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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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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떠났으나 나라는 떠나지 못하네

등록 2008-03-21 00:00 수정 2020-05-03 04:25

버마군의 공격에도 국경에 머무르는 소수민족, 국제정치 역학 속 국제난민기구도 도움 손길 미치지 않아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상임활동가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이상희 변호사와 함께 지난 2월3일부터 10일까지 버마 내부의 카렌족 난민촌 레퍼허를 다녀왔다. 서울에서 방콕까지 비행기로 5시간, 다시 방콕에서 치앙마이와 매솟을 거쳐 래퍼허 마을까지 차량으로 15시간이 걸리는 머나먼 여정이었다. 2005년 11월 첫 방문 이래로 이번이 두 사람의 네 번째 버마 방문이었다.
단지 그들만 가지는 않았다. 그들이 가져간 보따리에는 쌀, 통조림 같은 음식뿐 아니라 충남 서천 애니메이션학교 학생들이 만든 평화 동화책과 인천 기찻길 옆 공부방 교사들이 만든 인형도 들어 있었다. 난민 아이들의 시청각 교재로 쓸 텔레비전, 디브이디(DVD) 플레이어 한 대씩도 준비했다. 성미산 마을공동체, 성공회대 교수들, 민변 변호사들 등이 십시일반으로 마련해 전달한 150만원의 성금은 레퍼허 마을의 학교 기숙사와 고등학교를 새로 짓는 일에 쓰인다. 편집자

▣ 매솟(타이)·레퍼허(버마)=글·사진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상임활동가

짧은 경적이 몇 번 울리더니 차가 섰다. 운전을 하던 먼데이가 급하게 차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서둘러 짐칸에서 내려 차 안으로 올라탄다. 또 검문소다.

“어디로 가나?”

“노보 마을.”(타이-버마 국경지대의 타이 마을)

“저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인데 타이 친구를 만나러 간다.”

군인 몇 명이 짐칸의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예전엔 없던 일이다. 순간 먼데이의 얼굴이 굳는다. 하지만 곧 미소를 되찾는다. 그러면 그렇지. 백미러 속 군인들은 ‘하는 척’ 폼만 잡았다. “통과.” 다시금 길이 열린다.

영국 식민지 ‘분할통치’의 결과

분명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카렌민족동맹(Karen National Union) 소속 군인인 먼데이는 연락책과 물품 수송원으로 여러 해 째 국경을 누비며 타이 군인들과 안면을 터왔다. 자유로운 왕래를 위해 ‘상납’도 하고 있다. 우리 역시 불법 월경을 도모하면서, 상납 비용을 ‘덤’으로 지급했다. 하지만 타이 북부 매솟에서부터 6곳의 검문소를 통과해 타이-버마 국경에 이르는 두 시간 반 동안 긴장은 호흡처럼 따라붙는다. 지난해엔 국경 경비가 강화되면서 검문을 피해 어둠이 내린 산길을 내달리기도 했다.

마지막 검문소를 통과한 차는 들판을 지나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분 내달리더니 이내 멈춰선다. 모에이(Moei)강이다. 폭이 한 100m나 되려나? 이 작은 강은 땅을 타이와 버마로 나누고 사람들의 운명에도 희비를 갈라놓는다.

장정 예닐곱 명이 타면 만원인 보트로 강을 건넌다. 배에서 내려 작은 언덕을 다시 오르면 뜨거운 태양 아래 대나무와 나뭇잎으로 만든 집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고향에선 내몰렸지만 나라를 등지지 못한 카렌 난민들이 살아가는 땅, 레퍼허 마을이다.

버마의 민주화가 주요한 국제 인권 주제로 자리를 잡은 반면 버마 내 소수민족들이 겪어온 인권침해의 역사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1880년대 버마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은 버마가 130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특성을 악용해 버마족과 다른 소수민족 사이의 대립을 조장하며 버마를 통치했다. 전형적인 ‘분할통치’였다.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민족 간의 대립과 갈등은 1948년 독립한 버마를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독립 이후 집권한 버마족이 중앙집권화 정책을 강행하자, 소수민족들은 독립을 외치며 봉기했다. 1949년 카렌족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전은 본격화했고, 1962년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선 뒤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조리 ‘반군’ 추종자로 분류됐고, 반군세력의 힘이 미칠 만한 곳이라고 판단된 마을은 철저히 파괴됐다. 살인과 강간, 약탈과 방화, 강제노동 같은 인권유린이 판을 쳤다. 소수민족들은 가족을 잃고 고향을 빼앗긴 채 피난길에 올랐다. 레퍼허에 자리를 잡은 난민들 역시 몇 차례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은 이들이다.

“학살과 강제노동을 피해 도망온 카렌 사람들은 애초 멜라포타 지역에 모여 살았다. 하지만 1999년 버마군이 그곳까지 쳐들어왔다. 마을은 모두 불탔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피난을 갔다. 일부 사람들이 되돌아와 타이 국경에 인접한 곳에 마을을 세웠는데, 그게 바로 레퍼허다.” 레퍼허 촌장이 마을의 역사를 설명했다.

마을을 세운 이후에도 공격은 계속됐다. 다시 국경을 넘거나 더 깊은 정글로 몸을 숨기길 서너 차례. 버마군의 습격이 있을 때마다 마을은 타이 국경에 더 가까운 곳에 다시 세워졌다. 2001년 마지막 공격이 있은 뒤 마을은 모에이강 바로 앞에 자리를 잡았다. 버마군이 공격해온다면 몇 분 안에 헤엄을 쳐서 너끈히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위치다.

병보다 죽음보다 무서운 버마군

맨몸으로 도망쳐온 사람들이 레퍼허에 모여 맨 처음 한 일은 대나무밭을 태워 농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글지대의 땅은 좁고 비옥하지도 않아 쌀 수확량은 매년 턱없이 부족하다. 성인 남성들은 강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숲에서 사냥을 하고, 여성들은 직물을 짜거나 우기에 죽순을 모아 타이 국경지대에 있는 재래시장에 내다판다. 이렇게 얻은 수입은 대부분 식량을 사는 데 쓴다.

식사는 하루에 두 번, 반찬도 생선소스(생선을 물에 으깬 양념장)나 맑은 국물이 전부일 때가 많다. 반찬으로 나뭇잎을 따먹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몇 년 전에는 나무 열매를 따먹으러 산에 올랐던 아이 하나가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기도 했다.

사람 사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몇 년 동안 마을은 조금씩 변모했다. 큰길가에 위치한 몇 집에 수도가 설치됐다. 하지만 아직 많은 집들이 강물이나 우물물로 생활한다. 전기는 카렌민족동맹이 지원해준 두 개의 발전기를 통해 얻는다. 하지만 발전기가 낡은데다 기름값을 감당할 수 없어 매일 저녁 한 시간 반 동안만 사용한다. 그나마 전기의 수혜를 받는 곳은 학교 기숙사와 진료소 등 몇 곳 되지 않는다.

이 지역엔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기온차가 심해 감기와 폐렴 환자가 많다. 하지만 의약품과 의료진이 부족하다 보니 작은 질병이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레퍼허 마을 진료소 코디네이터인 수퍼는 “기본적인 의약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소독약과 일회용 위생장갑은 물론 어린아이와 임신 여성을 위한 예방접종 약품이나 말라리아 감염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약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퍼는 또 “인근 마을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제공할 담요와 음식도 모자란다”고 덧붙였다.

진료소 한쪽엔 낯익은 소녀가 누워 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둔 뒤 선생님 집에서 기숙하던 아이다. 2주 전 사고로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는 소녀는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누워만 있다. 다친 다리는 한눈에 보기에도 기형적으로 비뚤어져 있다. 말라리아에 걸린 아들을 업고 진료소를 찾은 끄저(36)는 “버마군을 피해 반나절을 걸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몸이 아파도 버마군을 만날까 두려워 정글에서 나오지 않는다”며 “산에 사는 사람들은 민간요법과 약초에 의지해 병을 치료하다 죽어간다”고 전했다.

이곳 진료소는 매솟 매타오 병원의 도움으로 운영된다. 버마 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1988년 세워진 매타오 병원은 버마 내 난민들에게 의약품을 보내는 사업과 의료진 양성을 위한 6개월 과정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레퍼허 마을 진료소도 이 병원을 통해 석 달에 한 번씩 의약품을 제공받는다. 진료소 직원 7명 가운데 3명이 매타오 병원이 운영하는 의료진 양성교육을 거쳤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구호 손길은 레퍼허 마을에 미치지 않는다. 국제구호위원회(IRC·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에서 활동하는 변호사 마크는 “타이로 넘어간 난민들보다 버마에 머무르고 있는 난민들의 상황이 더 좋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직접 지원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국제단체는 각국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버마 내 난민을 지원한다면 버마 정부는 물론 국경을 넘는 문제 등으로 타이 정부와의 관계도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풍족한’ 타이 캠프로 가지 않는 이유

다른 국제 원조기구들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제 원조기구들은 버마 내부 난민에 대한 공식적 지원은 물론 혹시나 있을지 모를 활동가들의 비공식적인 지원도 엄하게 단속한다. 국제사회가 외면한 이들을 돕는 건 타이 난민캠프에 수용돼 있는 같은 처지의 버마 난민들이다. 멜라 난민캠프 카렌청년기구(Karen Youth Organization)의 활동가인 지지윈은 “간헐적이지만 구호기구에서 배급받은 담요나 의복, 생필품 등을 모아 버마 내 난민들에게 보내고 있다”며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같은 상처를 공유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버마 내부 난민들을 위협하는 건 무엇보다 언제 시작될지 모를 버마 정부군의 공격이다. 지난 2001년 12월 교전을 끝으로 레퍼허 마을은 한동안 평화로웠다. 물론 산발적인 교전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4월 버마군 등이 공격을 재개하면서 이 지역은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엿새에 걸친 버마군의 공격으로 발생한 난민만 줄잡아 500여 명. 최소한 6개 이상의 지역이 버마군에 점령됐다. 레퍼허 인근에 위치한 타코클라 마을은 공격을 받아 황폐화됐다. 인근 매서리 마을은 다행히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많은 이들이 마을을 떠났다. 매서리 초등학교 교사 에크너이는 “지난해 4~5월 불안이 정점에 달하면서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해졌다”며 “학생들에게 안전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아 가라고 권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90여 명에 이르던 학생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레퍼허 마을 역시 ‘운 좋게’ 공격을 면할 수 있었다. 레퍼허 학교 교장 레인보우는 “지난해는 이곳에 주둔 중인 카렌군과 버마군 사령부 사이의 우호적 관계 때문에 교전을 피할 수 있었다”며 “하지만 석 달 전 버마군 사령부가 교체되면서 공격 위험이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교전은 살윈댐 건설을 둘러싼 전초전에 불과하다. 올해는 살윈댐 건설을 위해 버마군이 이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전선 상황 탓에, 지난해 8월 전세계의 눈길을 끈 버마 민주화 시위도 이곳 국경지대에선 큰 화제가 되지 못한 듯했다.

위기 상황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국경을 넘는 걸 주저한다. 타이에는 9개의 버마 난민캠프가 있다. 물론 타이 정부가 버마 난민을 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민캠프의 난민들은 적어도 배고픔을 호소하거나 공격의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원조로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레퍼허 사람들은 요지부동이다. “평생을 ‘우리’에 갇혀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레인보우는 이렇게 말했다. “버마군이 이곳까지 진격해온다면 그땐 다른 선택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놀며 카렌의 땅에서 성장하기를 바란다. 또 이곳에 남아 카렌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길 바란다.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다.” 그는 “평화롭게 생존하기 위해 국제사회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우리를 잊지 말아줘”

레퍼허를 떠나오는데, 아이들이 지난해 이곳을 방문했던 한국의 성미산학교 아이들에게 전해달라고 편지를 내민다. 세무(16)의 편지엔 이렇게 적혀 있다.

“너희는 자유의 나라에서 살아가니까 우리를 잊지 않았는지 걱정이야. 보고 싶지만 우리가 너희를 만나러 갈 순 없어. 그러니 너희가 다시 방문해주면 좋겠어. 우리를 잊지 말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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