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대 총사령관 이덕구의 조카딸 등 처음으로 4·3사건 증언에 나선 오사카의 ‘제주 사람’들
▣ 오사카=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yorogadi@hotmail.com
‘이번이 다섯 번째다. 이번에도 못 가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 10월이었지만 바람이 쌀쌀했다. 저녁 8시 부산항. 큰 화물선 몇 척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이번엔 무사히 저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매번 갈 때마다 비바람이 세 되돌아오기를 벌써 네 번째다. 20분쯤 기다리자 작은 고깃배 한 척에서 인기척이 났다. 삐그덕 선실 문이 열렸다. 선장은 선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나 보다. 좀 있으니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마 저 속에 경찰이 있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을 찬찬히 뜯어보며 이씨도 보따리를 챙겨들었다. ‘이번엔 꼭 바다를 건너가자. 그래서 살아남자.’
이 나라엔 더 이상 정 둘 곳이 없었다. 8년 전, 경찰서에 잡혀간 일곱 살 사촌동생, 소학교에 다니던 사촌오빠가 모두 총살당했다. 일곱 살배기를 죽이는 데도 경찰은 가차없었다. 관덕정에 걸린 ‘산사나이’ 덕구 삼촌의 잘린 목도 계속 떠올라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작은 어머니와 외숙모는 두 살배기 아이를 업은 채 그대로 구덩이에 파묻혔다. 사람들은 미쳐 있었다. 일가족 22명이 모두 구덩이에 파묻히거나 총살당했다. 그 뒤 이씨는 한 번도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지 못했다.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으로 떠돌았다.
일가족 22명 잃고난 뒤 목숨 건 밀항
떠나도 걱정이었다. 혈혈단신. ‘이제 일본 땅에 가면 누구와 어떻게 살아야 하나.’ 50만원을 고깃배 선장 손에 쥐어주고 선실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이 다섯 번째니 그 동안 있는 땅 없는 땅 다 팔아 만든 250만원을 고스란히 밀항에 쓴 셈이었다. ‘차라리 북으로 가고 싶다. 사상도 뭣도 모르지만 그래도 북에서는 빨갱이, 아니 빨갱이 조카딸이라고 총질하진 않겠지.’ 15시간쯤 지나서 일본 해역에 들어섰다. 그러나 날이 밝을 때 항구에 들어가면 안 되기에 인근을 뱅뱅 돌았다. 이씨를 포함해 밀항민 20여 명을 태운 고깃배는 날이 어둑해질 무렵인 오후 6시가 다 돼서야 항구를 향했다. 한밤중 고깃배는 규슈섬 가라쓰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항구엔 밀항을 단속하는 일본 경찰들이 서 있었다. “어디서 왔나?” “등록증은 있나?” 경찰이 물었다. 이씨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경찰 손에 끌려갔다.
1956년 10월 한국 땅을 떠나오던 날 밤에 대해 일본어로 이야기하며 이복수(72)씨는 울었다. 지난 3월23일 오후 3시 일본 오사카시 이쿠노구 성공회 교회 1층 강당에 마련된 증언회 자리. 수첩을 들고 열심히 받아쓰는 학생, 눈물을 훔치며 사진을 찍는 신문기자, ‘나도 그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연방 끄덕이는 70대 할아버지 등 모여든 60여 명의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이씨는 1948~49년 제주 4·3 항쟁을 주도하던 무장대 총사령관 이덕구의 조카딸이다. 가족이 모두 총살당하고, 제주를 떠나고, 일본으로 밀항하고, 오무라 수용소에 수감되고, 마침 제주 4·3 항쟁 관련 기사를 쓰던 일본 기자의 도움으로 수용소에서 풀려나고, 사는 게 괴로워 쇠망치로 손을 내리치고…. 이야기를 시작한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북받치는 표정으로 눈물을 쏟은 이씨는 두 시간쯤 이어진 증언 내내 눈물을 흘렸다. 손에 들린 손수건이 흠뻑 젖었다.
이씨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을 연 것은 일본 생활 52년 만에 처음이다. 오광현 재일본 유족회 사무국장이 10년간 설득한 결과다. 그동안은 누가 잡으러 올까 겁나 ‘제주 출신’이라는 말도, 삼촌이 이덕구라는 말도 가능하면 입에 담지 않았다. 아들딸 네 명도 모두 일본학교에 보냈다. 아이들이 정치에, 사상에 조금이라도 관련되는 게 싫었다. 그건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일이었다.
잠자리에서도 4·3 얘긴 안하는 부부
지난 60년간 침묵 속에 산 건 이씨만이 아니다. 오사카에 살고 있는 제주 출신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은 대개 그랬다. 오사카시 이쿠노구에는 1948년 이후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했던 ‘학살의 섬’ 제주에서 쫓기듯 떠밀려온 자이니치 3만여 명이 살고 있다(일본 오사카시청, 2007.12). 1933년 제주~오사카 정기 항로가 개항돼 유독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이들이 오사카에 많이 정착했다. 그 뒤 4·3 항쟁을 전후해 제주 사람들은 ‘피비린내’를 피해 정규 항로 대신 밀항선에 몸을 싣고 오사카로 왔다.
1948년 이덕구 총사령관의 권유로 무장대 생활을 했던 고란희(78)씨는 머리카락 안에 비밀 문서를 숨겨 운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때 나이 열여덟이었다. 경찰의 단속이 심해졌고, 고씨의 아버지는 딸이 위험해질까봐 고씨를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에 태웠다. 제주 한 바닷가에서 1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고씨가 탄 배는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로 향했다. 밀항선들은 출발지도, 도착지도 저마다 달랐다. 낮에는 이름 없는 돌섬 뒤에 숨어 있다가 밤에만 움직였다. 사흘이 걸려 니시노미야에 도착했다. 오사카와 고베의 중간에 있는 도시다. 고씨는 같은 마을 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고 있는 오사카시 이쿠노구로 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비보였다. “네가 밀항선을 탄 뒤 아버지가 바로 총살당했다더라.” 고씨는 그 뒤 입을 닫았다. 성이 고씨라 사람들은 그가 제주에서 왔겠거니 했지만 30여 년을 고향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았다.
고씨의 남편도 제주가 고향이다. 4·3 무렵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왔다. 고씨 부부는 한밤중 잠자리에서도 4·3과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10년 전인가 한 연구자가 고씨를 찾아와 4·3과 관련한 인터뷰를 요청했다. 남편이 다짜고짜 뛰어나와 그 연구자를 쫓아냈다. 그리고 고씨에게 소리쳤다. “너도 죽고 나도 죽어.”
23일 증언회의 주인공인 이복수씨도 남편 몰래 증언회에 참석했다. “우리 주인(남편)은 나랑 사상이 달라서 이쪽은 전혀 이해하지 못해.” 증언회 이후 인터뷰 시간을 잡는 것도 남편 때문에 힘이 들었다. 증언회 다음날 이씨가 운영하는 카페에 갔다. 이씨는 30년 전부터 이쿠노구에서 ‘에뎅’이라는 커피전문점을 운영한다. 에뎅에는 제주에서 온 자이니치들이 주로 들러 싼값에 커피와 토스트를 먹는다. 남편이 없을 것이라는 아침 6시 반 에뎅을 찾았지만, 이씨는 취재진을 보자마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쉿, 조용히 해야 해요.’ 이씨가 눈빛으로 말했다. 한쪽 테이블에 이씨의 남편이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증언회에 온 것도 “큰딸네 집에 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잠깐 시간을 낸 것이었다. 결국 카페 한쪽에서 신문을 보던 남편을 바라보며 취재진도 커피와 토스트만 먹어야 했다. 남편은 계속해서 문을 쳐다봤다. 다음엔 낯선 얼굴인 취재진을 곁눈질로 살폈다. 무언가 두려워하는 눈빛이기도 했다.
“분단·국가보안법… 아직 말 못해”
오사카시 이쿠노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제주 출신 자이니치 1세 김정생(78·가명)씨는 “4·3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아직도 분단 상태다. 지금도 국가보안법이 있다. 여기 사람들, 아직 4·3에 대해 얘기하는 거 다들 안 반긴다”며 취재진을 쫓았다. 1947년 열일곱의 나이에 경찰에 붙들려 제주경찰서에서 유치장 생활을 한 달간 한 그는 과거 경력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했다. “언론 인터뷰를 몇 차례 했지만 그런 얘기는 절대 안 했어. 앞으로도 절대 안 할 거야.” 김씨는 취재진의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일본에서 4·3 관련 기념행사를 주도하고 4·3이 자이니치 공동체에 끼친 영향에 대해 연구해온 문경수 리쓰메이칸대 교수(국제관계학)는 “4·3을 직접 경험한 이들은 ‘4·3 콤플렉스’라고 부를 만큼 커다란 좌절감과 심리적인 굴절을 안고 있다”고 말한다.
4·3 항쟁을 피해 일본으로 온 이들은 모두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희망이 없었거든. 돈 버는 거 말고는 위안이 없었거든.” 이쿠노구에서 연 식당이 잘돼 가게를 세 개까지 늘린 홍여표(78)씨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이 되자 곧장 제주로 건너갔다. 제주로 가기 전까지 일본에서의 생활은 가난했다. 아버지는 오사카성이 있는 모리노미야 군수공장에서 돌을 날랐다. 당시 중학생 나이였던 홍씨도 같이 돌을 날랐다. 학교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버지는 하루하루 번 돈을 노름과 술값으로 다 썼다. 어머니는 공사장 근처에서 쌀겨로 막걸리를 만들어 팔았다. 세 칸짜리 다다미방에서 어머니, 아버지, 동생 둘에 홍씨까지 다섯 식구가 서로의 체온에 기대 겨울을 났다. 그러다 해방을 맞은 홍씨 가족은 아버지만 빼고 모두 제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삶은 오사카에서보다 나을 게 없었다. 남의 집 논밭을 부쳐먹었다. 반작농이라고 했다. 소출의 반은 주인이, 반은 소작농이 가졌다. 몇해 뒤 섬이 시끌시끌해질 때 홍씨는 친구들에 휩쓸려 데모에 참가했다. 젊은 남자가 ‘산사람’들과 조금이라도 교류를 할라치면 군인과 경찰이 총부리를 겨누던 시절이었다. 4·3 때 “너라도 살라”며 어머니가 없는 돈을 긁어모아 홍씨를 밀항선에 태웠다. 그렇게 돌아온 일본에서 홍씨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술과 노름에 집착했는지 알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도 홍씨는 술에 빠지지 않으려 애썼고, 술 먹을 시간에 닥치는 대로 일했다. 지금 오사카시 이쿠노구 중간상인회 고문을 맡고 있는 그는 “재일동포들이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다. 주로 식당을 하거나 부동산을 하고 사채를 하기도 한다. 더러는 ‘악독하다’고 욕을 먹으면서도 이 악물고 돈 모으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50주년땐 오사카 영사관이 행사 방해
이덕구의 외조카 강실씨도 “믿을 건 돈뿐이어서, 벌기만 하고 쓰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강실씨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자산가다. 사람들은 그가 부동산으로 성공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돈을 모았냐’는 질문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제주를 떠나 부산으로 갔을 때 ‘제주 똥돼지’라고 놀림받았다. 다시 일본으로 와서는 ‘조센징’이라고 차별받았다. 난 잃을 것도, 아쉬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2000년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7년이 지난 지금도 자이니치 사회에서는 낯선 법이다. 홍보도 되지 않고 있다. 재외공관에서도 4·3 희생자 유족 신청을 받지만, 일본에서 신청자는 78명에 그친다. 국내에서는 1만3천 명을 넘는다. “여전히 자신이 제주 출신임을 드러내기 꺼리는 사람이 많아요.” 오광현 오사카 4·3유족회 사무국장이 말했다. 국내에선 많은 연구와 함께 4·3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고 국민적인 인식이 변하고 있지만, 오사카에서는 4·3에 대한 역사 인식이 아직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총련이나 민단도 4·3과 관련해 뚜렷한 의견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주 출신 사람들은 ‘제주 사람이 아닌 척’ 살아왔다.
오광현 사무국장은 한국 정부의 미적지근한 태도도 문제라고 말한다. 재외공관인 오사카 영사관은 4·3 50주년 행사를 준비하던 1997년 당시, ‘당장 행사를 그만두라’고 훼방을 놓았다. 그 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영사관 쪽도 행사에 참여했지만, 그 밖에 별달리 4·3 유족을 위해 영사관이 나서는 일은 없었다. 제주 4·3위원회도 4·3 60주년 행사에 자이니치 200여 명을 초대한다고 했다가 결국 13명만 부르는 데 그쳤다. 고향 땅에 감으로써 4·3의 상처를 눅이려던 많은 자이니치들이 실망하고 있다. 오 사무국장은 “정부가 초청하지 않는 이유는 유족이 아니기 때문으로 알고 있다. 한국 정부는 직계가족만 유족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삼촌이 돌아가신 분, 고모가 돌아가신 분도 모두 유족이다. 그리고 유족이든 아니든 4·3을 겪었고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온 많은 디아스포라의 상처를 위로할 의무가 한국 정부에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 공식사과 넘어 진상규명을
이복수씨가 남편의 눈을 피해서라도 굳이 지난 51년간 꾹 닫았던 입을 열기로 한 것은 지난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본 뒤였다. “텔레비전을 보는데 대통령이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그동안 제주로는 두 번 다시 발걸음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마음에 맺혔던 게, 여기 꾹 눌려 있던 게 조금, 아주 조금 풀리는 느낌이라. 그리고 2세, 3세들이 (진상을 규명하는) 이런 걸 한다고 두 발로 뛰는데 내가 직접 하지는 못할망정 이런 거라도 해줘야지.”
가와세 슌지 데즈카야마대 강사는 매년 도쿄에서 제주 4·3을 주제로 공연하는 마당극을 보러 간다. 그는 갈 때마다 여러 자이니치를 본다. “언젠가 마당극이 한창 진행 중인데 한 할머니가 나와 절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돈을 내놓고 가더군요. 마치 제례를 지내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 할머니처럼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꼭꼭 한을 묻은 채 살아가는 자이니치 1세들이 수없이 많을 겁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자이니치는 그 수도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4·3 사건이 일본 자이니치 공동체에 미친 영향도 연구된 바 없다. 그 첫째 이유는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증언회는 그들이 말문을 텄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앞으로 더 많은 자이니치들이 입을 열고 한을 풀도록 하려면, 대통령의 한마디 사과를 넘어서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의 의지를 정부가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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