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라희 관장에게 면죄부 줄 것으로 보여…“은 삼성가 치부 떠올리는 상징 될 것”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 명작 을 한밤중에 서울 삼성미술관 리움 수장고에서 경기 용인 에버랜드로 극비리 옮겼다는 증언은 삼성을 음해한 거짓말에 불과한가? 삼성이 사지 않았다고 강변한 은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가 정말 자기 돈으로 산 것일까? 홍 대표가 경매사 크리스티에 다른 미술품 값을 치르지 못해 을 담보로 잡혔다는데, 미술시장에 전혀 소문이 안 났을까? 용인 에버랜드 창고에 쉬쉬하며 보관한 삼성가 미술품 수천 점은 모두 양지에서 사들였을까?
삼성 특검의 몸통으로 커져버린 삼성가 여인들의 비자금 미술품 의혹 수사는 이들 의문에 ‘그렇다니까!’라는 결론을 윽박지르며 끝날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해 11월26일 김용철 변호사가 그룹 비자금으로 600여억원대에 달하는 서구 미술품 수십 점을 국제 경매 등에서 사들였다고 폭로한 지 넉 달 이상 흘렀지만, 수사는 ‘뱀꼬리’로 끝날 것이란 전망이 많다.
거액 미술품을 담보로 잡혔다고?
미술품 특검의 핵심은 김 변호사가 폭로한 목록의 그림들을 삼성 쪽이 소장했는지, 홍 관장이 불법 비자금을 받아 고가 미술품을 샀는지 등 소유 및 구매 경위를 따지는 것이었다. 삼성 쪽은 이에 △비자금 구입 의혹 미술품들을 산 바 없고 △에버랜드에서 발견된 미술품들은 대부분 삼성문화재단의 공적 컬렉션이며 △개인 소장품도 이건희 회장의 개인돈으로 샀다는 해명으로 일관했다. 특검은 이를 뒤엎을 반증을 찾지 못한 상태다. 4월2일 특검에 참고인으로 나간 홍라희 삼성미술관장의 조사 과정에서도 수사관들은 홍 관장 입을 통해 이런 입장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룹 간부들의 차명계좌에서 거액이 국제갤러리와 서미갤러리 등에 미술품 대금으로 입금됐고, 에버랜드 창고에 수천 점의 삼성가 미술품이 소장됐다는 사실 외에는 구체적인 단서를 확보하지 못한 셈이다. 홍라희 관장과 홍송원 대표에게 면죄부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실제로 2일 홍씨의 소환 조사 뒤 수사는 파장으로 치닫는 분위기다.
삼성미술관 쪽은 특검 때문에 늦춰졌던 올해 기획전 전시 일정을 최근 확정 발표했고, 3월21일에는 재미 사진가 김아타씨의 전시회를 산하 로댕갤러리에서 개막하는 등 긴장을 푼 기색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최선의 방어를 했다고 평가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과연 삼성 뜻대로 의혹이 잠잠해질 수 있을까. 미술품이 삼성 재단 것이고 개인 소장품도 이 회장 돈으로 샀다는 식으로 면죄부를 달아주기에는 의뭉스런 구석이 너무 많다.
특검은 폭로된 목록의 미술품 상당수가 연초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취재진의 눈을 피해 극비리에 용인에 옮겨졌다는 미술계 관계자의 구체적 증언이 (1월21일치 1면)를 통해 공개됐는데도, 미술관 쪽에 수사력을 집중하지 않았다. 보도는 문제의 작품들을 소장하지 않았다는 삼성 쪽 해명과 배치되는 것으로, 미술관 내부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특검은 용인 창고 압수수색 외에 더 이상 리움 쪽에 칼끝을 겨누지 않았다. 그룹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보도 뒤 리움 쪽은 압수수색에 대비해 직원들을 몇 개조로 서울 곳곳에 분산시키고 관련 문서들을 파일에서 지우는 등 대비를 강화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사자들의 말 맞추기를 의심할 수 있는 정황도 적지 않다. 삼성 쪽은 을 ‘사들였다’고 했다가 ‘돌려줬다’고 번복했고, 홍 대표는 과의 첫 인터뷰에서 ‘ 등의 작품을 사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김 변호사 폭로 뒤에는 ‘을 곧 공개한다’고 했다가 두 달여가 지나 에버랜드 압수수색이 끝난 뒤 공개했다. 홍 대표는 이 경매사 크리스티에 담보로 잡혀 있다는 질권 설정 자료를 이 그림이 자기 소유라는 증거로 제출했으나, 아직 자료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특히 화랑가 사람들은 이 담보로 잡혔다는 주장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시가가 200억~300억원대에 달하는 팝아트 대표작을 질권 설정할 경우 미술시장에 당장 소문이 퍼졌을 텐데,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다. 서미와 더불어 삼성 미술품 거래를 중개했다가 조사를 받은 이현숙 국제갤러리 대표는 최근 취재진과 만나 “경매사가 거액 미술품을 자주 거래하는 고객에게 간간이 담보대출을 해주긴 하지만, 이런 거액 담보는 정말 드물다”며 “이런 행태가 화랑은 물론 소속 국가의 미술시장 신용도에 불명예스런 영향을 미치므로 금기시하는 경우가 보통”이라고 했다. 돈을 못 내어 질권 설정까지 했다면, 서미가 을 구입한 사실이 국내외 미술시장에 수년 전부터 파다하게 알려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상처는 미술 동네가 떠안아”
비자금 미술품 수사로 미술시장은 위작 논란에 이어 다시금 전체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일부 미술인들은 특검과 삼성의 비자금 줄다리기에 미술시장이 엮이면서 경기가 냉각되고 부정적 인상이 더욱 확산되는 데 불만을 드러냈다. “이렇게 삼성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수사였다면, 차라리 미술품 얘기를 꺼내지나 말든지…. 결국 상처는 미술동네만 고스란히 안지 않습니까.” 서울 인사동 화랑가에서 만난 미술품 딜러 ㅈ씨는 처음부터 볼멘소리를 했다.
홍 관장의 특검 출두 때 진보신당 당원들은 홍 관장의 얼굴과 그림 속 여인의 이미지가 합성된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했다. 검은색 정장 차림의 홍 대표는 그들 옆으로 묵묵히 걸어들어갔고, 6시간여 뒤 은은한 미소를 띠며 다시 걸어나왔다. 그러나 삼성이 비자금 미술품 의혹을 무사 통과한다 해도, 삼성 컬렉션은 과 더불어 지우지 못할 ‘주홍 낙인’이 찍히게 됐다.
영국의 진보적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사물을 본다는 행위는 언어보다 선행한다”고 말한 바 있다. 특검과 삼성이 아무리 언어적 해명으로 주워담더라도 대중은 을 팝아트 걸작으로만 보지 않을 것이 뻔하다. 가진 자들의 돈놀이, 의혹이 얼룩진 재벌가 치부 행각을 드러내는 시각적 기념비로서, 많은 이들에게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리란 것을 특검의 역설적 성과로 자위해야 할까. 미술인 ㄱ씨는 “폭로 석 달이 지나서, 특검과 숨바꼭질을 거친 뒤 공개한 이 삼성과 연관이 없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며 “이 그림은 보면 볼수록 삼성가의 치부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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