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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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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폐기, 새로운 다원고차방정식

등록 2008-07-04 00:00 수정 2020-05-03 04:25

북핵 상징 냉각탑 6월27일 폭파… ‘행동 대 행동’의 미국,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 다음 어떤 카드를 내놓나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정책 목표로 삼고 있다. 오늘 아침 우리는 그 목표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됐다. 북한 당국이 6자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중국 쪽에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한 게다.”

6월26일 오전 7시40분(미 동부 현지 시각) 백악관 앞마당에 마련된 간이 연설대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간단한 인사말을 출입기자단에 건넨 부시 대통령은 곧장 준비된 성명을 읽어내려갔다. “미국은 북한 정권에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은 여전히 북한의 인권유린과 우라늄 농축, 핵 실험과 확산, 탄도탄 프로그램, 남한을 포함한 이웃나라에 대한 지속적인 위협 등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다.” 그는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1994년 동결 뒤 불능화로 오기까지[%%IMAGE4%%]

“6자회담은 ‘행동 대 행동’이란 원칙에 따른다. 기존 6자회담 합의에 발맞춰, 북한의 ‘행동’에 대해 미국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행동’으로 답한다. 첫째, 북한을 적성국 교역법 적용 대상에서 해제하는 대통령령을 내리는 바다. 둘째, 앞으로 45일 안에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할 뜻을 의회에 전한다.”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1994년 10월 제네바 기본합의로 ‘동결’시켰던 북핵이다.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인 2000년 가을엔 북-미 공동성명 발표와 교차방문으로 관계 정상화의 앞섶을 매만지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2001년 1월 부시 행정부가 집권하면서 모든 게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북-미 관계는 이내 동결·건조됐고, 이어진 ‘악의적 무시’가 슬그머니 갈등의 불씨를 지폈다. 북핵 폐기로 가기 위한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진 지금, 지난 8년여 세월을 더듬어볼 일이다.

‘악의 축’. 2002년 1월 연두교서에서 부시 대통령은 이란·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그렇게 불렀다. 그해 10월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 시도를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제2차 북핵 위기의 서막이었다. 북한은 그해 12월 핵 동결 해제를 선언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을 추방하고는, 2003년 1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반발한 북한이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하며 불거진 제1차 북핵 위기가 꼭 10년 만에 재현된 게다.

파국의 우려는 대화를 불렀다. 같은 해 8월 시작된 6자회담은 우여곡절 끝에 2005년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현존 핵계획 포기’를 뼈대로 하는 ‘9·19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악마’는 언제나처럼 ‘사소한 일’에서 심술을 부렸다. 미국이 새삼 위폐 제조·유통 등 북한의 ‘은밀한 행동’을 문제 삼고 나서면서 공동선언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북-미 간 ‘말의 전쟁’이 어어지는 사이, 북핵 동결의 상징이던 경수로 사업은 중단됐다. 8개 북한 기업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했고, 미국의 압박에 몰린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은 대북 거래 중단을 선언했다. 임계점에 다다른 위기는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으로 마침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위기의 정점에서 다시 타협이 이뤄졌다. 그렇게 2007년 2월 탄생한 게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 합의문, 곧 ‘2·13 합의’다. 북핵을 풀기 위한 ‘말’의 단계가 ‘행동’의 단계로 옮겨간 게다. 그해 6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을 방문했고, 가을엔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단계 조치, 곧 ‘10·3 합의’가 도출됐다. ‘동결’ 단계에서 ‘불능화’ 단계로 나아간 북핵 문제는 2007년 말까지 북한이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함으로써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애초 계획보다 반년이 늦어졌지만, 초미의 관심 속에 마침내 지난 6월26일 오후 6시30분(베이징 현지 시각) 북한이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 쪽에 인편으로 핵 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6월27일 오후 ‘세기의 포퍼먼스’가 펼쳐졌다.

베이징서 자연스런 3자 회담 가능성

〈CNN방송〉이 전세계로 생중계를 하는 가운데 이날 오후 5시5분께 평북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이 폭발음과 함께 뿌연 먼지 더미에 휩싸였다. 탑 꼭대기와 밑바닥에서 동시에 치솟아오른 먼지 기둥은 이내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냉각탑이 드러누우면서 한 차례 더 뿌연 안개를 뿜어냈다. 핵분열 때 원자로의 열을 식히는 장치인 냉각탑에서 증기가 분출될 때마다 미 정보기관은 북한이 핵 시설을 가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냉각탑은 ‘북핵의 상징물’이자 북-미 적대관계의 ‘표상’이었다. 상징의 퇴장은 언제고 상징적이다. 냉각탑 폭파는 미국엔 북핵 상황 진전의 성과물이고, 북한엔 핵 폐기 의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성명이었다.

흔히 북핵 문제를 ‘다원고차방정식’이라고 부른다. 6자회담 틀에서 볼 때, 변수는 △북핵 폐기 △대북 제재 해제 및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 구축 △경수로를 포함한 대북 경제 지원 등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 4가지 변수는 혼자 움직일 수 없다. 최종 목표점을 향해 4가지 변수가 걸음을 맞춰 동시에 바뀌어가야 한다. 그래서 문제가 쉽지 않다.

‘불능화’ 다음은 ‘폐기’다. 북한이 핵 폐기로 가는 일련의 행동을 하면, 미국과 여타 6자회담 참가국도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교역법 적용 종료는 불능화 단계의 약속이다. 국제금융기구 가입을 포함한 후속 조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 6자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논의될 동북아 다자안보포럼은 어떻게 구성해나갈 것인가? 불능화 단계에선 중유 100만t을 지원하는 것으로 갈음했지만, 폐기 단계에선 경수로 재개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미국은 ‘경수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냉각탑 폭파는 ‘시작의 끝’일 뿐 ‘끝의 시작’은 아닌 게다.

미국은 본격적으로 대선 국면으로 들어섰다.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는 ‘대북 강경론’을 주창하며, 임기 말 부시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다. 북한도 이미 지난 2000년의 경험으로 이를 잘 알고 있다. 폐기 단계의 본격화는 쉽지 않아 보인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신안보정책실장은 “부시 행정부의 남은 임기 동안 이뤄낼 수 있는 최대치는 곧 재개될 6자회담에서 포괄적이나마 핵 폐기 로드맵에 참가국들이 합의하는 것”이라며 “여기에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방북과 평양-워싱턴 외교대표부 동시 설치까지 이어진다면 예상 밖의 수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김창수 민주평통 전문위원은 “할 수 있는 최고치는 6자 외무장관 회담 정도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오는 8월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해, 이미 개막식 참가 의사를 밝힌 이명박·부시 대통령과 자연스레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이 이뤄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일부의 장밋빛 전망에도 김 위원은 “이미 시기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실효성 있는 3자 정상회담을 한 달 남짓 남은 기간에 준비하기는 역부족이란 게다.

평화체제 논의의 ‘손님’이 될 것인가

그래서 더욱 남과 북의 현 상황이 뼈아프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 당국 간 대화는 철저히 단절된 채다. 마지못해 대북 옥수수 5만t 지원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북은 그저 묵묵부답이다. 불능화 단계의 완성에 발맞춰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및 동북아 다자안보 체제에 대한 논의도 진전될 수밖에 없다. 핵 폐기는 경제뿐 아니라 외교·안보적 보상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색한 표정으로 회담장에 들어설 우리 대표단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의 ‘글로벌 외교’가 무색하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정녕 ‘손님’이 되고 말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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