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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 들러붙은 ‘자동차 망령’

등록 2008-02-15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합의서대로 이행” 판결로 갚아야 할 돈 2조3천억원… 계열사 지급 의무에 대해 ‘배임’ 시비 불거질 수도</font>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font color="#00847C">[삼성 사태 쟁점] </font>

이건희 삼성 회장이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1월에 펴낸 자전적 에세이 에는 삼성그룹의 자동차 사업 진출이 이 회장 주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자동차 산업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했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전세계 웬만한 자동차 잡지는 다 구독해 읽었고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 경영진과 기술진도 거의 다 만나보았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며 10년 전부터 철저히 준비하고 연구해왔다고 할 수 있다.”

삼성의 자동차 사업이 성공으로 귀결됐다면 이 회장의 ‘위대한 공적’으로 떠받들려졌을 것임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거꾸로 자동차 사업 실패에 따른 가장 ‘무거운 책임’ 또한 그에게 돌려질 수밖에 없다.

합의서 당사자가 ‘3자’인 이유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서 ‘백기’를 들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내놓은 부채 처리 방안에는 이건희 회장의 책임이 명시돼 있다. 1999년 6월 말 이대원 당시 삼성자동차 부회장은 삼성 본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자동차의 조속한 처리를 위해 법정관리를 신청하고, 채권단과 협력업체 등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삼성 관계사의 경제적 손실 및 그에 따른 법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이건희 회장이 2조8천억원 상당의 사재인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를 삼성자동차에 출연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삼성 쪽의 이런 발표는 그해 8월 채권단과, 이건희 회장 및 삼성 계열사들 사이에 체결된 합의서에 반영된다. 합의서 내용을 보면, 이 회장은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무상으로 증여하고 삼성 계열사들은 이 주식을 2000년 말까지 처분해 한빛은행(현 우리은행), 서울보증보험 등 채권단에 지급하도록 돼 있다. 주식 처분 금액이 삼성차 부채 규모인 2조4500억원에 미달할 경우 이 회장으로 하여금 삼성생명 주식 50만 주를 추가로 내놓게 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면 삼성 계열사들이 후순위채 매입 방식으로 채권단의 손실을 메워주도록 했다.

이중삼중의 자물쇠를 채운 당시 합의서에서 새삼 눈길을 끄는 내용은 계약의 당사자가 ‘양자’가 아니라 ‘3자’라는 사실이다. 이건희 회장이 ‘갑’, 삼성물산·삼성전자 등 삼성 계열사들은 ‘을’, 채권금융기관들은 ‘병’으로 각각 표기돼 있다. 이 회장과 삼성 계열사들을 한 묶음으로 두지 않고 갑과 을로 분리한 것은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에서 결정권을 행사한 이 회장의 무거운 책임을 특별하게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겉보기에 상당히 촘촘하게 마련된 것으로 보이는 채권단의 ‘그물망’은 잘 알려진 대로 ‘고기’를 건지지 못했다. 삼성차 부채 처리의 핵심적인 실마리로 여겨진 삼성생명 상장은 지금껏 이뤄지지 않았고, 이건희 회장이나 삼성 계열사들이 부채 문제 해결을 위한 추가적인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았다. 채권단의 일원인 서울보증보험이 증여받은 삼성생명 주식 117만 주를 서울보증유동화전문 유한회사에 주당 70만원에 매각한 것을 빼고, 채권단은 증여받은 삼성생명 주식을 현금화하지 못한 채 내내 끌어안고만 있는 처지다. 삼성 쪽에서 버티기로 일관하자 채권단은 마침내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채권소멸 시한(2005년 12월 말)을 코앞에 둔 12월9일이었다. 소송 가액은 부채 2조4500억원과 연체이자 2조2880억원, 위약금 등 약 5조원에 이르러 ‘단군 이래 최대 송사’로 일컬어졌다.

삼성과 채권단의 부채 소송에서 핵심 쟁점은 합의서의 효력 유무였다. 합의서대로 이행하라는 채권단의 요구에 삼성 쪽은 “합의서는 채권단의 강압에 의해 작성돼 무효”라고 맞서왔다.

견제받지 않는 황제 경영의 위험성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김재복 부장판사)는 1월31일 판결에서 채권단의 손을 들어줬다. 최대 쟁점이던 합의서의 효력에 대해 재판부는 “원고들(채권단)이 독점적·우월적 지위에서 금융제재 결의와 정부의 공권력 행사라는 부당한 수단을 악용하여 강압적으로 이 사건 합의를 체결했다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피고들(이건희 회장과 삼성 계열사들)은 여러 사정을 종합해볼 때 이해득실을 따진 뒤 자발적으로 이 사건 합의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전체 사업능력 면에서 피고가 원고를 능가하는 등 열악한 지위에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서울보증보험이 이미 매각한 117만주를 뺀 삼성생명 233만주(1조6338억원)를 ‘삼성 계열사들’이 처분해 이를 채권단에 지급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이었다. 또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는 주식 처분 대금이 2조4500억원에 미치지 못할 경우 삼성생명 주식 50만 주의 한도 내에서 증여하고, 계열사들은 이에 대한 부족분을 충당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간단히 말해 애초의 합의서대로 이행하라는 내용이다. 삼성 쪽에서 갚아야 할 돈은 연체 이자 6860억원을 포함해 2조3천억원(서울보증보험에서 삼성생명 주식 유동화로 회수한 8천억원 제외)에 이른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이번 판결의 의미를 두 가지로 꼽았다. 외환위기를 겪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위기의 빌미였던 핵심 사안의 처리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행형임을 보여준다는 게 그 하나다. 이번 판결은 1심이어서 최종 판결까지는 또 얼마나 시일을 끌어야 할지 알 수 없다. 두 번째 의미는 견제받지 않는 황제 경영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이다. 총수 1인의 독단적 판단에 따른 투자 결정으로 계열사들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나아가 국가 전체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다. 전 교수는 최근의 비자금 증거 인멸 사태를 거론하며 “‘주인 있는 책임 경영’과 ‘견제받지 않는 독단적 경영’은 구별돼야 마땅함에도 삼성의 경우 애석하게도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채권단의 승소로 돌아간 1심 판결에 삼성 쪽은 말을 아끼고 있지만,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1999년 이후 10년 가까이 끈질지게 들러붙어 있는 망령 같은 삼성차 부채 처리 문제가 발목을 잡아 갑갑하다는 반응일 뿐, 판결 결과가 놀랍다는 표정은 아닌 듯하다. 판결의 내용이 이미 작성한 합의서를 이행하라는 것인데다 그나마 아직 1심이어서 최종 판결로 가는 과정에서 뒤집힐 것이란 일말의 기대도 있다.

삼성은 1심 판결에 대한 항소를 통해 시간을 벌고, 갚을 돈을 깎는 시도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삼성 쪽의 전략은 삼성생명 상장과, 이 문제와 긴밀하게 얽힌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원칙 격파이다. 삼성생명 상장은 윤증현 위원장 시절 금융감독위원회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삼성의 입맛대로 계약자 몫 한 푼 없이 상장할 수 있는 길이 트여 있다.

‘금산분리 격파’와 연결된 삼성생명 상장

문제는 삼성생명의 상장이 ‘이재용 체제’의 핵심인 에버랜드의 금융 지주회사 전환을 뜻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생명을 통해 삼성전자를 지배하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삼성 쪽이 금산분리 원칙 폐지를 공약으로 내건 이명박 정권의 출범을 목 빠지게 기다려온 속사정이다. 삼성의 뜻대로 일이 술술 풀려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명박 정부 출범 뒤 주요하게 지켜봐야 할 관전 포인트다.

삼성차 부채 소송은 이와 별도로 삼성 내부의 손실 분담을 둘러싼 논란거리를 남기고 있다. 이 회장의 독단으로 빚어진 삼성차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급보증도 서지 않은 삼성전자 등 계열사들이 동원될 경우 ‘배임’ 시비가 불거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삼성으로선 설상가상이다. 비자금 파문, 삼성중공업의 원유 유출 사고에 이은 삼성차 부채 소송 패소로 삼성은 불면의 밤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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