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로 세척한 미국산 닭의 수입을 재개하겠다는 EU 집행위원회에 반발하는 유럽인들
▣ 브뤼셀(벨기에)=글·사진 도종윤 전문위원 ludovic@hanmail.net
“염소(Cl)로 세척한 닭고기를 수입하는 건 절대 안 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최근 염소 세척 과정을 거친 미국산 생닭 수입을 재개하겠다고 밝히자, 유럽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는 목소리다. 한국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문제로 들끓고 있는 새 공교롭게도 유럽에선 미국산 닭고기 수입 재개 문제가 뜨거운 논란을 부르고 있다. EU는 지난 1997년 이후 11년째 미국산 닭고기의 수입을 금지해왔다. 미국산 닭이 판매되기 직전, 저농도 염소로 세척을 하기 때문이다. 닭고기 세척용수는 마실 물 수준이어야 한다고 못박고 있는 EU에서 이런 처리 방식이 금지돼 있음은 물론이다.
논란은 느닷없이 시작됐다. 지난 5월8일 보이든 그레이 통상담당 미국 특별대사는 기자들과 만나 “EU의 미국산 닭고기 수입금지 조처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으며, (프랑스 등) EU의 일부 닭고기 생산업자들도 다른 나라에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 닭고기를 수출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레이 대사는 또 “이 문제가 이른 시일 안에 타결될 것이며, 6월로 예정된 EU-미국 정상회담 전에 해결될 것”이라는 발언을 해 이미 수입 재개 가능성이 점쳐졌다. 이어 5월13일에 열린 유럽이사회(EC) 정례회담에 참석한 귄터 베르헤옌 기업담당 집행위원은 “다음달(6월) 슬로베니아의 루블라냐에서 열리는 EU-미국 정상회담에 앞서 미국산 닭고기 수입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것이라고 미국 대사에게 확신을 줬다”고 말했다.
알아서 씻어먹을 테니 ‘과학적 근거’ 없다?
마침내 5월28일 EU 집행위원회가 생닭에 남아 있는 오염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되는 4가지 금지된 화학물질로 처리된 닭고기도 수입이 가능토록 하는 내용의 대미 제안서를 공개했다. 집행위원회는 제안서 내용을 공개하면서 “유럽식품안전청의 검사 결과 관련 물질들은 모두 문제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는 또 “도살된 닭은 조리되기 전 반드시 식수로 헹구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어떤 잔유 물질도 남지 않게 된다”고 덧붙였다. 알아서 씻어먹고 있으니 ‘안심’이란 얘기다.
사실 이 문제는 미국-유럽 간 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서양 양안 간 경제회의’(TEC)가 지난 2007년 4월30일 발족되면서 최우선 해결 과제로 꼽혀왔다. TEC는 두 지역 간 무역에 비용 부담을 일으키는 기술 표준 및 규정을 정비해 기업들이 서로 자유롭게 무역하고 투자하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실적으로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FTA)이 어려운 상황에서 TEC는 차선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TEC는 금융, 의약, 특허, 지적재산권 등의 분야에서 제약 조건이 되는 규정을 제거하는 것을 구체적인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몇 년 동안 유럽연합의 닭고기 수입 금지 조처를 철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으나 소용이 없었던 미국은 “TEC에서 이 문제가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거론하면서 닭고기 문제를 크게 부각시켰다.
TEC 통한 이익 앞에 ‘닭 압력’ 거부 못해
EU 집행위원회의 발표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선 곳은 유럽의회 환경위원회다. 환경위원회는 집행위원회가 제안서를 공개한 직후 보도자료를 내어 “이번 결정은 EU의 식품안전 기준에 어긋난다”며 “현재 식용으로 쓰는 닭고기를 염소로 세척하는 작업은 EU 전역에서 금지돼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프랑스의 안 페레이라 의원과 키프로스의 파페디물리스 의원 등은 “(집행위원회의 결정은)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들은 또 “집행위원회가 EU 소비자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EU 회원국 중 자유무역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스웨덴조차 에스킬 엘란드손 농업장관이 나서 “우리는 원칙적으로 자유무역을 지지하지만, 음식물은 반드시 안전해야 한다”며 집행위원회를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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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의 반발도 거세다. 유럽소비자기구, 유럽농민기구, 유럽환경사무소 등은 ‘염소 처리된 미국산 닭고기 수입 재개 반대’ 의견을 담은 공개서한을 집행위원회에 전달했다. 이들 단체는 서한에서 “미국은 여러 조처에도 불구하고 살모넬라균 같은 박테리아를 여전히 안전하게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며 “유럽식 관리 방법이 훨씬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세계적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조르고 리스 유럽담당 국장은 “마누엘 바로수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유럽 시민들보다 미국 행정부와 더 친해지고 싶은가 보다”며 “집행위원회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높은 수준으로 유지해왔던 식품안전 기준을 포기해버렸다”고 비판했다.
여론의 거센 반발에도 집행위원회에 주어진 선택의 폭은 넓지 않다. TEC를 통해 유럽도 미국에 요구하는 것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역 분야에서 대서양 양안 간 ‘협력 강화’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럽연합은 미국 국적의 컨테이너선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때 출항하는 유럽 각국의 항구에서 검역이나 통관 등 모든 검사를 마치자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테러 위험’을 내세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또 미국은 가전제품을 판매할 때 작업장 안전검사 확인서가 있어야 한다고 국내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유럽 쪽은 생산업체가 제공하는 자체 안전 규정 확인서로 대체하자고 맞서고 있다.
유럽과 미국 모두 제3세계 시장 접근을 위해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EU가 쉽게 판을 깨지 못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양쪽은 중국이나 인도 같은 신흥시장에 진출할 때, 이들 나라가 외국인 투자 등 일부 영역에서 시장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며 공동 압력을 행사하는 방안을 협의하고 있다. 이런 압력 조처의 하나로 양쪽은 중국 등지에서 들여오는 일부 공산품(장난감 등)에 공동 안전규제 장치를 마련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래저래 얽힌 마당에 생닭 수입 재개 문제로 미국과 정면으로 맞서기 어려운 사세인 게다.
27개국 수의검역 전문가 중 26명 ‘반대’
미국을 능가하는 경제규모를 가졌지만, 식량 가격 폭등과 유가 상승 등으로 경제에 빨간 불이 켜진 유럽으로선 미국의 요구를 쉽게 무시하지 못할 처지다. 게다가 미국의 압박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레이 통상 특별대사는 앞서 언급한 5월8일 인터뷰에서 자국산 닭고기 수입 재개 여부를 양안 간 경제협력의 지표로 삼을 것임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유럽-미국 간 연간 무역규모는 6200억달러에 이른다. 이 가운데 미국산 닭고기 수출 규모는 2억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닭고기 수출입 문제는 TEC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미국산 닭고기 수입 재개 문제를 주의 깊게 지켜볼 것이다.”
지난 6월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연합 수의검역 전문가 위원회가 소집됐다. 27개 회원국 대표가 참가한 이날 회의에선 집행위원회의 미국산 생닭 수입 재개 결정에 대한 찬반투표가 벌어졌다. 결과는 만장일치에 가까웠다. 26개 회원국 대표가 반대표를 던졌고, 영국이 유일하게 ‘기권’을 선택했다. 이에 대해 미 양계수출협회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이 단체는 성명을 내어 “유럽연합 쪽의 움직임은 명백한 보호무역주의”라고 비난했다. ‘미국산 닭고기 파동’은 이제 겨우 시작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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