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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크바, 60년간 꾸는 악몽

등록 2008-05-20 00:00 수정 2020-05-03 04:25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끝난 날 시작된 팔레스타인의 대재앙, 그들이 증언하는 아직도 생생한 기억들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암만(요르단)= 김동문 전문위원 yahiya@hanmail.net

지난 일은 잊혀진다. 아프고 쓰린 과거도 세월에 씻겨 무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과거’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세대를 초월해 그런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의 삶은 그래서 현재 시제다.

“유대인들이 공격해오기 전까지 닷새 동안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이윽고 유대인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북쪽만 열어둔 채 마을 동·서·남쪽 세 방향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우리 마을은 작은 곳이다. 주민들은 갈 데가 없었다. 유대인들의 공격에 맞서던 사람들 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도망쳤다.”

문 앞에 땅을 파서 폭발물을 설치하고…

팔레스타인 땅 후세이니야 출신 메리암 오트만(71)은 레바논 남부 부르즈 아쉬말리 난민캠프에서 살아가고 있다. 팔레스타인 난민 1세대인 그는 열한 살 되던 해인 1948년 5월 어느 날 고향 땅을 등졌다. 지난 2002~2005년 레바논에 있는 12개 유엔 난민캠프에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난민 1세대를 인터뷰해 약 1천 시간분의 증언필름을 모아놓은 ‘나크바 아카이브’(www.nakba-archive.org)에서 그의 증언을 찾아봤다. 이 사이트엔 팔레스타인 130여 마을 출신 1세대 난민 500여 명의 증언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오트만의 증언은 계속된다.

“아버지가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돌아온 아버지는 ‘마을이 온통 유대인 천지’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가자’고 말했다. 아버지는 ‘빠져나갈 데가 없는데 어디로 갈 것이냐’며 ‘아무 일도 없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나 드리자’고 했다. 잠시 뒤 유대인들이 우리 농장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들은 우리 가족이 키우던 소 3마리를 죽여버렸다. 당시 아버지는 자그마한 권총을 가지고 계셨다. 이내 아버지가 유대인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 말했다. 곧 총알이 빗발쳤다.”

그 끔찍한 날의 기억, 반세기를 훌쩍 넘긴 그날의 충격과 공포는 오트만의 뇌 속에 깊이 파인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 증언은 이렇게 이어졌다.

“유대인들은 우리 집 문 앞에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폭발물을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연막탄을 집 안으로 던졌다. 연막탄이 터지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저들이 집을 폭파할 거다. 마지막 기도를 올릴 시간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곤 매트리스를 끌어다 나와 남동생 아흐메드, 여동생 라스미예를 덮어주셨다. 이내 집이 무너져내렸다. 나도 의식을 잃었다.”

오트만은 이튿날 아침까지 의식을 잃은 채 건물 더미 아래 깔려 있었다. 해가 뜨면서 마을 사람들이 주검을 치우기 위해 하나둘 몰려들었다. 남동생 아흐메드의 주검이 잔해 속에서 발견됐다. 이웃집에 살던 사촌이모의 주검도 나왔다. 그리고 생후 8개월 된 오트만의 여동생 사미라의 연약한 주검이 건물 더미에서 꺼내졌다. 사미라의 자그마한 입에는 큼지막한 돌이 박혀 있었다. 고향 마을 사람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오트만의 부모와, “살이 으스러져 뼈가 보일 지경”이던 여동생 라스미예 등 일가족을 이웃 마을로 옮겼다. 그해가 가기 전 오트만 일가는 유대인의 공세를 피해 북쪽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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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 하츠마우트.’ 히브리력 여덟 번째 달인 ‘이야르’의 다섯 번째 날을 일컫는 말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건국 기념일이다. 1948년 그날(당시 양력 5월14일), 초대 이스라엘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유대인의 나라’ 건국을 선포했다. 올해 이야르의 다섯 번째 날은 지난 5월8일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날 건국 60주년을 화려한 불꽃놀이로 기념했다.

이스라엘의 탄생은 팔레스타인에 고스란히 ‘재앙’이었다. 꼭 60년 전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자기들 땅에서 추방됐다. 그날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알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이란 뜻)라 부르는 이유다. 영국의 분할·위임 통치가 막바지에 이른 1947년부터 이스라엘 건국 이후인 1949년까지의 나크바 기간 동안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 주민의 3분의 2 이상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이스라엘이 건국을 선포한 다음날인 5월15일을 팔레스타인에선 ‘나크바의 날’로 기린다. 욤 하츠마우트와 나크바의 날은 ‘빛’과 ‘그림자’다.

유엔, 당시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 인정

‘팔레스타인’은 ‘난민’과 동의어처럼 쓰인다. 지난 2006년 현재까지 유엔의 팔레스타인 인도지원청(UNRWA)에 등록된 난민은 모두 444만8429명에 이른다. 등록되지 않은 난민들까지 더하면 팔레스타인 출신 난민은 600만 명을 넘어설 것이란 게 당시 난민지원국의 추산이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두 차례 결의안을 통해 팔레스타인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 것은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했다.

“60년 전 예루살렘 부근 작은 마을 바티르에서 나크바의 시작을 목도했다. …1948년 5월 어느 날 마을에 박격포탄이 날아들었다. 손으로 들 수 있는 건 뭐든 들고 피해야 했다. 마을 동쪽으로 자그마한 포도원과 우물이 있었다. 어머니와 여동생하고만 그곳에 도착했다.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은 따로 움직여야 했다. 잠시 몸을 피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작은 포도원이 피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낮의 열기가 높아지면서, 희망도 잦아들었다.”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유엔 주재 요르단 대사를 지낸 하산 아부 니마는 지난 4월 말 현지 영자지 에 두 차례 나눠 보낸 기고문에서 나크바 60년의 개인적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엔 나무 밑에서 한뎃잠을 잤다. 며칠 지나선 나뭇가지를 모아 간이 숙소를 만들었다. 모닥불을 피워 음식을 만들었고, 우물에서 식수를 구했다. …피난 생활이 길어지면서 일부 주민들은 목숨을 내걸고 집으로 돌아가 소지품과 가재도구 따위를 가져오기도 했다. 여름이 끝나가면서 더 이상 나무 밑에서 살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요르단 계곡 부근 난민캠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아부 니마의 가족은 베들레헴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요르단군에 입대한 형의 가족과 합세했다. 비좁은 초급 장교용 숙소에 아부 니마 가족과 형의 가족, 그리고 큰누이의 ‘대가족’이 함께 기거해야 했다. 1949년 총성이 멈췄고, 바티르는 나크바를 견뎌냈다. 아부 니마의 가족도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게 파괴된 채였다. 하지만 1967년 ‘6일전쟁’으로 바티르는 이스라엘군이 점령해버렸고, 바티르를 떠난 아부 니마는 다시 고향 땅을 밟기 위해 36년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새삼 이렇게 썼다.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얘기할 때마다, 사람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빼먹는다. 이스라엘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 사실이 있다.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팔레스타인이 희생됐다는 점이다. 수세기에 걸쳐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루아침에 무참히 쫓겨나야 했다. 바티르는 그렇게 파괴된 수백여 마을 중 한 곳일 뿐이다.”

1948년 건국에 앞서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마을 530여 개를 파괴했다. 그해 양력 4월부터 한 달여 지속된 집중 공세 ‘플랜 다레트’는 ‘인종 청소’에 가까웠다. “유대인을 겨냥한 아랍인들의 위협”이 당시 이스라엘 쪽이 내건 명분이었다. ‘청소’가 끝난 마을에는 전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정착’했다. 이스라엘 건국 즈음에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만 당시 140만 인구 가운데 절반을 넘어서는 75만여 명에 이른다. 세대를 이어가며 ‘난민’ 신분은 세습되고 있다. 대재앙은 60년이 지난 지금껏 팔레스타인의 현실이다.

“내가 태어나 살던 땅은 오렌지와 레몬, 살구가 많았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땅이었다.” 나크바를 언급할 때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던 땅의 아름다움과 그 땅에 대한 그리움을 제일 먼저 언급한다. 그런 뒤엔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눈에 불을 밝힌다. 그리고 이어지는 얘기는 “피난 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는 말이다. 한 사람의 예외도 찾기 어렵다.

임시 천막은 좁디좁은 영구 건물로

난민을 위한 임시 천막이 사라진 자리에 ‘영구 건물’이 들어선 지도 이미 오래다. 난민 신세도 영구적이 돼버렸다. 요르단의 대표적인 난민촌인 암만의 알위흐다트. 1955년에 유엔이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을 위해 만든 마을이다. 7560세대 4만5천여 명의 난민이 2444채의 집에 나눠 살고 있는 알위흐다트는 요르단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 가운데 최대 규모다. 건물 한 채에 여러 가족, 여러 세대가 같이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허름하나마 ‘내 집’을 갖고 있는 비율은 30%밖에 되지 않는다.

난민촌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좁디좁은 집과 집 사이 간격이다. 서로 마주한 두 집 사이의 골목길은 어른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지나가기조차 버겁다. 그래도 비좁은 실내보다 그나마 트인 공간인지라, 그 좁은 골목길마다 작은 의자를 내놓고 햇볕을 쬐며 얘기를 나누는 노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1948년 나크바가 불을 품을 때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 난민 1세대다.

골목을 따라 마을을 돌다 무화과 나무 곁에 앉아 있는 아흔세 살 후세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1915년 팔레스타인 땅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의 위임통치 시절 영국군에 입대해 리비아의 사막에서 독일군과 맞서 싸웠다. 3년여 군복무를 마친 뒤 고향 땅으로 돌아왔지만, 서른세 살 되던 해 나크바가 시작됐다. 그는 가족과 함께 가자지구로 들어갔다. 난민생활의 시작이었다. 당시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장악하고 있었다. 후세인은 다시 이집트군에 입대해 2년간 복무했다. 1967년 6일전쟁이 벌어졌고, 마흔두 살이 된 그는 전화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요르단강을 건너야 했다.

“이 무화과 나무는 이곳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심은 것이다. 알위흐다트 난민촌이 처음 문을 연 게 1955년이니, 벌써 수령이 53년이나 된 게다.” 신산스런 난민살이는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무국적자’의 삶이다. 이들을 대표해 줄 나라가 없는 탓에 그저 ‘가자 사람’으로 불린다. 1948년부터 난민으로 떠돌고 있는 난민 1세대는 물론 요르단에서 나고 자라 환갑을 바라보는 난민 2세대도, 그들의 후손도 모두 국적없는 ‘가자 출신 난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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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유엔난민기구(UNHCR)가 아닌 유엔 팔레스타인 인도지원청(UNRWA)이 떠맡고 있다. 1950년 세워진 인도지원청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1946년 6월1일부터 1948년 5월15일 사이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다가 1948년 전쟁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사람’으로 규정한다. 이 규정에 따라, 1967년 ‘6일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지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피난길에 나선 30여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 지위도 인정받지 못했다. 다행히 당시 서안지역을 이스라엘에 빼앗긴 요르단 정부가 자국으로 들어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집단적으로 시민권을 부여한 탓에, 이들 중 상당수는 요르단 사회에 스며들 수 있었다(요르단 정부는 지난 1988년 7월 서안지역 출신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시민권 부여 정책을 중단했다).

알위흐다트 난민촌 골목길에서 만난 여든 살 마흐마드 할아버지는 난민 1세대다. 1918년 팔레스타인 땅 베르셰바에서 태어난 그는 나크바가 시작되면서 헤브론으로, 베들레헴으로, 다시 예리코로 보금자리를 차례로 옮겼다. 예리코에서 지내던 1955년에 사촌누이와 뒤늦게 가정을 일궜고, 1967년 전화를 피해 요르단강을 넘었다. 장기 난민생활의 시작이었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냐”는 말에 노인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이내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여기서 산 지 벌써 40년이 넘었다. 요르단이 내 나라다.” 제2의 고향에서 ‘난민’이 아닌 ‘국민’ 대접을 받고 싶다는 게다.

‘난민’ 아닌 ‘국민’ 대접을 받고 싶다

암만 구시가지의 자발 후세인 난민촌. 여느 요르단 마을과 겉생김이 다르지 않다. 다른 난민촌에 비해 경제활동이 활발한 덕분이다. 난민촌에서 유리·액자 가게를 운영하는 아부 라시드(55)는 “자발 후세인은 다른 곳보다 형편이 괜찮은 편”이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 서안 지역 나블루스 출신인 그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인 1967년 이곳 난민촌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부모님은 텔아비브 인근 야파 출신이다. 1948년 나크바 당시 한때 가자지구로 들어갔고, 난 4남7녀 중 넷째로 가자에서 태어났다.” 그는 1967년 전쟁 직후 요르단으로 건너왔다. 큰딸 누라(27)를 비롯해 2남4녀는 난민촌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계 요르단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크바? 솔직히 잘 모른다. 관심도 없고….” 아버지 곁에서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던 라시드(19)는 “난 요르단인일 뿐”이라고 말했다. ‘난민 3세대’로 태어난 그는 “나크바는 먼 옛날 이야기고, 가본 적도 없는 팔레스타인이 내 조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팔레스타인은 부모님의 고향이니 가보고는 싶다. 그렇지만 난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이곳이 내 나라다.”

60년은 긴 세월이다. 1세대의 그리움과 2세대의 애틋함을 3세대 이후에서까지 기대하는 건 무리인지도 모른다. 난민촌 가정에 들어서면 여지없이 마주하는 빛바랜 옛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깊이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난민’이란 법적 신분은 세습되고 있지만, 그리움과 추억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게다.

요르단강을 사이에 두고 팔레스타인을 마주 보고 있는 요르단에는 모두 10개의 공식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자리하고 있다. 암만 시내에 있는 알위흐다트·자발 후세인·바카 난민촌과 요르단 북부의 제라시 인근 가자 난민촌, 수프·마르카·이르비드 난민촌…. 이들 난민촌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요르단 일반 주거 공간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이곳이 난민촌임을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난민촌임을 알리는 확실한 ‘표식’이 있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유엔 깃발이다. 여전히 유엔이 운영하는 난민학교가 있고, 구호활동 사무소와 난민 지원 보건소 같은 시설마다 유엔 깃발이 펄럭인다. 행정 구역 명칭도 ‘무카이얌’(난민촌)으로 불린다. 지금도 3개월마다 유엔의 구호식량 창고의 문이 열리고, 임산부와 가난한 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한다.

무엇보다 ‘난민’ 신분인 사람들이 그곳, 고립된 ‘게토’에 살고 있다. 쉽게 떠날 수도 없다. 난민촌 안과 밖의 물가 수준은 천양지차다. 암만에서 북쪽으로 10분 남짓 차를 몰면 가닿을 수 있는 바카 난민촌에선 방 3칸짜리 집 월세가 우리 돈 10만원 정도다. 난민촌 인근 요르단인 마을의 임대료는 그보다 2~3배가량 비싸다. ‘그들’이 난민촌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50대의 한 2세대 난민은 “난민촌을 떠나 바깥에서 사는 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돈도 돈이지만 생활환경이나 분위기가 감당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만이라도 난민에서 벗어나기를…

욤 하츠마우트 다음날인 지난 5월9일 해질 녘, 바카 난민촌 골목에서 총성이 울렸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누군가 공포탄을 발사한 게다. 일주일 전에 결혼한 칼릴(30)이 5살 연하의 신부를 친정인 난민촌 인근 아인 알바사 마을에서 데려왔다. 그는 난민 2세, 신부는 난민 3세다. 이들의 새 출발을 축하하는 불꽃놀이는 없었다. 몇십 명의 하객이 몰려들었지만, 흔한 차 한 잔 내놓지 못했다. 잔칫집의 풍성함은 애초 기대할 수 없는 형편. 그들의 아이들도 난민으로 살아갈 처지다. 귀환은 없다. 허락되지도 않을 것이고, 애써 원하지도 않는다. 희망 없는 삶. 아이들만이라도 난민 신분에서 놓여나기를 바랄 뿐이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끝나던 날, 팔레스타인 민중의 고립과 유형은 시작됐다. 디아스포라는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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