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OPC 피해 산정 전 법적 보상한다면서 피해액 결정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딜레마 법
▣ 태안=글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가 일어난 지 100일을 하루 앞둔 3월14일. 국토해양부는 ‘허베이 스피리트호 유류오염사고 피해주민의 지원 및 해양환경 복원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이란 긴 이름의 법안을 공포했다. 이번 사고로 피해를 입은 태안 주민들이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IOPC·이하 기금)의 피해 보상을 받기 전에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먼저 받을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한 법안이다. 기금은 ‘해양 분야의 유엔’이라 불리는 국제해사기구(IMO) 산하기관으로 각국 정유사와 관련 회사의 분담금으로 조성된다. 기름 유출 사고로 피해를 입은 국가와 정부가 방제 비용이나 재산 손실액을 청구하면 실사를 거쳐 적정한 보상액을 지급한다. 그러나 기금의 실사 기간이 길 것으로 예상되기에, 정부가 태안 주민들에게 피해를 먼저 보상한다는 것이 법안의 취지다. 정부는 그만큼의 돈을 기금으로부터 받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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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급에 대한 강제 방법 없어
특별법에는 피해 지역에 대한 지원 내역과 피해 보상금 선지급 기준, 생태계 복원 방안 등이 들어 있다. 정부는 세부적인 시행령을 5월 말까지 마련해 이르면 6월 중순부터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이에 대해 피해 주민들은 “허점투성이 법안”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우선, 보상금 선지급을 위해 만들었다는 법안에 ‘선지급 의무규정’이 임의조항이다. 특별법의 핵심은 제8조 1항이다. 이 조항을 보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이번 사고와 관련해 손해배상 또는 보상을 청구한 자가 배상금 또는 보상금을 지급받기 전에 일정 범위의 금액을 지급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 때문에 국가나 지자체가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거나 늦추더라도 법적으로 강제할 방법이 없다. 세부적인 시행령에서 보상금 지급 시기와 방법 등이 확정되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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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정부가 먼저 보상할 수 있는 피해액의 범위가 ‘기금이 산정한 손해액’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기금의 실사기간이 길어길 것에 대비해 먼저 보상을 해주겠다면서, 기금에서 피해액을 결정할 때까지 국가나 지자체가 피해액 보상을 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특별법에 따른 보상 절차를 보면, 먼저 피해 주민이 국제기금에 손해배상 또는 보상을 청구해야 한다. 국가와 지자체는 이 청구액을 모아서 피해액을 자체 산정하지만, 국제기금이 피해액을 확정할 때 비로소 보상이 이뤄지는 식이다. 배상·보상금 선지급에 대한 모든 절차와 진행이 기금의 움직임에 연동되는 구조다. 정부로서도 주민들에게 먼저 피해를 보상했다가 나중에 기금에서 받는 보상액이 그보다 적으면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상황이 된다. 주민들의 절박한 생계를 감안해 정부가 피해액을 적극적으로 산정해 먼저 지급하고 이를 기금에서 제대로 되돌려받겠다는 의지가 없이는 제대로 된 보상이 어려워지는 셈이다.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간사는 “국제기금 등에서 피해 규모를 조사해 피해액을 결정하는 기간을 주민이나 정부는 알 수 없다”며 “이런 규정은 선지급 규정에 반하는 내용이라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특별법을 보면, 정부는 기금의 피해액 산정이 6개월 이상 늦어질 경우 피해 주민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피해 주민들을 이자로 두 번 울리는 일이 없으려면, 시행령에 ‘무이자’ 또는 ‘저리’로 빌려준다는 규정이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더 가지를 친다. 피해 주민들이 받을 수 있는 피해 보상금 규모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다. 보상금이 지급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빈곤층 주민은 실제로 입은 피해액을 조목조목 따지기보다, 기금이나 정부가 정한 피해액을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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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금에 손해 배상 또는 보상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피해를 증명할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 점도 문제다. 횟집이나 식당 등을 운영하는 주민들은 소득세 등을 통해 피해액을 증명할 수 있지만, 바다에서 맨손으로 굴과 바지락을 캐며 살아온 이들은 잃어버린 수입을 증명할 길이 없다. 3월12일 태안군 소원면 모항1리에서 만난 주민 김정민(56)씨는 “평생을 바다에서 잡은 굴이나 낙지를 내다팔아 먹고살았다”며 “하루하루 번 돈을 무슨 수로 밝힐 수 있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법에는 이런 ‘날품팔이’ 주민들의 눈물을 닦아줄 규정이 없다.
수입 증명할 길 없는 사람들은?
손해액이 너무 클 경우 전액을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다. 기름 유출 사고로 발생한 손해가 기금의 보상 한도액을 초과하는 부분은 사고에 책임이 있는 선박 소유자 등로부터 추가로 받아낼 수 있지만, 정부가 이를 주민들에게 먼저 지급한 뒤 삼성중공업과 허베이 스피리트호 선주 같은 제3의 배상 책임자들한테서 받아낸다는 규정은 없다.
또 선박 소유자에게 책임이 인정되지 않거나 그가 실제 배상할 자금이 없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특별법은 이런 경우 국가나 지자체가 피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보상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때도 또 다른 국제협약에 따라 산정된 총액 한도를 넘을 수 없도록 단서를 달아놨다.
태안유류피해투쟁위원회(이하 투쟁위)는 지난 3월13일 삼성중공업 및 삼성물산 대표와 책임자 8명을 대검찰청에 고소·고발했다. 기름 유출 사고에 대한 삼성중공업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이들은 고소·고발장에서 “악천후를 무릅쓰고 무모하게 운항을 강행해서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기업의 탐욕이 돌이킬 수 없는 환경 재앙을 불러왔다”며 “이 사고로 피해 지역 5만여 주민들의 생계를 벼랑으로 내몰았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그동안의 검찰 수사에 대해서도 ‘짜맞추기 수사’ ‘삼성 봐주기 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투쟁위는 “검찰에서 삼성 쪽 고위 책임자 8명이 장거리 예인항해를 무모하게 강행하도록 지시했는지, 사고 발생 이후 항해일지를 거짓으로 작성했는지 등 핵심 의문점을 다시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금도 태안에는 삼성 직원들이 머물고 있다. 이들이 태안에 오는 이유는 ‘자원봉사’다. 삼성의 계열사들이 돌아가며 200여 명씩 직원들을 보낸다. 이들은 기름 밴 돌도 닦고 모래도 닦는다. 주민들에게 “태안 지역과 자매결연을 맺겠다” “여름 휴가는 계열사 전체가 태안으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숙박업소를 위해 자원봉사자도 1박2일로 하루 묵고 가고, 밥도 여러 식당을 돌아가며 먹고 있다. 민심을 얻으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많은 태안 주민들은 삼성 직원들이 주민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민심의 향방을 듣기 위해 태안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계열사들이 돌아가면서 자원봉사 오는 삼성
삼성은 지난 3월2일에는 피해 지역 발전을 위해 1천억원의 기금을 출연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태안 주민들은 “턱도 없는 소리”라고 말한다. 주민 전완수(40)씨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이것저것 다 해주겠다고 하고서는 정작 ‘우리는 책임이 없다’ ‘법적으로 먼저 책임 규명이 돼야 한다’고 하니 배신감이 든다”고 말했다.
특별법으로 제대로 된 보상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시민사회단체와 태안 주민들은 철저한 수사와 조사로 책임 소재를 밝혀달라고 한다. 이제는 정부와 삼성중공업이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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