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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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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은 몰랐나, 모른 척했나

등록 2008-03-21 00:00 수정 2020-05-03 04:25

특검에서 확인된 삼성생명 의혹…임원들 차명 주식이 총수일가 불법 세습에 동원될 때 세금은?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fss.or.kr)에서 삼성생명 지분 분포도를 찾아보면, 최대주주인 이건희 삼성 회장의 특수관계인으로 4명의 전·현직 임원이 주요 주주로 올라 있다.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이용순 삼성정밀화학 대표 그리고 삼성그룹의 2인자로 꼽히는 이학수 그룹 전략기획실장(부회장)이다.

이 4명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값어치는 엄청나다. 적게는 9만 주, 많게는 75만 주에 이르러 주당 추정 가격 70만원을 곱하면 각각 650억~5200억원, 총 8500억원에 이른다. 삼성그룹 임원의 보수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전문 경영인의 손에 쥐어진 것이라고 믿기엔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재산이다.

전·현직 임원들이 보유했거나 보유 중인 삼성생명 주식을 두고는 세금을 피해 총수 일가의 지분을 숨겨놓은 것이라는 차명 의혹이 10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삼성그룹의 비자금 의혹을 털어놓은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도 총수 일가의 주식이 임원들의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해당 임원들은 물론, 이런 의혹을 줄곧 부인해왔다. 현명관 전 회장은 지난해 11월 과 한 전화 통화에서 “차명 주식이 아니고, 공모주로 해서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밖의 전·현직 임원들 중에서도 차명 의혹을 인정한 예는 없으며, 국세청이나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감독 당국에서 차명 사실을 확인한 적 또한 없다.

삼성에버랜드보다 훨씬 중요한 사안

당사자들이 한사코 부인하는 가운데 세간에선 공공연한 비밀로 돼 있는 삼성생명 주식 차명 거래 의혹이 삼성 특검에선 사실상 확인됐다. 이건희 회장 일가의 비자금 조성 의혹 등을 수사하고 있는 조준웅 특별검사팀이 3월11일 삼성생명의 주요 주주인 전·현직 임원 12명의 주식 보유 및 배당금 지급 현황 자료를 압수수색했다. 압수수색 당일 윤정석 특검보는 “이 전·현직 임원들이 소유한 주식이 차명이라는 충분한 ‘의심’이 있어 압수수색을 벌였다”고 말했다. 차명 ‘의심’이란 꼬리가 달려 있지만, 법원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한 것에 비춰 차명 사실을 뒷받침하는 명확한 증거를 확보해 제시했다는 게 정설이다. 세간에서 의혹으로만 떠돌던 차명 의혹이 공적 공간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셈이다. 금감원 공시 자료에서 확인되는 4명을 포함해 이 12명이 보유한 주식 물량은 16.2%에 이른다. 이건희 회장의 보유 지분 4.5%보다 훨씬 많다.

전·현직 임원 보유의 삼성생명 주식이 차명이냐 아니냐는 삼성 총수 일가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 중 핵심인 경영권 불법 세습 논란에서 중대한 의미를 띠는 사안이다. 차명 확인은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로 이어지는 경영권 세습이 ‘그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이는 곧 불법 세습 논란의 책임과 처벌 수위가 그룹의 최고 권력에까지 이를 수 있으며 그룹 권력 구도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삼성생명은 이재용 전무와 삼성에버랜드를 정점으로 하는 삼성그룹 순환출자 구조의 핵심 고리이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없이는 총수 일가가 삼성그룹을 장악하는 게 불가능하다.

재벌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김진방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삼성에버랜드 사건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사실 (삼성그룹의 경영권 세습 논란에선) 삼성생명 주식 차명 의혹이 훨씬 더 중대한 사안”이라고 본다. 삼성그룹의 권력 구도와 얽혀 있는 문제일 뿐 아니라 불법행위와 관련된 자금 규모가 삼성에버랜드건보다 훨씬 크다는 점에서다. 이미 실명화한 주식까지 포함할 때 전·현직 임원들의 이름으로 감춰져 있던 삼성생명 주식 물량은 수조원 규모다. 이는 곧 삼성 총수 일가가 뒤늦게라도 조 단위의 세금을 물어내야 하는 사태를 맞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김진방 교수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1994년 1월 삼성 전·현직 임원 명의의 삼성생명 주식은 무려 1104만 주(59.0%)에 이르고 있었다. 현재 확인된 전·현직 임원 명의의 물량이 16.2%인 점을 감안하면 10여 년 사이에 삼성그룹의 핵인 삼성생명 지분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던 셈이다. 총수 일가의 가신그룹으로 꼽히는 이들에게 엄청난 지분이 쥐어져 있었고, 그 물량이 지금은 대부분 증발하고 없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상식의 범위를 뛰어넘은 거래 가격

삼성생명 지분 구조에 대격변이 일어난 것은 1998년 12월3일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이날 삼성 전·현직 임원 35명으로부터 삼성생명 주식 299만 주를 취득했다. 같은 날 이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씨가 최대 주주로 있는 삼성에버랜드도 마찬가지로 이들 임원에게서 344만 주를 사들였다. 이로써 이 회장의 삼성생명 지분은 10%에서 26%로, 삼성에버랜드의 삼성생명 지분은 2.2%에서 20.7%로 치솟았다. 1996년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이 이재용씨를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의 최대 주주로 등극시킨 것이었다면, 그로부터 2년 뒤의 삼성생명 주식 거래는 ‘이재용 → 삼성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전자 → 삼성카드 → 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의 완성을 의미했다.

이 거래는 1999년 10월 공정거래위원회에 꼬리가 밟혔다. 삼성생명이 주요 주주의 주식 변동 현황을 제출할 때 실수인지, 고의였는지 변동 사실을 통째로 빼먹었던 것이다. 공정위는 당시 “삼성생명이 주식 소유 현황을 허위로 신고했다”며 경고 조처를 내렸다. 공정위는 그러면서도 “여러 정황에 비춰 중대한 법 위반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고, 전·현직 임원들의 갖고 있던 주식의 성격(주식 취득 경위와 자금 출처)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의 상속 지분이 차명으로 분산돼 있다가 실명화한 것이라거나 계열사에서 조성한 그룹의 비자금과 연결돼 있다는 의혹만 무성한 채 진실은 묻히고 말았다.

당시 의혹이 일 수밖에 없었던 특별한 사연이 있다.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한 시민단체 쪽에선 이미 몇 차례 제기됐던 바인데, 당시의 거래 가격은 상식의 범위를 뛰어넘었다.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주식을 매입한 가격은 주당 9천원이었다. 이는 2000년 3월 이 회사의 사업보고서에서 확인된다. 이 회장의 경우 주당 얼마에 매입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같은 날 이뤄진 거래라는 점에서 주당 9천원에 사들인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게도 그로부터 불과 7개월 뒤에 이 회장이 삼성자동차 채권단에 자신 보유의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를 부채 처리용으로 사재 출연한다고 발표할 때는 삼성생명 주식의 주당 가치를 70만원으로 책정했다. 이는 전·현직 임원들이 보유하고 있던 삼성생명 주식이 실은 선대 회장(이병철)의 지분이 차명으로 은닉돼 있다가 2, 3세인 이건희 회장 부자에게 세금 없이 대물림된 것이란 분석을 낳기에 충분했다.

삼성생명 주식의 차명 거래 의혹이 확인되는 데 따른 파장의 강도는 노출 범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전·현직 임원들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지분뿐 아니라 1998년 12월에 거래가 이뤄진 부분까지 차명으로 확인되느냐 아니냐가 중대 변수로 꼽힌다. 1998년 12월 이전 전·현직 임원들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도 차명이었음이 특검에서 드러날 경우 이건희 회장과 삼성에버랜드의 삼성생명 지분을 둘러싼 논란은 증폭될 수밖에 없다. 당시 거래 물량은 640만 주로 주당 70만원으로 치면 무려 4조5천억원에 이른다. 정상적인 상속 과정을 밟았다면 세금은 2조2500억원(상속·증여세율 50%)에 이른다. 공소 시효를 넘겼다 해도 조세 포탈이란 사회적 비난을 피해가기는 어렵다.

직무유기? 삼성장학생?

지금껏 전·현직 임원들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주식 물량 16.2%에서 비롯되는 세금 문제만 보더라도 결코 녹록지 않다. 이 물량의 값어치는 2조3천억원에 이른다. 세금을 정상적으로 매긴다면 1조원을 훌쩍 넘어선다. 차명 주식이 확인되고, 이게 조세 회피 목적이었음이 드러나면 증여세를 물어야 한다. 이 때문에 삼성그룹 안팎에선 이 부분을 공익재단에 기부하는 방식으로 처리해 세금을 피하고 총수 일가의 실질적인 지배력은 유지하는 선택을 시도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미 비슷한 방식의 일처리가 있었다. 2006년 이건희 회장의 매형인 이종기 전 삼성화재 회장 소유의 삼성생명 주식 94만 주(4.7%)가 삼성공익재단에 기부된 게 그것이다. 이종기 전 회장 소유의 주식 또한 이병철 전 회장의 지분이 차명으로 분산돼 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세청에선 삼성생명 주식의 차명 사실 및 삼성 내부의 이런 움직임을 이미 파악하고 있으며, 적어도 현재 남아 있는 차명 지분에 대해선 세금을 물리는 복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삼성그룹 권력 구도의 변화와 관련해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 이상으로 중대한 사안인 삼성생명 주식 차명 의혹이 상대적으로 가려져왔던 배경을 김진방 교수는 대략 두 가지로 풀이한다. 하나는 시절이 잘 맞아떨어졌다는 점이다. 공정위 조사에 따라 삼성생명 주식 차명 의혹이 제기됐던 1999년에는 삼성차 부채 처리라는 대형 이슈에 휩쓸렸다. 돌이켜보면, 이건희 회장의 400만 주 출연은 삼성생명 주식 차명 의혹을 일거에 뒤덮는 묘수이기도 했던 셈이다. 둘째로, 삼성에버랜드건에 견줘 삼성생명건에는 이해관계자 및 감독당국이 많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삼성생명 주식 차명 거래 과정에선 피해를 입은 주주들이 없고 조세 포탈이란 세금 문제여서 국세청 외에는 손댈 감독당국도 없다. 국세청만 눈을 감으면 핫이슈로 부각되기 어려운 사안이다.

삼성생명 주식 차명건과 관련해 국세청이 국회 국정감사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2004년이었다. 당시 국회에선 대규모 주식 거래에 따른 양도소득세를 삼성 임원들이 제대로 납부했느냐는 질의가 쏟아졌고 국세청은 “개별 납세 자료이므로 공개할 수 없다”고 버텼다. 국세청이 삼성생명 주식 차명 거래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지, 알고도 모른 척한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문제의 거래가 이뤄진 지 10년이 지난 지금 특검에서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사실을, 영장 없이 계좌를 열어볼 수 있는 국세청이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건 국세청 바깥에선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모르고 있었다면 ‘직무유기’쯤 될 테고, 알고도 가만히 있었다면 ‘삼성장학생’이라는 비난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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