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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터는 얼마나 ‘에코’적일까

등록 2008-04-17 00:00 수정 2020-05-02 04:25

세계 ‘지속가능성보고서’ 발간 기업 중 국내기업은 0.9%, ‘사회적 책임’ 생각하는 친환경적 관리를…

▣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롯데백화점에 근무하는 박상호(34) 과장은 사람들을 만나 명함을 내밀 때마다 어깨가 ‘으쓱’하다. ‘Think Tomorrow’(내일을 생각한다)라는 슬로건이 작은 새 그림과 함께 인쇄된 명함은 재생지로 만든 것이다. 박 과장이 근무하는 부서는 환경가치경영사무국이다. 마케팅부문 소속이지만 이름 그대로 ‘그린 마케팅’을 연구하고 기획·집행하는 부서라는 점에서 기업의 ‘환경 마인드’를 상징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기업의 ‘기후변화 대응능력’이 투자 좌우

서울시 푸른도시국에서 근무하는 박성대(40)씨는 지난해 시청 본관에서 남산 기슭으로 사무실을 이전한 뒤부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라고 한다. 창문 밖으로 녹지가 보이고 출퇴근 시간에 맑은 공기를 마시니 업무 효율이 배가된다는 것이다. 박씨와 동료들은 지난 1월 창고처럼 방치된 휴게 공간을 싹 바꿨다. 사무실 이전으로 창문 크기가 맞지 않아 쓸모없어진 우드 블라인드를 벽에 붙이고, 비품 교체에 따라 역시 애물단지가 된 회의 탁자에는 테이블보를 입혔다. 식물도 들여놓았다. 그 뒤로는 각종 부서 회의가 이 ‘숲 속 카페’에서 이뤄진다. 박씨는 “외부 손님이 왔을 때 애용하는데, 자리 경쟁이 치열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30~40대 ‘에코아빠’들이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는 얼마나 ‘에코적’일까. 요즘 기업들이 앞다퉈 내세우는 경영 화두는 ‘가치경영’ ‘환경경영’ ‘사회책임경영’이다. 글로벌 트렌드다. 하지만 ‘글로벌한 평가 지표’들을 참고하면, 아직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의 3월 말 발표를 보면, 지난해 전세계 2500개 기업이 기업의 경제적·환경적·사회적 성과와 과제를 담은 ‘지속가능성보고서’를 발간했다. 하지만 국내 기업의 참여는 0.9%(23개 기업)에 그쳤다. ‘지속가능성’이란 ESG라는 이니셜로 압축되듯 △환경적(Environment) 노력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 △건강한 지배구조(Governance)를 통해 기업의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진단하는 것이다. 기업의 성과와 과제를 공개하고 투자자 및 이해관계자의 반응을 얻어 경영에 반영하는 의사소통 도구의 하나로, 해외 기업설명회(IR)에 필수 자료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 현대자동차, 삼성SDI, 한화석유화학, 한국다우코닝 등 4개사가 처음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한 이래 국가기관(지난해 산업자원부)을 포함해 51곳만 이 보고서를 내고 있다.

세계 36개 나라는 교토의정서에 따라 올해부터 2012년까지 1990년 대비 평균 5.2%의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 이런 전 지구적 과제는 기업도 비켜가지 않는다. 기업의 가치는 더 이상 재무제표만으로 보증이 되지 않는다. 생산·제조·유통 과정에서 온실가스의 주범인 탄소 배출 규모가 어느 정도이고 얼마나 줄이는 노력을 하는지 등을 따지는 기업의 ‘기후변화 대응능력’은 이미 기업에 대한 투자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지구에 이로운 방식으로 기업 운영을 하는 친환경 기업을 격려하고 돕는 차원이 아니다. 경영상의 기회와 리스크 관리 능력을 아울러 살펴, 안전하게 돈벌이를 하려는 목적이 크다. 세계 225개 투자기관으로 구성된 온실가스 저감 대책기구인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Carbon Disclosure Project) 위원회’는 5년째 전세계 기업의 기후변화 대응능력을 진단해왔다. 정보공개를 요청하고, 그 결과를 분석해 성적을 매긴다. 이 정보에 기초해 세계의 탄소 배출권 거래 사업이 활기를 띠고, 각종 친환경 공법도 탄력을 받는다.

국내에서는 2006년 포스코가 처음으로 CDP 평가에서 순위에 올랐을 뿐, 그 뒤로는 다른 소식이 없다. 정보공개에 응하는 기업도 그리 많지 않다. 지난해 CDP 위원회는 국내 28개 기업에 설문지를 보냈으나 답변한 기업은 10곳에 그친다. 올해 CDP 한국위원회가 발족해 시가총액 상위 50대 기업에 설문지를 보냈으나, 기한인 6월 말까지 답변하겠다고 한 기업은 절반가량이다. “준비가 안 돼서” “완벽하게 마련하지 못하겠다” “우리 업계에서는 어느 기업이 한다고 했느냐” 등 돌아오는 답변에서 짐작되듯 상당수 기업들이 관망하거나 눈치를 보는 중이다.

정보공개는 기업 체질 바꾸는 첫 출발

환경경영 슬로건은 난무하지만 독자적인 환경전담 부서를 둔 기업도 그리 많지 않다. 유한킴벌리나 풀무원 등 자칭 타칭 ‘친환경 기업’을 표방한 곳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업에서는 홍보팀이나 기획팀 등 경영정책을 ‘알리는’ 부서들이 환경 관련 업무를 맡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환경안전, 환경시설, 환경품질 등 산업재해 방지 담당 부서가 ‘겸업’하는 양상이다. 업종별 차이도 커서 유통업계에서는 롯데백화점이 유일하다.

지난 1997년 베트남 협력업체에서 ‘아동 강제노동’ 문제가 발생해 매출 감소와 주가 하락의 쓴맛을 봤던 나이키가 일찍부터 지속가능성보고서를 발간했다면 어땠을까? 정보를 공개한다는 것은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첫 출발이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 중에도 애초에는 ‘비정부기구(NGO)의 공격’을 방어하는 차원에서 ‘환경보고서’를 내기 시작한 곳이 많다. 그러나 지구적 가치와 이슈를 공유하는 것은 더 이상 피하거나 미룰 성질의 일이 아닌, 시급한 경영 방침이 됐다. 필립스는 몇 년 전 “지속가능성은 우리 유전자 속에 있다”(Sustainability is in our DNA)라는 대형 펼침막을 네덜란드의 본사 건물에 내걸기도 했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이종오 팀장은 “수익을 따지는 재무제표는 사실상 숫자놀음이라고 할 정도로, 기업의 지속가능성이라는 큰 몸체에 견주면 빙산의 일각”이라며 “장기투자 하려는 투자자들일수록 부족하나마 일단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데 높은 점수를 준다”고 말했다.

에코경영은 친환경적 생산·제조·유통만을 뜻하지 않는다. 친환경적 관리능력을 포함한다. 노동자 인권 보장, 성차별 방지, 종업원 복지 보장, 공정거래 등을 따지는 ‘사회적 책임’에 소홀하면서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환경적 노력’만으로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한 대기업의 환경 관련 부서에 근무하는 ㄱ씨는 “우리 기업들의 에코경영은 ‘등 떠밀려’ 시행되는 면이 컸기 때문에 홍보성 이벤트에 집중하는 경향이 여전히 크다”면서 “국제적·시민적 기준으로 보면 아쉽고 부족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녹지 공간과 함께 적절한 노동 시간을

건물에 녹지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 여름철에 냉방기를 켜느냐 마느냐도 좋지만, 정작 직원들의 노동 시간이 너무 길다면, 그래서 서류철 분리 수거나 전기 절약도 못하고 주말에 가족과 앞산 나들이도 하기 어려운 삶을 산다면, 그런 회사를 에코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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