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그 조기 유학생은 왜 F를 받았나

등록 2008-05-09 00:00 수정 2020-05-03 04:25

미국 대학 한인 교수의 ‘알맹이 빠진 영어 몰입 교육’ 비판… 유창한 영어 실력 자랑해도 지식 습득 능력 없으면 필패

▣ 최진봉 미네소타주립대 교수·매스커뮤니케이션학

지금 대한민국은 영어 열풍을 넘어 영어 쓰나미 시대를 맞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의욕을 넘어 사명감을 가지고 추진하는 영어 몰입 교육은 사교육 경쟁을 더욱 부추겨서 결국 공교육을 황폐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은 가운데 한국 사회는 교육 대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영어 쓰나미에 대비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직업과 적성, 그리고 필요에 관계없이 누구나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감 때문에 학생, 취업 준비생 그리고 직장인들까지 영어 공부에 사활을 걸고 매달리는 형편이다.

어려서부터 영어 잘해야 한다?

아직까지 영어가 세계 공용어의 위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세계화·국제화 시대에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세계 시장에서 우리나라 상품의 판매를 높이기 위해 영어가 필요하다는 데는 아무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영어를 잘해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 많다. 실제로, 필자도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연구 활동이나 사회적 활동 영역이 크게 확대됐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교수가 되어 영어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학회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참여해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다른 나라 교수들과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가 하면, 연구 프로젝트도 함께 진행하는 등 연구 및 교육 활동 영역이 세계 무대로 확대됐다. 필자의 이러한 연구와 교육 활동 영역의 확대는 영어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필자의 연구와 교육 활동의 영역 확대가 단순히 영어를 잘해서 얻어진 것은 분명 아니다. 전공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과 이론적 배경, 연구방법 등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과 미국의 대학에서 습득한 전공 분야에 대한 이론적인 배경과 연구 방법 등 전문지식이 준비된 상태에서 이를 세계 공용 언어인 영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연구와 교육 활동이 국제화·세계화될 수 있었다.

사실 필자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기 전까지는 영어 실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외국인을 만나면 피하고, 외국인들의 간단한 영어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는 정도로 영어 실력이 미진했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고, 4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네소타주립대 교수가 되었다. 물론 미국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영어 실력을 키우기 위해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건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려서부터 유창하게 영어를 하지 못했고 심지어 성인이 된 뒤에도 외국인을 피해 다니던 필자도 미국에 와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대학의 교수로 임용된 것을 보면, 어려서부터 영어를 잘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영어를 꽤 잘하는 우리나라 조기 유학생들의 사례를 보면서 어려서부터 영어를 잘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가 맞지 않음을 또다시 실감했다. 필자가 미국 생활을 하면서 만난 학생들은 중학교나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 유학을 와서 미국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대학에 진학을 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발음, 표현력 등에서 미국인들과 대화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영어 실력을 자랑한다. 그런데 이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조기 유학생들 중에서도 미국 대학에서 낙제 학점인 F학점을 받고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내용은 부실한데 수단에만 집착

필자가 아는 한 학생의 경우, 고등학교 때 조기유학을 와서 미국 대학에서 간호학을 전공했는데, 지난 학기 두 번 이상 낙제 학점인 F학점을 받아 간호학과에서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학생은 한국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 와 미국인 가정에서 생활하며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 대학에서 4년째 공부하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 비해 영어 습득이 휠씬 유리한 어린 나이에 유학을 와 7년 이상을 미국에서 생활한 까닭에 미국인과 대화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영어를 잘 구사했지만, 정작 전공 지식 습득 능력이 부족해 공부를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조기유학을 통한 생활영어 습득이 자신의 진로와 전공 분야 공부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한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인 학생의 경우도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다른 학과에 비해 더 높은 영어 실력을 요구하는 언론학 대학원 과정에 입학했지만, 전공과목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낙제 점수를 받아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영어구사 능력은 뛰어났지만 토론 중심의 교육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결국 미국에서의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영어만 잘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글로벌 시대에 경쟁력 있는 인재는 단순히 영어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탁월한 지식과 창조적인 사고력을 갖춘 인재이다. 따라서 다른 교육 분야에 대한 질적 향상 없이 단순히 영어 교육만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의 영어 몰입 교육 정책은 마치 전달할 내용(콘텐츠)은 부실한데, 전달할 수단(매체)에만 집착하는 알맹이 빠진 겉치레에 불과하다.

정부가 영어 몰입 교육에 치우쳐 다른 교육 분야를 소홀히 하게 되면 교육정책의 불균형을 가져오게 되고, 결국 경쟁력 있는 글로벌 인재 양성에 실패하게 된다. 언어는 다른 사람과 자신의 생각과 의견, 그리고 지식을 교환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전달할 내용이 있을 때 이용 가치가 있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진정한 질적 가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보다 커뮤니케이션 내용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다. 언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이 전달할 내용이 없다면 이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내용이 충실한 인재를 키우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영어능력평가시험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대입에서 영어시험 대신 일정 수준 이상이면 통과되는 영어능력평가시험을 도입하겠다는 김도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제안은 긍정적으로 검토할 만하다. 대학의 신입생 선발 기준은 입학 뒤 발휘될 학업 성취 능력에 초점을 맞춰야지, 대부분의 강의가 한국어로 진행되는 한국 대학에서 영어 성적이 입학의 중요한 변수가 돼야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유학이나 외국 회사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처럼 높은 영어 실력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의 경우 다른 학생들보다 영어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하겠지만, 일반 학생들의 경우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영어 실력만 갖추고 있으면 된다. 따라서 대학 신입생 선발에서 영어는 대학에서 공부하는 데 필요한 일정 수준이 되는지 안 되는지만 평가하고, 그보다는 전공 분야를 공부할 수 있는 학업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를 더 중요한 선발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전문지식을 갖춘 인재가 영어까지 잘하면 금상첨화겠지만, 전문지식 하나 없이 영어만 잘한다면 빈 수레가 요란하듯 정작 실속은 챙기기 어려울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는 균형 잡힌 교육정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명박 대통령과 교육 당국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