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그 삶이 동백꽃잎보다 붉어라

등록 2008-02-01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트랜스젠더 딸이 어머니를 인터뷰하다… 혼란스러운 ‘나’라는 구덩이를 가뿐하게 뛰어넘으셨네</font>

▣ 김비 소설가

“봐라, 이쁘쟈?”

물뿌리개를 들고 날 바라보는 엄마의 목소리는 경쾌했다. 그러나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에, 언제나 바지만 입고 다니시는 엄마에게, 빨간 꽃잎을 친친 휘감은 육감적인 몸짓의 동백꽃잎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 ‘저 시뻘건 주둥이를 봐라, 저 씰룩이는 궁둥짝을 봐라! 어느 사내놈을 후리려고 엄동설한마다 저렇게 헤픈 꼴로 벌어지는지.’ 오히려 끌끌 혀를 차며 팩 돌아서야 그게 엄마다웠다. 그런데 엄마는, 겨우내 찬바람 속에 떨고 서서, 매일 그 키 작은 나무에 열심히 물을 주었더랬다. 무거운 초록색의 빳빳한 이파리들을 둘러싼 나무가 뭐기에 저렇게 지극정성이신가 했는데, 소한을 지나고 은행알만 한 봉오리가 맺힌다 싶더니, 사방으로 갈라지며 시뻘건 꽃잎들이 시부저기 드러났다. 그러자, 엄마는 매일 그 꽃 앞에서 헤벌쭉 벌어진 입을 닫지도 못한 채, ‘이쁘쟈, 이쁘쟈?’를 연발하고 있었다.

식모살이·종살이… 팔려가듯 시집가다

“아유, 정말 빨가네. 근데 어울리지 않게 뭐 그런 꽃을 좋아하신데?”

“이게 얼마나 이쁘냐? 육지서는 어디 한겨울에 이런 꽃 보기나 하냐? 아유, 이쁘다, 정말 이뻐! 히히히.”

엄마의 웃음소리는 그러고도 한참을 이어졌다.

그러나 사실, 나는 꽃을 좋아하는 엄마를 잘 알지 못한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십 몇 년의 잃어버린 시간들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열 몇 살에서 스물 몇 살 즈음. 엄마의 마흔 몇 살에서, 쉰 몇 살 즈음. 내가 엄마를 잃어버렸을 때, 엄마의 입술에는 빨간 립스틱이 칠해져 있었는데, 엄마를 다시 찾았을 때, 엄마의 몸 여기저기에는 새까만 멍 자국들이 박혀 있었다. 엄마가 나를 잃어버렸을 때, 나는 내성적이고 허약한 아들이었는데, 나를 다시 찾았을 때, 나는 외향적이고 씩씩한 딸이 되어 있었다. 엄마는 나를 모르고, 나는 엄마를 몰랐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나 사이의 시간들은 그렇게 너무 깊어 아뜩했다.

부끄럽지만, 엄마의 고향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도, 겨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엄마 고향이 강진이라고 했지?’라고 재차 묻는 내게, ‘그래, 개똥생이!’라며 엄마는 킬킬 웃었다. 초등학교도 몇 년씩 ‘꿀어’가며 다니다가 그마저도 끝까지 다니지 못하고 졸업장도 받지 못했다, 멋쩍게 웃으며 엄마는 내 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나 더듬더듬 말을 잇던 엄마는 더 이상 웃지 못했다. 처음부터 할머니 손에 자라며, 겨우 열 살을 넘겨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엄마는 어둑어둑한 형광등 밑에 눈을 두고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내 외할머니, 그러니까 생모의 손에 이끌려 식모살이하던 그 집을 빠져나와서도, 또다시 생모에 의해 다른 집 종살이를 하러 내쫓겨야 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엄마는 자꾸 눈을 깜빡였다. 몇 년의 식모살이 뒤에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의 생모는 혼인을 제안했다고 했다. 먹고사는 입이라도 하나 줄여보자, 생모가 강제로 내 아버지와 혼인시키게 된 것이, 엄마 나이 겨우 열일곱의 일이었다. 엄마는 그때, 아버지가 손이 하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눈이 하나 없다는 사실과, 아버지가 이미 세 번째 결혼이라는 사실과, 아버지에게 무서운 병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팔려가다시피 시집을 가서 아버지의 병치레와 폭력에 시달렸던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의 입술은 자꾸 버적버적 말라갔다. 그래서 너희들한테 못할 짓을 했구나,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의 두 눈은 물 머금은 꽃잎처럼 빨갛게 물들어갔다.

“이 정도면 목욕탕 다녀도 되겠어”

“어렸을 때, 꿈 같은 건 없었어?” 목이 메어 멍청한 질문을 내뱉고 만 내 앞에, 엄마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지랄하네, 먹고살기도 힘든 판국에 꿈은 무슨?” 이미 엄마는 쓱쓱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숨을 쉬며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허락되는 그 ‘꿈’이라는 말 한마디가, 엄마의 시간들 앞에서 이물스럽게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사는 게 별거냐? 그냥 닥치는 대로 사는 게야. 내가 뭘 생각하고 후회하고 그렇게 속 끓이면서 사는 사람이었으면, 진즉에 죽었어. 네 엄마는 못 배우고 어리석어서, 그래서 나 고생하고 너희들 고생시키고…. 그래도 이렇게 뻔뻔스럽게 살아 있지 않냐?” 엄마는 그렇게 당신 자신을 ‘뻔뻔스런 년’으로 몰아치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엄마는 절대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었고, 뻔뻔스런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기억한다. 내가 성전환 수술을 한 뒤, 제일 먼저 내 손을 잡고 여탕에 함께 가 내 등을 밀어주던 엄마의 투박한 손길을. ‘이 정도면 되겠다, 이 정도면 그냥 목욕탕 다녀도 되겠어. 그동안 목욕도 마음대로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냐?’ 그렇게 내 여윈 등짝을 닦아주시던 엄마의 위로를. 그 어떤 학문적인 이론도, 사회적 제도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는 그 혼란스러운 구덩이를 엄마는 너무나도 가뿐하게 뛰어넘어 버렸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 부러 큰 소리로 ‘우리 딸, 우리 딸!’ 나를 자랑하는 엄마의 속내는 감히 그 어떤 것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너무나도 아득하고 까마득한 그런 깊이였다.

오늘도 엄마는 활짝 만개한 동백꽃 앞에 섰다.

“봐라, 얼마나 이쁘냐? 이쁘쟈, 그쟈? 히히히.”

어쩌면 엄마는 그렇게 빨갛고 대담하게 벌어지며 살지 못했던 당신의 삶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는지도. 칼 진 바람과 무서리 속에서도 탱탱하게 봉오리를 맺고 꽃을 피우는 그것의 생명이 부러운지도.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런 엄마를 향해 탄성을 질러야 할 것 같다. ‘아유, 이쁘다, 이쁘다!’ 중얼거리며, 엄마의 쪼그라든 얼굴을 자꾸 쓰다듬어야 하는 것인지도. 동백꽃보다 더 예쁘게 길러낸 그 삶을 어루만지며 경탄해야 하는지도.

“그러게, 정말 예쁘네, 정말 예뻐!”

“정말 예쁘네, 정말 예뻐!”

나는 부러 큰 몸을 흔들며 엄마 곁에서 호들갑을 떤다. 내 웃음을 보며 엄마의 얼굴은 더욱더 새빨갛고 곱게 피어난다. 나도 엄마를 따라 큰 소리로 웃고 있는데, 자꾸 눈가가 따갑다. 도대체 왜 자식이라는 족속들은 번번이 그렇게 때늦은 깨달음에 아쉬워해야 하는 건지. 허투루 흘려보낸 시간들이 안타까워, 몸이 단다. 내가 보는 엄마의 얼굴이 동백꽃처럼 매양 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자꾸 눈이 맵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