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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3·4세 주가조작군단 실체 볼까

등록 2008-07-18 00:00 수정 2020-05-03 04:25

LG가 구본호 기소, 두산가 박중원 등 수사 중, 수사선상에 최소 5명 이상 더 있어

▣ 김경락 기자 한겨레 경제부 sp96@hani.co.kr

지난 6월부터 난데없이 재벌 3·4세들이 줄줄이 검찰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 이들 모두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식 불공정 거래’ 등 주가조작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신분이 신분이고, 혐의가 혐의다 보니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동년배끼리 모여 정보교환, 노골적 투자

검찰이 현재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공식 확인한 인물은 LG그룹 일가인 구본호 레드캡투어 대주주와 한국도자기 창업주의 손자인 김영집 전 엔디코프 대표, 두산그룹 4세로 분류되는 박중원 전 뉴월코프 대표 등 3명이다. 구씨는 이미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됐다. 김 전 대표와 박 전 대표의 경우엔 금융감독원 조사를 통해 차명계좌를 동원해 주가조작을 한 혐의가 상당 부분 드러나서 검찰의 기소가 임박한 상황이다.

그러나 금융감독 당국을 비롯해 금융권에선 구씨와 김씨, 박씨 외에도 최소 5명 이상이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미공개 정보를 통한 내부자 거래의 경우 당사자가 혐의를 시인하지 않는 이상 혐의 입증이 쉽지 않아 검찰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주로 거론되는 인물은 ㅎ그룹 3세인 ㅈ씨와 ㅇ그룹 창업주 손자인 ㄴ씨, ㄱ그룹 회장 아들인 ㅈ씨, ㅎ그룹 창업주 손자인 ㅈ씨 형제 등이다. 이들 대부분은 30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의 나이로 동년배들이다. 서로 얼마나 돈독한 관계인지는 가늠하기 힘들지만, 주식투자와 유상증자 참여 과정에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함께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는 게 금융당국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증권선물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특정 종목의 주가가 이상 급등하거나 급락해서 무슨 연유인가 살펴보다 보면, 재벌 3세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실 증권업계에선 재벌 3·4세들이 언젠가는 된서리를 맞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이들은 주식시장에 경험이 많은 투자자라면 충분히 의심할 만한 비정상적인 투자 행태를 노골적으로 반복했기 때문이다. 자원개발 공시로 주가를 부양했고, 헐값에 주식을 받을 수 있는 제3자 배정 유상증자로 시세차익을 나눠가졌다. 특히 재벌 3·4세들의 투자 참여란 후광에 개미 투자자들이 빠르게 몰려들어 주가는 더욱 쉽게 떠올랐다.

코스닥 상장업체인 동일철강과 코디너스가 대표적이다. 이 두 회사는 모두 제3자 배정 유상증자 결정을 공시한 뒤 며칠 만에 유전 개발이나 에너지 사업 진출을 하겠다며 사업 내용을 추가로 공시했다. 사업 목적에 자원개발을 추가한다는 내용만 있을 뿐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재벌 3세의 지분 참여와 자원개발 호재가 겹치면서 이들 기업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동일철강 유상증자로 두달새 수십억 벌어

특히 동일철강은 지난해 9월 코스닥 시장에서 ‘황제주’(시장에서 주가가 가장 높은 종목을 가리키는 증권업계 은어)로 떠오르기도 했다. 유상증자에 참여한 재벌 3세들의 평가차익은 불과 두 달여 만에 수십억원을 넘어섰다.

물론 자원개발 공시나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자체가 불법은 아니다. 검찰 역시 자원개발 공시를 하기 전에 주식을 매집한 행위를 문제 삼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재벌 3세들이 자원개발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이를 통한 시세차익에 더 주력했다는 데 있다.

한 예로 김영집 전 엔디코프 대표는 지난해 4월 카자흐스탄 유전개발 사업 공시를 했으나, 해당 사업은 1년이 더 지난 7월 현재까지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김 전 대표는 이미 지난해 말 엔디코프 보유 주식을 모두 처분했다. 공시 내용이 실제와 다를 경우엔 허위 공시 등 불성실 공시에 해당돼 해당 기업은 금융당국으로부터 별도의 조처를 받을 수 있다.

기업 인수·합병과 비상장기업의 우회상장 등을 컨설팅해주고 있는 한 인사는 “재벌 3세들이 사용한 수법은 정상적인 투자법은 아니지만, 코스닥 시장에선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이라며 “유명인사들이 한두 번도 아니고 지난 한 해 동안에만 여러 차례 동일한 수법을 쓰다 보니 금융감독 당국과 검찰에 꼬리를 밟힌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이 이 재벌 3·4세들의 혐의를 제대로 규명해내는 건 우선 수사 의지에 달렸지만, 쉽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우선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식 불공정 거래의 사실관계를 입증해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식 매집과 호재성 공시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혀야 하는데, 물증이 확보되지 않고 당사자들이 부인할 경우 무혐의로 처리될 여지가 크다.

실제 미공개 정보 이용 불공정 거래 의혹은 실체가 규명되지 않고 묻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금감원 조사국에서 5년여 동안 근무했던 한 인사는 “허수 주문을 반복적으로 내는 것과 같은, 시세조종을 통한 주가조작 사건과 달리 미공개 정보를 통한 불공정 거래 의혹 사건은 실체 규명에 많은 시간이 걸릴뿐더러, 심증만 남긴 채 종결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토로했다.

‘무혐의 종결’ 가능성, 문제는 수사 의지

이런 실정이다 보니 무혐의 처리된 사건이 재조사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이 반년 남짓 조사를 벌이고도 무혐의 종결 처리했던 현대상선 주가조작 의혹 사건에 대해 최근 검찰이 재조사에 착수한 게 대표적이다. 이 역시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불공정 거래 의혹 사건이었다. 즉, ‘무혐의 종결’은 ‘의혹의 종결’이라기보다는 조사의 한계에 부딪혔거나 의지 부족으로 조사를 서둘러 중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셈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미공개 정보 이용 주식 불공정 거래 행위라는 의혹의 본령보다는 수사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물증 확보가 쉬운, 차명계좌를 통한 주식 매집 행위나 횡령 등 부수적인 부분에 대한 수사에 그칠 수도 있다”면서 “그러나 막강한 수사 수단을 갖고 있는 검찰이 어디까지 의욕을 갖고 수사에 임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온갖 ‘작전 세력’의 득세로 혼탁해질 대로 혼탁해진 코스닥 시장. 이곳에서 벌어진 재벌 3·4세들의 부적절한 머니게임의 실체 규명은 온전히 검찰의 손으로 넘어갔다. 촛불시위 정국에서 스스로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검찰이 재벌 3·4세라는 막강한 권력층을 상대로 어느 선까지 의혹을 밝혀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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