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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사는 원가를 공개하라

등록 2008-06-20 00:00 수정 2020-05-03 04:25

원유 1ℓ는 생수보다 싼 843원… 사실상 4개사 독과점 체제에서 짬짜미 의혹도

▣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명박 대통령이 집중 관리를 지시한 생활필수품 52개 품목, 이른바 ‘MB 물가지수’에서 가장 가파르게 오른 것은 석유제품이다. 5월 MB 물가지수는 지난해 같은 달에 견줘 6.6%쯤 올랐다. 하지만 경유(46.5%), 등유(46.4%), LPG(24.1%), 휘발유(16.3%) 등 기름값은 폭등했다.

물론 기름값이 치솟는 이유는 세계적으로 원유값이 크게 오른 탓이 가장 크다. 하지만 석유값 급등의 이면에는 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의 폭리와 담합이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도 높다. 이에 따라 경유 등의 원가를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영업이익 감소의 이유는 부채

정부는 5월29일 국내 소비자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90개 수입품목의 1분기 수입가격을 공개했다. 3만원대에 수입한 나이키·아디다스·푸마 운동화는 백화점에서 20만원대로 둔갑해 있었다. 7배가량 폭리를 취한 셈인데, 수입업자와 백화점이 주로 마진을 챙겼다. 정부의 수입가격 공개는 공급자들에게 가격 인하 압력을 가하는 한편 소비자의 합리적 구매와 업체들의 가격 인하 경쟁을 함께 이끌어내려는 의도에서다. 하지만 정부는 정작 한 달 생활비 가운데 20%를 차지하는 석유제품의 원가 공개에는 손을 놓고 있다.

정유사 폭리를 거론하면 정유사들은 성적표(올해 1분기 실적)를 들이민다. 올 초부터 국제유가가 급등했지만 오히려 영업이익이 줄어들었고 심지어는 적자를 기록했다고 하소연한다. GS칼텍스는 올 1분기 232억원의 적자를 냈다. SK에너지의 경상이익은 1544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69.9% 줄었다. 에쓰오일의 순이익은 54.8%가 감소한 1170억원이었다.

그동안 정유업계는 환율 상승과 유가 상승분을 휘발유나 경유 가격에 바로바로 반영해왔다. 그런데 왜 수익이 떨어진 것일까? 환율이 올라(원화 약세) 환차손을 입은데다, 정유사들이 15조원에 가까운 외화 부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환율 상승으로 불어난 이자까지 합치면 손실 규모는 더 커진다. 영업이익을 내고도 순이익이 마이너스인 이유다. SK에너지는 지난해 말 기준 4조원 가까운 외화부채를 갖고 있다. GS칼텍스는 6조원대, 에쓰오일은 3조원대, 현대오일뱅크는 1조원대 빚을 지고 있다. 정유사들이 설비투자 등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조달한 빚이다.

그러나 환차손을 뺀 단순 마진만 따져보면, 정유회사들은 국제유가 상승을 빌미로 정제마진을 오히려 늘려왔다. 국제유가가 오르는 것 이상으로 제품 가격을 올려받고 있다는 얘기다. 정유사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경영전략으로 인한 부담을 기름값 올리기를 통해 고객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고 있는 셈이다. 차홍선 한화증권 연구원은 “정유사들이 등유·경유 마진 상승으로 1996년 이래 최고의 정제마진을 기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식시장에서 정유회사 매수 추천이 잇따르고 있는 이유다. 이처럼 정유사들은 환율 변동분을 국내 기름값에 반영해왔지만, 정확히 얼마나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공개를 거부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1ℓ당 2천원을 오르내리는 경유의 수입가는 얼마일까? 또 마진은 얼마나 될까? 간접적으로 따져볼 수 있다.

원유 단위는 배럴이다. 1배럴은 158.9ℓ다. 두바이유 1배럴이 130달러라고 하면 비싸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1ℓ로 따져보면 843원쯤 된다. 생수 1ℓ가 1천원쯤 하니, 생수보다 싼 가격이다. 물론 이를 휘발유, 경유 등으로 정제해 파는 과정에 인건비, 시설비 등 비용이 추가로 들어가지만, 그 정확한 내역과 마진율은 정유사들이 밝히지 않고 있다. 소비자들은 기름이 시장에 나오는 최종 가격만 알 수 있다.

경유의 경우, 6월11일 GS칼텍스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목표가격은 1ℓ에 1820원이었다. 여기에서 유류세와 부가가치세 10%를 빼면 GS칼텍스의 세전 목표가격은 1183원. 정유사가 원유를 정제해 일정한 마진을 붙여 국내 주유소에 공급하는 가격이다. 같은 날 기준으로 국제 경유 가격은 1배럴에 171달러였다. 이를 ℓ단위로 환산하면 1ℓ에 1107원. 국내 정유회사의 세전 공장도가격이 국제가격보다 1ℓ에 76원이나 비싼 것이다. 이에 대해 GS칼텍스의 한 고위 임원은 “관세와 물류비, 보관비 등이 더해져 정유사 가격이 국제가격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고 해명했다.

“10년간 27조 부당이익 챙겼다”

그러나 진수희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해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유사들이 공장도 가격을 부풀려 신고해 바가지를 씌우고 정부는 유류세 징수를 위해 이를 묵인해줘 소비자들이 1870억원을 더 부담했다고 주장했다. 진 의원실 박창식 보좌관은 “정유사들이 이런 수법으로 유가가 자율화된 1998년 이후 2007년 상반기까지 27조6천여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겼다. 이 때문에 소비자들은 지난해 상반기 휘발유값을 제값보다 ℓ당 39원씩 더 내고 구매했다”고 지적했다.

정유사들은 석유값 짬짜미(담합) 의혹도 받고 있다. 지난해 2월 공정거래위원회는 정유사들이 짬짜미를 했다며 526억여원의 과징금과 시정 명령을 내렸다. 검찰은 지난해 5월 SK에너지·GS칼텍스·현대오일뱅크 3사를 경유가격 담합 혐의로 기소했다.

민주노총 전국운수산업노조 화물연대와 전국건설노조 조합원 526명도 지난해 5월 가격담합에 따른 피해를 주장하며 정유 4사를 상대로 1인당 50만원씩 모두 2억63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정유사들이 사상 처음 소비자들에 의해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 것이다.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서상범 변호사는 “한 달에 몇백만원씩 기름을 구매하는 화물·건설·운송 노동자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생계형 운전자와 소비자들의 피해를 막고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를 뿌리뽑기 위해 소송을 냈다”고 말했다. 이들은 소장에서 정유사들이 공익모임을 만들어 가격 짬짜미를 논의했고 시장가격 안정화 등의 표현을 써가며 가격 인상을 유도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정유사들은 공익모임이 유사휘발유 세녹스에 대한 대책회의이며, 가격 안정화 추진은 유사휘발유 단속을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상표표시제’ 폐지가 가격 내릴 수 있을까

정유사들이 쉽게 폭리와 담합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현재 석유시장이 정유 4사의 독과점 체제이기 때문이다. 대형 정유사들과 경쟁하기 위해 싼 가격으로 석유를 팔아왔던 석유 수입 회사는 한때 20곳이 넘었지만, 현재 살아남은 회사는 2곳에 그친다.

윤원철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정부가 법을 바꿔 석유 수입 회사에 비축 의무를 지도록 했다. 비축을 하려면 시설비·유지비와 같은 비용이 들어간다.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새로 진입하는 사업자에게 어느 정도 규제를 완화해줘야 한다. 하지만 정유사들의 로비는 치열했고 결국 석유 수입 회사들은 어마어마한 부담이 되는 비축 의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국내 정유사와 석유 수입 회사들은 가격경쟁 관계에 있었으나, 최근 국제가격 상승과 수입사의 몰락으로 국내 시장은 사실상 4대 정유사 독과점이 굳어져버렸다.

현재 지식경제부는 특정 정유회사의 제품만 팔도록 하는 ‘주유소 상표표시제’(폴사인제)를 없애 주유소가 여러 정유회사의 제품을 취급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상표표시제를 폐지해 자연스럽게 정유사들의 가격경쟁을 이끌어내 기름값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사회에선 더 근본적인 해법을 요구한다. 이버들 에너지시민연대 정책차장은 “정유사들의 폭리 의혹이 짙은데 원가 정보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정부가 나서 시장조사를 통해 폭리 의혹을 없애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시장가격을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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