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코트 안팎에서 시끄럽지만 신나는’ 배구 만들어낸 현대캐피탈 배구단 김호철 감독 </font>
▣ 조범자 기자
<font color="#00847C"> 장면1. 2003년 겨울. 작은 키에 다부진 몸을 하고 코트에 선 그의 귀에는 흰색 리시버가 꽂혀 있었다. 경기 중 상대팀의 경기 내용을 분석한 전력분석관이 그 내용을 실시간으로 그의 귀로 전달해주기 위해서다. 다른 팀 감독들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급박한 경기 중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며 백안시했다. 2008년 겨울. 이제 프로배구 4개 팀의 모든 감독들 귀에 리시버가 달려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점잖게 벤치에 앉아 있던 감독들은 그를 따라 일어나 소리지르고 몸짓을 해가며 선수들을 독려한다. </font>
<font color="#00847C"> 장면2. 2007∼2008 프로배구 V리그 플레이오프 1차전. 대한항공에 완패한 그는 “반드시 2차전에서 승리한 뒤 3차전에서 전세를 뒤엎는 ‘쇼’를 펼치겠다”고 했다. 외국인 선수 없이 시즌을 치러낸 국내 주전들은 극도로 지쳐 있던 상황. 역전쇼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김호철 감독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배구팬들은 믿었고, 그 믿음은 거짓말 같은 대역전 드라마로 현실이 됐다. 그는 승리가 확정된 순간 자신도 놀란 나머지 만세를 부르며 코트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사람들은 그 힘을 ‘김호철 매직’이라 불렀다.</font>
최악의 침체기에 돌아온 ‘컴퓨터세터’
양복 상의 벗어젖히고 와이셔츠 소매 걷어붙이기는 기본. 코트에 드러눕고 얼굴이 벌게져라 소리지르고. 신이 나면 선수들과 얼싸안고 겅중겅중 뛰기도 한다. 현역 시절 ‘컴퓨터세터’로 불린 김호철(53) 현대캐피탈 배구단 감독. 올 시즌 챔피언컵은 라이벌 삼성화재에 돌아가 그의 3연속 우승 꿈은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한국배구연맹(KOVO) 자유게시판이나 배구팬 사이트는 삼성화재 우승에 대한 축하 멘트보다 “김호철 감독이 있어 올 시즌 배구가 즐거웠다”는 글들로 넘쳐난다.
사실 지난해 배구 인기는 2006 도하아시안게임 금메달(당시 대표팀 감독도 김호철이었다)에 기댄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올해는 국제대회 성적도 나빴고, 이런저런 악재가 겹쳐 끝까지 배구 열기를 이어갈 만한 요소가 없었다. 하지만 적지 않은 팬들은 김호철 감독 덕분에 지난 겨울이 행복했다고 입을 모은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챔피언결정전이 끝난 다음날인 지난 4월14일 오후. 그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5개월간 단단하게 조였던 긴장도 풀 겸 하루쯤은 느긋하게 쉬어도 될 법했다. 그러나 그는 경기 용인의 구단 숙소에 있었고 선수들과 면담 중이라고 했다. 개인면담을 한다는 건 벌써 내년 시즌 준비가 시작됐다는 얘기다.
“아, 어제만 해도 내 이놈들 휴가도 안 보내고 오늘부터 당장 훈련시키려고 했죠. 그런데 한 시즌 진짜 열심히 뛴 거 아니까 좀 데리고 있다가 휴가는 보내야죠, 허허.”
말은 씩씩하게 하지만 머리가 깨질 정도로 꼼꼼하고 치밀하게 선수 개개인의 훈련 스케줄을 짜고 있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2003년 늦가을. 16년간의 이탈리아 생활을 접고 친정팀 현대캐피탈(예전 현대자동차서비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첫마디는 이거였다.
“배구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중흥기 때 떠나 최악의 침체기에 돌아왔습니다. 선배로서 너무나 미안한 이 마음을, 정말 한국 배구 발전을 위해 바치면서 갚아나가고 싶습니다.”
결코 빈말처럼 들리지 않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었던 이 ‘소망’은 프로배구 출범 4년이 된 지금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는 코트 안팎에서, 경기 중이나 훈련 중이나, 큰 몸짓과 시원시원한 언변으로 ‘조용하고 재미없던’ 배구를 ‘시끄럽지만 신나는’ 배구로 바꿨다.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부임하자마자 숙소 체육관에 마련된 감독실과 코트 옆에 있던 소파를 없애버렸다. 훈련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언제 감독실에 앉아 있을 것이며 나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댈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삼성화재의 오랜 독주 속에 깊은 패배의식에 젖었던 선수들은 그때부터 눈물 쏙 빠지는 지옥 훈련을 시작했다.
과장된 몸짓과 파이팅은 의도적인 것
경기장에선 목소리와 몸짓을 키웠다. 천의 얼굴로 관중을 들었다 놨다 했다. 배구팬들은 그런 모습에 박수를 치고 열광했다.
김호철 감독은 “사실 의도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배구라는 스포츠가 네트를 사이에 두고 몸싸움 한 번 안 하는 종목 아닌가. 참 신사적인 운동이지만 그래서 보는 재미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나라도 좀 볼거리를 만들어주자 해서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기뻐하고 큰 소리로 파이팅하고 양복 상의도 벗어던지고 한다. 사실 내 성격이 모질지 않은데, 과격하다 싶을 정도로 선수들을 꾸짖는 건 다 그 때문이다”라며 웃었다.
걸음마 단계의 프로배구를 들썩들썩하게 만든 그의 모습은 마치 프로야구 초창기 야구팬들을 열광케 했던 이만수(현 SK 와이번스 코치)를 연상시킨다. 삼성 포수이자 홈런 타자였던 그는 금기시된 홈런 세리머니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홈런을 친 선수들을 그저 땅만 내려다보며 묵묵히 베이스를 도는 게 전부였다. 사람들은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괜한 몸짓으로 상대팀을 자극하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만수는 타구가 펜스를 넘어가기도 전에 펄쩍펄쩍 뛰고 허공을 향해, 홈 관중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며 기쁨을 표시했다. 많은 비난을 야기한 행동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팬들은 그 모습이 좋았다. 가슴마저 뻥 뚫리게 하는 그 장면을 보기 위해 팬들은 야구장 관중석을 꽉꽉 채웠다.
“요 몇 년간의 겨울이 행복한 이유”
김호철 감독도 다르지 않았다. 한순간도 벤치에 앉아 있지 못하고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코트 라인을 따라 맹수처럼 어슬렁거렸다. 선수들에게 벼락같은 호통을 퍼붓고 어린아이처럼 펄쩍펄쩍 뛰는 김호철 감독의 모습은 근엄한 배구판에선 충격 그 자체였다. 친정팀 현대에 오자마자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다.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이 없다”고 일갈하는 그의 모습은 이미 충격을 넘어섰다. 그건 금기를 깨는 일이었다. 하지만 팬들은 그런 모습에 갈증이 풀리는 듯한 청량감을 느꼈다. 윽박지르기만 했다면 또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긴장이 고조된 삼성화재전 전날엔 단체로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자며 선수들을 이끌고, 경기 당일엔 가위바위보로 그날의 리베로(전문 수비수)를 정하자는 엉뚱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이 역시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했다. 그의 지론은 “선수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꼰대’처럼 굴면 안 된다. 그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적 삼성화재를 꺾고 부임 첫해 정규리그 우승을 일구는 파란을 일으킨 그는 이듬해부터 챔피언전 2연패를 견인해내며 좀처럼 되기 힘들다는 ‘스타 선수 출신의 명장’으로 우뚝 섰다. 그 사이사이엔 교체 투입한 선수들이 기분 좋은 사고를 치는 이른바 ‘김호철 매직’과, ‘김호철 쇼’로 불리는 역전극의 명장면들이 양념처럼 뿌려졌다.
배구팬들은 과연 어느 팀이 우승을 차지할지 궁금해서 5개월이 넘는 긴 시간 프로배구를 지켜봤을까? 어느 팬이 게시판에 올려놓은 글은 그게 전부가 아님을 증명한다. 나아가 ‘김호철식 배구’가 4년 동안 이룬 것이 단순히 두 차례의 우승과 두 차례의 준우승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우승 청부사 김호철이 있었기에 요 몇 년간의 겨울이 내게도 조금 행복할 수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내년 시즌엔 더 많은 사람들의 겨울이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아이디 enter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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