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분해’ 위기 몰린 통일부…정세현 전 통일 장관 “남북 관계는 사라지고 북-미 관계만 남게 될 것”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법전을 펴봤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2조에선 국민의 요건을, 3조에선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란 영토조항이 등장한다. 이어 헌법 4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통일부의 존재 근거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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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3월1일 만들어져 남북 대화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해온 통일부가 사라질 위기에 몰렸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1월16일 발표한 정부조직 개편안에서 통일부를 외교통상부와 통합하겠다고 밝힌 탓이다. 이경숙 인수위 위원장은 이날 개편안을 내놓는 자리에서 “통일정책이 특정 부서의 전유물이 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외교부와 합쳐지는 통일부의 주요 업무 가운데 남북경협과 탈북자 문제 등은 지식경제부와 지자체 등으로 넘어가게 된다. 말이 ‘통합’이지, 사실상 ‘공중분해’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 상황인 게다. 철학 없는 실용은 공허하다. 아니, 위험하다.
“시계를 봐도 한참 잘못 봤고, 달력을 봐도 옛날 걸 보고 있다. 대체 이게 말이 되느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2002~2004년)은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200여 정당·사회단체로 구성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는 1월16일 오후 2008년 첫 ‘통일포럼’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었다. 미리 예정된 행사였고, 주제는 ‘새 정부의 대북정책, 어떻게 추진돼야 하는가’였다. 이 단체 상임의장인 정 전 장관은 기조연설을 하기로 돼 있었다. 하필 그날 인수위의 통일부 폐지 발표가 나온 게다. 그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다 읽고도, 이날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가며 인수위의 결정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연설을 마친 뒤 여전히 상기된 표정인 정 전 장관과 행사장 부근 찻집에서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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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미국 중심 사고가 강하게 작용
인수위가 통일부 폐지론을 내놨다.
=외교부에 통합해도 된다고 생각하다니…. 참, 그 생각이 아주 단순하다. 외교 협상과 남북 협상은 같은 걸로 볼 수 없다. 외교 협상은 일종의 ‘거래’ 개념이지만, 남북 협상은 ‘명분’ 때문에 밤을 새운다. 서로 ‘윈윈’하는 선에서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합의를 쌓아가면서 남과 북이 서로 동질화할 수 있는 영역을 최대한 넓혀나가는 과정이 바로 남북 협상이다. 단순한 거래가 아니란 얘기다. 남과 북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니다.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데도 외교 차원에서 남북 관계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방증이다. 한마디로 충격이고,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인수위는 ‘효율’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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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동양보다는 서양이 기능과 효율을 따졌다.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통독 이전에 서독 외무성에선 동·서독 간의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았다. 물론 통일 분위기 조성을 위한 노력이야 했겠지만. 동독을 상대하는 문제, 나아가 통독 이후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해선 ‘내독관계부’에서 다뤘다. 기능적인 측면에서도 이 둘을 통합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통일부를 외교부에 통합하겠다고 한 발상은, 아마도 ‘우리 힘으로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미국과 보조를 맞춰가면 풀리지 않겠느냐’는 미국 중심 사고가 강하게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통일부가 자꾸 김을 빼니 북한도 굴복을 하지 않는다’는 일차방정식적 사고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북핵 문제는 18년이나 끌어온 사안이다. 동맹관계를 복원하거나 협상만 잘한다고 해서 풀리지 않는다. 복잡한 다차·다원방정식이다. 통일을 위한 외교환경 조성은 외교부가 하고, 통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통일부가 맡아야 한다.

북-미가 합의하면 돈이나 내면 그만?
통일부가 지나치게 커졌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통일부는 1969년 3월1일 문을 연 국토통일원이 모체다. 난데없이 만들어진 게 아니다. 국내적 요구와 국제정치적 필요에 따라 설립된 게다.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국내적으로는 경제가 조금 나아지기 시작했다. 먹고살기 바빠서 챙기지 못했던 민족의 비원, 통일 문제에 자연스럽게 정부가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정부의 의지를 모으고, 국민의 아이디어를 담아 정책으로 개발하는 부서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탄생한 게 통일원이다. 1971년 8월12일 이산가족 상봉사업을 제안하면서 비로소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대화의 역사가 시작됐다.
다른 한편으로 변화하는 국제정세가 남북 간의 대화를 요구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 ‘미-소 데탕트, 미-중 화해’란 흐름 속에서 그동안 중-소 보호 속에 있던 북한과 미국의 보호 아래 있던 남한은 일종의 불안감을 공유했다. 서로 만나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게다. 특히 경제발전 초기에 있던 남쪽으로선 안보위기 가능성을 낮추는 게 지속적 경제발전을 위한 전제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통일원은 직원 41명으로 시작해 현재 400여 명까지 늘어났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10배가량 인원이 늘어난 게다. 국력이 커지면 외교공관은 당연히 늘어나는 법이다. 남북관계는 양의 축적이 질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상전벽해 수준이다. 대결의 빙벽이 녹아내리고 화해가 싹트고 있다. 통일부 업무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 인원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게 대체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겐가.
통일부가 없어지면 어떤 변화가 생기나?
=남과 북의 화해협력 추세가 급속도로 둔화할 것이다. 남북 관계 전면 중단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다. 북-미 관계가 이런저런 이유로 삐걱이면 남북 관계도 따라서 삐걱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손해는 고스란히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또 북으로선 남쪽과 대화할 필요가 없다. 미국만 상대하면 그만이다. 남북 관계는 사라지고 북-미 관계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때처럼 ‘통미봉남’(通美封南·미국과는 대화하지만 남쪽과는 거부한다)이 재현되는 게다. 우리의 역할은 그때처럼 북-미가 합의하면 돈이나 내면 그만인 게 되고 만다. 경수로 비용도 남쪽에서 꼼짝없이 70%를 부담하지 않았나.
남북 관계가 한-미 관계의 규정을 받게 되면, 결과적으로 외교가 없어지게 된다. 미국과 모든 입장을 같이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한-미 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한-중 관계에도 변화가 올 수 있다. 한-미-일 남방3각 대 조-중-러 북방3각이란 오래된 구도가 재현될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이는 뭘 의미하나? 6자회담의 표류다. 그동안 6자회담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남한이 미국과도 가깝고, 중국과도 얘기가 잘 통했고, 통일부가 북한과도 대화를 해나갔기 때문이다. 그게 어려워질 수 있다.
통일부 폐지가 다른 정부조직 개편을 위한 협상론이란 지적도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더 큰 문제다. 민족의 비원을 다루는 통일 문제를 협상의 칩쯤으로 생각했다면, 그건 도덕의 문제다. 남의 가장 아픈 부분을 약점으로 잡고 협상을 하는 것처럼 절대 해선 안 될 일이다. 일단 이렇게 해보고, 안 되면 나중에 다른 식으로 해보자는 식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인생에도 연습은 없다. 하물며 국가 운영이다. 섣부르게 움직여선 안 된다.

핵무기 실험 파국으로 끝난 부시를 보라
북핵 문제가 심상찮은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미국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벌써부터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를 중심으로 북핵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성급한 얘기까지 나온다. 힘있는 쪽이 밀어붙이면서 굴복하라고 해선 안 된다. 미국 입장에선 이라크에 발목이 잡혀 북한을 극단적으로 압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른바 ‘비전비화’(非戰非話) 상태가 길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가면 조지 부시 행정부의 남은 임기 동안 북핵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미국에서 새 정부가 들어서면, 또 6개월 정도는 정책 검토를 해야 한다. 2009년 중반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될 수 있다는 말이다. 강력한 평화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 부시 행정부도 정책 방향을 바꿨다. 잘 설득하면 함께 갈 수 있다. 외교부와 통일부가 서로 갈등도 하고 협력도 하면서 이끌어나가야 한다. 그럭저럭 버텨나갈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다.
새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 대해 평가해보자.
=이명박 당선자가 남북 정상회담에 적극성을 보여 다행이다. 그런 열린 자세가 절실하다. 남북 경협이 심화하면 정치·사회적 파급이나 부작용이 따를 수 있음을 북도 잘 안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속도 조절도 하고, 고민도 했다. 그럼에도 남북 화해와 협력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북한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정권교체를 했으니 현 정부의 정책을 무조건 뒤집을 것인가. 외교·남북 관계가 초당적이어야 하는 건 국익 때문이다. 실용주의에 기반해 북의 개혁·개방을 지원하는 게 경제 살리기다. 안보불안으로 신용등급이 한 단계만 낮아져도 증시에 끼치는 충격이 막심하다. 그래서 남북 관계는 물이 가득한 어항을 들고 자갈밭 걷는 심정으로 다뤄져왔다.
부시 행정부는 6년여 동안 선 북핵 폐기를 주장하면서 대북 압박을 했지만, 성과는 없이 오히려 북한의 핵무기 실험으로 파국을 맞았다. 시간과 국력을 낭비한 연후에야 북-미 대화와 보상, 그리고 행동 대 행동으로 선회했다. 차기 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또 차기 미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예측하면서 가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오히려 초기 부시 행정부와 비슷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시계를 봐도 한참 잘못 보고, 달력을 봐도 옛날 것을 보고 있다.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만큼 한쪽으로 줄을 서기보다, 이제는 세계 11대 경제대국의 위상에 걸맞게 내 나라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외교를 해야 한다.
북핵 문제 풀리면 공은 누구 것이겠나
1977년 국토통일원 공산권연구관실 보좌관으로 통일부와 인연을 맺은 정 전 장관은 민족통일연구원장과 통일부 차관, 국가정보원장 통일특별보좌역 등을 두루 거친 남북 대화의 산증인이다. 1시간 남짓 격정을 토해낸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국회를 믿는다. 한나라당에도 이 문제를 적절히 판단할 분들이 있다고 본다.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외교나 대북 문제는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그게 실용주의다. 남북 관계를 이 정도까지 만들어놓는 데만 수십 년 세월이 걸렸다. 1989년 남북 연합 얘기를 꺼낸 뒤로만 따져도 20년 세월이다. 독일 통일의 주역은 동방정책을 추진한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아니다. 기민당의 헬무트 콜이 통일 독일을 만들어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기민당은 야당 때만 해도 사민당의 통독정책을 비판했지만, 집권한 뒤에는 태도를 바꿨다. 그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가 풀리고 남북이 국가연합 단계로 나아간다면 그 공이 누구에게 돌아가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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