부 부처의 정책 집행 과정에서 고의로 불교를 무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촉발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내건 촛불 정국도 또 다른 기폭제로 작용했다. 종단이 시국법회 등 촛불 행진을 주도하고, 시위 주동자와 수배자들에게 거처를 내주고, 정부의 강경 진압을 규탄하면서 대립각이 더욱 커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벌어진 총무원장 무단 검문 사건으로 급기야 범종단 차원에서 정부와 전면 대립하는 전례없는 대치 국면이 형성됐다.
검문 사건 다음날인 7월30일 조계종 총무원 쪽은 기자회견을 열어 “총무원장 스님을 범죄자 혹은 범죄 예비자로 간주한 것”이라며 ‘앞으로 (정부 관계자가) 찾아와도 사과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200여 명의 불자와 총무원 직원들은 수송동 조계사에서 경찰청까지 항의시위를 벌이고 경찰청 정문 앞에서 삭발 불자 2명의 머리카락과 항의 서한을 불태웠다. 31일에는 조계종의 국회 격인 중앙종회의 5개 종책 모임(정당에 해당)이 공동으로 총무원장의 검문을 ‘공개적 모욕’으로 규탄하면서 어청수 경찰청장 파면과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일부 격앙된 종회원들은 주요 사찰의 문을 닫아거는 산문 폐쇄도 불사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잦은 파벌 다툼을 벌여온 종회의 각 계파가 정치적 사안에 대해 한목소리로 연대 성명을 낸 것은 드문 일이다. 또 8월1일에는 27개 종단모임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회견을 열어 정부의 종교편향과 불교탄압이 명백한 상황에서 종교차별금지법 제정 등 근본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맞설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경남 합천 해인사의 주지 현응 스님은 “총무원장 검문 사건은 범법자 색출을 명분으로 산사를 짓밟은 전두환 정권의 80년 10·27 법난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고 단언했다. 무단 검문 자체가 종단의 큰 어른을 예비 범법자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불교 탄압과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다. 그는 “각지 선방의 수행승들도 정국을 주시하면서 대응책을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당장 하안거가 끝나는 8월15일을 기점으로 불자와 승려들이 참여하는 범불교도 대회와 승려대회, 시국법회 등 정부 규탄 집회가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불자들은 ‘울고 싶은 데 뺨을 친 격’이라고 풀이한다. 대정부 불신감이 극도로 깊어지면서, 교단 차원에서 ‘항거’하지 않으면 교단의 자존이 위태로워질 것이란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종단 차원에서 정부와 맞선 전례 없는데…
불교계는 애초 이명박 정권 출범 뒤 청와대 관료들의 친개신교 발언 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한동안 사태를 신중히 주시하는 분위기였다. 이 대통령이 취임 전인 올 1월16일 조계사 신년 하례 법회에 참석해 합장예불을 하면서 “낮은 자세로 불교의 가르침인 ‘하심’(下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신중한 대응의 배경이 됐다.
그러나 지난 6월 중순 국토해양부의 대중교통 안내 시스템 ‘알고나’에서 주요 사찰 표시가 모두 빠지고, 어청수 경찰청장 사진의 개신교 전도집회 포스터 게재 사실과 경기여고의 불교 관련 석물이 통째로 땅에 파묻힌 사건 등이 전해지면서 종단 차원에서 정부를 성토하는 분위기가 순식간에 확산됐다. 총무원과 신행단체가 종교 편향 종식 불교연석회의를 잇따라 결성했고, 본말사 주지연수에 참여한 전국 각 지역 사찰의 간부 승려들도 규탄 성명을 잇따라 냈다.
한승수 총리가 7월22일 총무원장을 만나 ‘단순 실수’라고 사과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한나라당도 7월4일 박희태 대표가 취임 직후 총무원장을 예방해 “우려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뒤이은 검문 파문으로 이들의 행보는 불신만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참여불교재가연대의 윤남진 협동사무처장은 “검문 사건 뒤 친한나라당 보수 성향의 불자들도 정부 비판 쪽으로 돌아서는 분위기가 역력하다”며 “말로만 편향 방지를 외칠 뿐 뒤로는 어디서 종단의 등에 비수를 꽂을지 모른다는 불신감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불교계는 사태의 해법으로 국가공무원법과 교육법 등을 개정해 종교 중립화 보장을 명문화하고 위반 때 처벌 규정을 넣는 방안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지만, 정부 쪽은 이에 대해 명쾌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상황이다.
조계종이 종단 차원에서 정부와 정면으로 맞선 것은 전례가 없다. 과거 실천불교승가회 등 불교 내 진보개혁 세력이 시국집회 등에서 활발히 활동했지만, 지금처럼 보수·진보 세력을 아우른 범교단 차원의 반정부 구도가 형성된 적은 없었다. 7월4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시국법회는 그 분기점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라는 정국 현안을 화두로 3만 명이 넘는 대규모 불자들이 운집했다. 하안거 결재를 위해 산사에 있던 스님 1천여 명이 이례적으로 수행을 중단하고 촛불행진에 참가한 것은 불교계의 시국관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부 지식인 불자들 사이에서는 이제까지 거의 전무했던 정치세력화 논의도 나오고 있다.
종교계에서는 이런 불교계의 강경 기류를 수십 년간 잠재된 정치·사회적 소외감이 터져나온 결과로 보는 인식이 적지 않다. 초대 이승만 정권부터 현 정권까지 불교는 정치·사회적 영향력 면에서 개신교나 천주교에 비해 약세를 면치 못했다는 피해의식이 적지 않았는데, 노골적인 친개신교 성향을 드러낸 이명박 정권에서 이런 부분들이 본격적인 정치적 갈등으로 표면화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지금도 종단에서는 해방 이후 서북 중심의 개신교·가톨릭계 인사들이 정권에서 죽 영향력을 행사한 데 비해 불교계는 정계 쪽에 뚜렷한 실력자를 배출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적잖게 흘러나온다. 이른바 ‘불교 파동’으로 알려진 1954년 대처승 축출과 비구승 중심의 종단 정화도 기독교도인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발단이 됐고, 이후에도 불교는 잦은 종단 분규의 와중에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제 목소리를 낼 여지를 찾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자신을 해코지해 큰 공부를 돕는 보살’
인터넷 불교 언론인 의 이학종 대표는 “승려들 사이에서 조선왕조 500년도 견뎠는데, 개신교 대통령 밑에서 5년을 못 버티겠느냐는 식의 농담이 나오곤 한다. 종교 편향 논란은 현실 정치에 대한 불교계의 관심을 고조시켜 정권 임기 중에 계속해서 대정부 갈등이 돌출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조계종 중앙종회 사무처장 주경 스님의 말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불교는 한국 최대의 종교이면서도 결집력이 약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계속 종교 편향 논란으로 승려와 불자를 단합하게 하고, 정치·사회 의식을 각성시켜주고 있다. 자신을 계속 해코지해 결국 큰 공부를 하도록 돕는 보살을 ‘역행보살’이라고 한다. 현 정부가 불교 발전을 위해 역행보살의 공덕을 베푸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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